『영천(永川)에 사는 백성이 그 자식에게 훈계하기를, “양반과 사귀지 마라. 꼭 곤장 맞을 일이 생긴다. 관리와 사귀지 마라. 반드시 고된 노역에 끌려가게 된다. 중들과 사귀지 마라. 틀림없이 젊은 아내를 잃게 된다.” 하였으니, 영남 사람들이 명언이라 하였다. 이와 똑같은 식으로 자식들을 훈계할 수 있다. “부자와 사귀지 마라. 꼭 네 재산을 잃게 된다. 권력 있는 자와 사귀지 마라. 반드시 네 몸을 망치게 된다. 술사(術士)와 사귀지 마라. 틀림없이 네 집안을 망치게 된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선생의 청성잡기에 나오는 성언(醒言)이다. 성언(醒言)이란 ‘깨우치는 말’이라는 뜻이다. ‘깨우치는 말’로써 위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중요한 객관적 인식의 한 지평을 제시한다. 사회적 관계 맺음에 있어서 경계할 대상들을 인물들, 특히 신분에 특정하여 가까이 사귀어서는 안 될 그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훈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훈계란 사전을 찾아보면, ‘잘못하지 않도록 타일러 주의시킴, 타일러 주의시키다’라는 뜻이다.
숱한 사람들이 강조하듯이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필연적으로 타인과 부대끼며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관계적 존재다. 여기에는 물론 자연과 세계도 포함된다.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점에서 싫든 좋든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것은 변함이 없다. 다만, 세상사가 더 다양해지고, 더욱더 복잡해졌을 뿐이다.
관계의 이상적인 형태는 치우침이 없는 동등함에 있다. 자연스럽게 함께 어우러지는 조화에 있다. 관계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좁은 의미의 인간관계든 넓은 의미의 사회적 관계든 어떤 형태로든 관계 설정이 잘못되어 있거나, 근원적으로 왜곡 혹은 훼손되어 있다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사회적 관계가 가까운 인간관계로까지 발전할 경우 더욱 심각해진다. 그러한 문제의 근원이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스스로 바로 잡을 수 없는 타의로부터 온 것이라면 불행한 일이라 하겠다. 사람은, 자기 편의에 따라 수단이나, 도구로 취급하거나 취급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그런 불합리한 일들이 모양만 달리 한 채, 흔하게 존재한다.
위의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종을 제외하고 언급되는 인물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첫째로 사회적 신분이 있는 계층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형태로든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소위 사회지도층에 속한 신분계층이다. 둘째로 이 계층들이 신분에 따라 그 직업이 분화될 수도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비생산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즉 그들의 신분이 직접적인 신체 활동, 즉 노동을 통한 생산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부유한 사람들로 경제, 정치, 종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특정한 신분 계층, 즉 비생산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사회 특정계층을 가리켜 미국의 경제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Bunde Veblen, 1857~1929)은 그의 저서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An Economic Study in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1899)』에서 ‘유한계급’이라고 명명한다. 베블런이 정의한, 유한(有閑) 계급이란 축적된 자산이나 세습된 부를 통해 따로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부유층이다.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각종 여가(Leisure)를 즐기는 사회계층을 말한다. 소위 유한부인 혹은 유한마담을 연상하면 이해가 될 것 같다.
베블런에 의하면, 유한계급은 소위 “벼락부자들”(robber barons)이다. 사회적 윤리의식이 희박하고, 도덕적으로도 타락한 자본가들을 지칭한다. 이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1800년대 말 급속한 자본주의의 발전과 제국주의의 확장을 통한 식민지 경제의 확대, 산업화의 촉진,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급격한 경제 성장과 팽창이 전개된 시대적 상황 덕분이다. 제도적인 법률과 정치가 취약하고 혼란한 틈새를 이용하여 노동착취, 매점매석, 정치적 술수와 정치권력과의 결탁, 자본 독식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robber barons)이다.
이들은 자손들에게 경제력과 재산을 넘겨주는 부의 세습과정을 통해 사회 경제적으로 대를 이어 우월한 사회적 위치를 확보한다. 이로써 새로운 형태의 상류계층을 형성하였다. 즉 유한계급은 부의 세습을 통해 재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자손에게 경제적인 것 외에도 사회적인 명성을 확보하여 부자의 입지를 굳힌다. 마침내 유럽의 전통 귀족들처럼 명망 있는 가문의 상류층 자손들인 양 자부심을 갖고 행세하게 된다.
