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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26. 2017

양두구육(羊頭狗肉)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영공(靈公)은 궁궐 안에서 시중드는 미녀들을 남장(男裝)을 시키고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러한 영공의 남다른 성적인 개인 취향은 민간에까지 퍼져 결국 나라 전체에 남장여자들로 넘쳐났다. 이 요상스러운 세상 풍습에 놀란 영공은 궁중 외에는 일반 여자들이 남장을 못하도록 엄한 禁令(금령)을 내렸다. 엄한 금령에도 불구하고 유행은 사라지지 않았고, 거리엔 남장여인들로 넘쳐났다. 금령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를 몰라 답답해진 영공은 재상인 안자(晏子)를 불러 물어보았다. 이에 안자는 대답하기를, "왕께서는 궁중에서만 여자에게 남장을 허락하시면서 백성들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소 대가리를 대문에 걸어놓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猶懸牛首于門而賣馬肉于內也). 왕께서는 남장하는 것을 왜 궁중에서만 금하지 않습니까. 만일 궁중에서도 금한다면 밖에서 남장하는 여자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영공은 안자의 말을 듣고 궁중에서도 남장을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금세 제나라 전국에서 남장하는 여자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유래가 된다고 알려진 고사다. 그 출전은 안자춘추다. 초기 기록에는 우수마육(懸牛首賣馬肉)에서, 후대에 가서 양두구육(懸羊頭賣狗肉)으로 와전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양두구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고사를 살펴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고사의 내용이 가리키는 바는 정작 양두구육이나 우수마육에 있지 않은 듯한 까닭이다. 단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 사용된 비유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는 뒤에 가서 살펴보기로 하자. 


양두구육은 '양머리를 내걸어 놓고는 실제로는 개고기를 판다'라는 뜻이다. '겉보기만 그럴듯하게 보이고, 속은 변변하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양은 우리가 익히 아는, 털 깎는 양이 아니라 동일한 한자로 표기되는 염소를 지칭한다. 실제로 염소고기가 개고기와 식감이 비슷하다고 한다.  우수마육(牛首馬肉)이란, '소대가리를 문에 내걸고 실제로는 말고기를 판다'는 뜻으로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드러낸 것이 그럴듯한 겉과는 달리 속이 질적으로 다른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결국 양두구육이든 우수마육이든 그 의미는 같다.


혹자는 양두구육을, '후한의 광무제가 내린 조서 가운데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말고기를 팔고 있으며 도척이 공자의 말씀을 뇌까리고 다닌다'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이도 있다.


도척(盜跖)은 악인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노(魯) 나라의 살인강도다. 졸개가 9,000명이나 되는 군도(群盜)의 우두머리다. 장자 외편에 이 도척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온다. 공자를 유일하게 면전에서 질책한 인물이다. 분명한 논리와 함께 살기어린 위엄으로 공자를 혼비백산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도척의 형은 노나라의 현자인 유하계(유하혜)다.  유하계는 공자와 막연한 친구지간이다.  공자는 유하계의 부탁을 받고 도척을 교화하러 찾아갔다. 도척은 공자를 앞에 두고,  사람의 간을 태연히 씹어 먹으며 이렇게 꾸짖었다. 

『너는 농사짓지 않으면서도 먹고살며, 길쌈하지 않고서도 옷을 입으며, 입술을 놀리고 혀를 차면서 멋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천하를 미혹하여 혼란에 빠뜨린다...(중략)... 탕왕과 무왕 이후는 모두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이다. 지금 너는 문왕의 도를 닦고서 천하의 이론을 도맡아 후세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나섰다. 넓고 큰 옷에 가는 띠를 띠고 헛된 말과 거짓 행동으로 천하의 임금들을 미혹시켜 부귀를 얻으려는 것이다. 도둑 치고도 너보다 더 큰 도둑은 없는데,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너를 도구(盜丘)라 부르지 않고, 반대로 나를 도척이라 부르는 것이냐!..(중략)... 너에게 사람의 성정에 대해 얘기해 주겠다. 눈은 좋은 빛깔을 보려 하고, 귀는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하며, 입은 좋은 맛을 보려 하고, 기분은 만족을 바란다. 사람의 수명은 기껏해야 백 살, 중간 정도로는 80살, 밑으로 가면 60살이다. 그것도 병들고 여위고 죽고 문상하고 걱정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빼고 나면 입을 벌리고 웃을 수 있는 것은 한 달 중에 불과 사오일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무궁하지만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일정한 때가 있다. 이 유한한 육체