그러나 유한계급은 유럽의 전통 귀족들과는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즉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이나 의무를 솔선수범하는 것을 명예로 미화되는 전통적인 유럽의 부자들과는 현실적인 도덕성에서 엄연히 구분된다. 베블런이 특정한 유한계급은, 자신들의 존재와 부의 현상유지 그리고 자신들의 공명과 안위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부자들이다. 세습된 부를 기반으로 사회로부터 부를 계속 축적하고, 또 누리지만, 사회적 책임이나 도덕, 사회적 모범이나 공감에는 전혀 상관없는 부류들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는 1800년대 말 1900년 대 초의 격변기의 미국 산업사회와 그 양상이 많이 닮아있다. 다만 그 차이는 태생부터 독재 정치 정권과의 결탁과 적극적인 동반자 협력자라는 정경 유착에 있다. 일제 식민시대에 부와 자본을 축적한 친일파 잔재세력들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와 전두환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정치권력과 결탁한다. 소위 개발독재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부류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재벌이다. 그 외에도 직간접적으로 개발독재에 관리자로 참여하여 국가의 부를 도둑질한 군부세력과 독재정권 정치 하수인 세력들, 그리고 기득권 언론권력과 기업형 종교 기득권 세력들이 있다.
지난 MB정권을 기반으로 정치권력이 금권과 결합한 형태로, 강력한 기득권 세력으로 다시 결집한다. 정치, 경제, 입법과 사법, 교육, 종교, 언론,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카르텔화 하여, 권력을 사유화, 자본화한 것이 특징이다. 이들에게는 경제적 환난이나 전쟁과 재난, 기아 같은 사회적 위기와 불안 같은 것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계층이다. 사회적 위기나 혼란과 불안은, 오히려 그들의 부를 축적하고 더욱 공공히 할 수 있는 호기다.
베블런에 의하면, 유한계급의 특징은 금력 과시 경쟁(Pecuniary Emulation), 과시적 여가(Conspicuous Leisure) 그리고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 이 세 가지로 축약된다. 다시 말해, 이들 계층은 육체적 노동에 의한 직접 생산활동과는 무관한 비생산적 집단이다. 생계에 연연하지 않는다. 여유로운 소비 생활과 여가를 즐길 뿐이다. 사치스럽고 값비싼 의상, 값비싼 음식, 값비싼 자동차,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과 아름다운 저택, 고가의 미술품, 애완동물, 스포츠, 사교, 여행과 레저 그리고 학문과 문학예술 등과 같은 고상한 취미생활, 이러한 사치 향락이 유한계급이 향유하는 생활의 상징이요. 특권이 된다. 생활을 통해 금권과 금력을 과시하는 집단이 곧 유한계급이다.
이것은 물질적 상업. 소비. 문화가 특징인 현대에 와서는 더욱더 불가분의 상관관계를 갖는다. 물질적 금력 과시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우월함과 세속적 성공과 축복, 그리고 부의 열매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선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집단도 소위 축복론, 청부론 등을 내세우며 금력 과시 경쟁에 크게 한몫을 한다. 금력 과시 경쟁은 과시적 여가를 부추기고 또 과시적 소비를 낳는다. 과시적 소비란 자신이 경제적 또는 사회적으로 남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려는 본능적 욕구에서 나온다. 과시란 실제보다 크게 나타내 보이려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지배 본능에 뿌리를 둔 것으로 파악된다.
다른 일면으로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보자면, 가난과 빈곤을 일종의 사회악이나 구조악으로 일괄적으로 일반화시킨다.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의 시각이다. 그러나 유한계급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마냥 부정적인 시각만을 가질 수는 없다. 유한계급이 가진 재력과 자본이 경제성장과 발전의 투자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의 경우, 이러한 긍정적인 면을 이용해 전직 사기꾼 대통령과 재벌들, 그리고 유명 사이비 기업형 종교인들이 나라를 부패 덩어리, 헬조선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국민을 우중(愚衆)으로 취급하여, 소위 경제발전의 “낙수효과”, “청부론” 등등을 거론하며 대국민 사기(詐欺)를 친 것이 그 일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사기는 여전히 종식되지 않고, 아무런 청산의 의지 또한 없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여러 형태로 모방되어 현재 진행형인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러한 유한계급과 대비되는 사회계층은 어떤 계층인가? 바로 하류 계층이다. 사회 상류층에 속하면서 경영, 법률, 정치, 스포츠, 종교 등 비생산적 활동에 종사하는, 생계에 구애되지 않는 돈 많은 사람을 유한계급으로 특정한다면, 하류 계층이란 노동으로 직접적인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계층이다. 노동이 직접 생계와 연관이 되는 계층이다. 부의 과시는 곧 사회적 지위와 개인의 능력을 가늠하는 척도로 여기는 것이 유한계급의 특성이다. 이는 곧 노동, 가난과 빈곤, 경제적 무능력 등은 유한계틍들의 천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유한계급에게 하류 계층은, 단순하게 그들의 지배 본능 그리고 과시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일종의 수단 가치에 불과하다. 베블런의 분석이 그렇다.
“하류 계층의 노동은 그 자체가 사회적 목적이라기보다는 상류계층의 ‘유한’을 유지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상류계층은 여러 형태의 사회적 수단을 통해 하류 계층의 노동을 자신들의 비생산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고 그들의 노동을 착취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빈곤의 절대 선까지 낮추어 그들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몰아간다. 이처럼 상류계층은 하류 계층을 철저하게 노동에 예속시킴으로써 그들의 창조력과 변화 가능성을 거세한다.”(베블런,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1899)』)
인류 역사의 거의 대부분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즉 노예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훈을 얻지 못하고 반성이 없는 역사는 반복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독일의 심리학자 에빙하우스의 실험에 의하면, ‘인간의 기억은 1시간이 지나면 기억의 절반, 2일이 지나면 75%, 일주일 후에는 80%를 잊어버린다’ 고 한다. 우리가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기억이 필요한 시점에 주변 기억과 상황을 추론하여 적절하게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록은 중요한 것이다. 인류문명의 발전과는 달리, 인간의 정신과 역사는 거꾸로 돌기도 한다.
『"아무리 큰 정신적 상처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충격이 가라앉고, 신경이 진정되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인간이다. 왜냐하면 다른 가능성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너무 간절하게 원하면 그것이 욕망 그 자체가 되어버리지. 그래서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 잊어버리곤 하지."』(영화 올 더 킹즈 맨, 2006 대사 중에서).
문제는 하류 계층이 유한계급인 상류계층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유한계급의 과시적 행태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 즉 하층 계층으로부터 경쟁심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대중들은 부자들을 동경한다. 결국 부자들이 소유한 재산은 명예와 존경의 대상이 되고, 전력으로 부를 획득했든 증여나 상속을 받아 차지했든 상관없이 부를 소유한 행위 그 자체만으로 부러움을 사게 된다. 이 관습이 더 고상한 경지에 오르면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부 보다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수동적으로 획득한 부를 더 명예롭게 여기는 사회 풍조가 생긴다. 이로써 후기 단계로 접어들면 경쟁을 넘어서 금력이 최고 명예롭다 여기는 “금력 과시 문화”(pecuniary culture)“로 발달하게 된다(베블런, 1899).』
베블런에 의하면, 유한계급의 근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사회 발전단계에서 농업혁명으로 계층 사회가 형성되고 약육강식이 지배하던 야만의 시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유한계급의 과시적 행태는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려는 지배 본능으로부터 나온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대중들은 사회적 책임과 의무, 그리고 보편적 공감능력이 결여되고 도덕적으로도 타락한 이기적인 부자들을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론 질투하고 또 동경까지 한다. 어떤 과정, 어떤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는가에 상관없이 부를 소유하고 그것을 과시할 수 있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 부러움을 사게 된다. 결국 부러움은 모방으로 변질된다.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가 곧 모방소비를 부추기는 것이다. 물질적 부의 과시와 재력이 곧 인격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하면서 닮아가고 싸우고 저항하면서 닮아간다. 그러면서 모방 본능에 이끌려 마침내 불법과 불의를 방관하거나 방임하거나 그 속에 아예 빠져서 용인하고 만다.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는 경제적 약탈 능력이 뛰어날수록 사회적 위치가 높으며, 이러한 약탈적 본능이 지배하는 사회는 약탈적인 유한계급의 관례가 주도한다. 그리고 야만 사회에서는 약탈 능력이 뚜렷하게 드러나 대중에게 손쉽게 우월감을 나타낼 수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유한계급이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를 통해 자신들의 약탈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사회경제적 유한계급, 즉 기득권자에 대한 비판과 기술자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져, 저자는 과시적 소비란 유한계급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화함으로써 다수의 대중을 능가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두산백과, 유한계급론).
또 다른 창조를 전제로 하는 생산적 모방이 아닌, 단순한 심리적 모방은 자존감의 결여에서 나온다. 결여된 자존감은 외부로부터 혹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받도록 끊임없이 인간의 무의식을 이끈다. 하지만 외적인 것으로는 결여된 자존감을 결코 채울 수 없다. 자존감의 결여는 의존으로 이끌고, 학습된 의존은 인간의 인식을 극도로 제한한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단하며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판단과 선택을 외부에 위임하여 그것에 의존한다. 결국 자존감의 결여는, 인간을 쉽게 수단 가치로 길들일 수 있는 동물의 차원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노예 의식으로 이끄는 것이다.
자존감이 결여되어 의존성이 강화되면, 자기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제대로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자기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거론하면, 단지 불편하고 시끄러운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잘못된 것보다는 골치 아프게 복잡하고 시끄럽고 양심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더 짜증스럽고 화가 나는 것이다.
제한된 인식은 생각의 여유마저 제한한다. 사람이 생각의 여유를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다. 자존감의 결여는 생계와 사회적 생존에 집착하면 할수록, 사회구조적인 현실의 벽에 직면할수록 심리적 무기력만 학습되고 강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가장 쉬운 심리적 합리화, 즉 자신의 제한된 인식범위 안에 자신이 믿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보도록 자신을 아예 가둬 버리고 만다. 글을 쓰는 나도 이점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과시적 소비가 경제적 약탈 능력을 과시하려는 지배 본능에서 나온 것이라면, 모방 소비는 합리성 효율성들은 따질 정신적 여유가 배제된 모방 본능에서 나오는 과소비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무작정 따라서 하는 식이다. 금력 과시 문화”(pecuniary culture), 상업형 소비문화, 물질적 소비를 부추기는 웰빙 여가문화는 생계에 지치고, 삶에 지치고, 생각의 여유마저 잃어버린 우중(愚衆)을, 쉽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방 본능을 자극한다. 결국 심리적 물질적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더 많이 소비하라, 더 빨리 죽으리니". 프랑스 68 혁명에 내걸린 구호 중의 한 구절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돈의 힘이다. 모든 권력은 돈으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세가 깨트려 버린 황금송아지는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우중(愚衆)의 새로운 우상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영화 올더 킹즈 맨(2006)에서 윌리 스탁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현실에 대해 제대로 모른다는 것은,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의사표현을 포기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경고한다. 즉 유한계급으로 통칭되는 기득권 세력에게 대중은 늘 이용만 당하고. 서민은 늘 착취당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영화는 그 일차적인 책임이 서민 대중 당사자의 무지에 있다고 화살을 돌린다..
유한계급이 가진 가치관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해 혹은 착각하고 있듯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의 가치관과는 다르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로버트 펜 워런(Robert Penn Warren)의 소설 올더 킹즈 맨(All The Kings Men,1946년)은 사회정의에 갈급한 보통사람에서 기득권 계층으로의 정착에 좌절된 정치인 윌리 스탁의 비극을 그린다. 윌리 스탁의 좌절과 함께 하류 계층, 즉 끊임없이 기득권 계층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서민 대중들의 실상을 고발한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1925년)'는 하류 계층에서 유한계급으로 도약에 성공했지만, 결국 비극으로 막을 내린 개츠비라는 입지전적인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개츠비의 삶을 통해서 유한계급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잘 보여준다. 두 작품 모두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화되었다.
『“그들을 꽃가마에 태워 복귀시키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음... 그들이 제 목을 쳐달라고 목을 길게 뺐는데 안 쳐주면 예의가 아니다... 가장 피가 많이 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내가 쳐줄 것”』(2015.4.21, 경향신문 보도기사 “목 쳐달라는데… 안 쳐주면 예의가 아니다”)
이 섬뜩한 말은 절대 왕조시대, 봉건 노예제 전제 군주시대의 말이 아니다. 며칠 전 모 유명 사립대학의 이사장이며 재벌인 유명인사가 자기 의사에 반하는 교수들을 향해 공언한 말이다. 이외에도 미개인, 천민, 노비, 버러지, 벌레 등등의 표현 등등은 이러한 류들이 가진 가치관의 적나라한 한 단면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실례라 하겠다. 거세개탁, 염량세태, 온갖 말을 다 동원해도 부족할 것만 같은 이 비정상적인 사회,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도외시한 채 일방적 자기 과시와 도덕성이 결여된 타락하고 부패한 사회지도층을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삶의 행태를 동경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부터 개개인이 벗어나지 않는 한 '개혁'을 거론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거듭말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무엇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려는 욕심에 글이 두서없이 장황해졌다. 개인적으로 말이 자꾸 길어진다는 것은 이 아둔한 필부가 느끼기에도 거세 개탁한 이 세태에 대해서 그만큼 할 말이 많다는 증거라 하겠다.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거듭 말하지만, 훈계는 ‘잘못하지 않도록 타일러 주의시킴, 타일러 주의시키다’라는 뜻이다. 성대중 선생의 훈계는 깊이 새겨둘 만한 가치가 있다. 재산을 잃고 몸을 망치며 심하면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부류와의 관계 맺음을 경계하라고 한다.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현실인식의 지평을 넓혀 준다. 왜 사회가 부정부패, 불의로 가득 차 있고, 국민의 원성과 한숨이 자자한데도 불구하고, 사회정의는 실종되고, 사법의 저울은 기울어지고, 부패의 청산과 개혁은 요원하기만 한 것인지를 말이다.
역사는 과거의 창을 통해 현실을 볼 수 있는 현실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좋은 방도가 된다. 지금이야말로 올바른 훈계와, 역사가 가리키는 인류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올바른 자기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성대중 선생은 사회적 관계 맺음에 있어서 가까운 인간관계로까지 사귀어서는 안 될 경계대상을 분명한 이유를 들어 특정하고, 베블런은 사회적 경제적 측면에서 그 특성을 잘 설명하고 이해가 가능하도록 이끈다.
나침반의 바늘은 항상 흔들리면서도 언제나 북쪽을 가리킨다. 의외로 인간의 이성은 합리성의 경향만을 가졌을 뿐, 그리 합리적이진 않다. 합리적인 인간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이율배반적인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향을 알고 있으면 최소한 길을 잃을 염려는 접을 수 있다. 인간관계든 사회적 관계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더불어 살아간다는 점에서, 관계는 사람에겐 아주 소중한 필연적인 가치다. 중요한 것은 그 관계 맺음이 서로에게 동등한 것인가?, 서로에게 미치는 에너지와 영향력이 건강하고 올바른 것인가? 혹은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좋은 것인가?, 아니면 해악을 초래하는 부정적인 것인가의 유무와 그 판별에 있다 하겠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일 것이다. 비록 '다른 가능성들이 전부 사라진다' 할지라도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고, "어떻게 해야 자존감이 결여된 심리적 모방 본능에 빠져들지 않는지 “, '어떻게 해야 건강한 관계인 건지", ”어떻게 해야 내외적인 유혹이나 저항에 말려들거나 타협하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타의에 의해 정신적 노예처럼, 수단으로 길들여지지 않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초심을 잃지 않고 불의에 물들지 않는지", "어떻게 해야 자기모순,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는지" 등등. 세상사 내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차피 사회든 인간 개인이든 관계는 내가 하기 나름이다. 휘둘림을 당하는 것도, 부림을 당하는 것도, 마치 일회용 휴지처럼 수단으로 이용당하는 것도 나다. 아는 것은 중요하다.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바르게 이해 하는가의 문제요, 실천의 유무에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유한계급이 많이 부럽다. 욕망이나 욕구가 없는 사람은 없다. 돈은 살아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만큼 필요한 것이다. 다행히 남을 의식하지 않고도, 자기과시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도, 모방 없이도, 최소한의 가난한 소비만으로도, 숨쉬며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그럼에도 욕망과 욕구는 언제나 내 속에서 꿈틀거린다. 나침반의 바늘은 끊임없이 흔들거리고, 나침반을 쥔 손은 언제나 나를 향한다. 그 중심에는 내가 있다. 흔들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정작 문제는 왜 흔들리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는 데에 있다. 더 큰 문제는 그 이유를 잘 알면서도 계속 흔들거리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총알이 없는 총은, 그저 장식용은 될지라도 실용에 있어선 나무 막대기보다 못하다.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다. 내 관심은 오롯이 인간에 있다.
가지와 잎이 우거진 나무에, 온갖 살아있는 생명들이 깃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과일 나무 밑에는, 드나드는 발걸음이 워낙 잦기 때문에, 굳이 길을 만들지 않더라도 길이 생기기 마련이다. 자기와의 관계든, 인간관계든, 사회적 관계든, 진정 진솔되게 공명정대한 조화로움을 이루고 살고 싶다면, 우선 나부터 그러할 일이다. "인간은 보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꿈을 꾸는 것이다. 언젠가 내면의 빛이 우리 속에서 빛을 발할 때, 다른 빛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괴테의 말이다.(2015.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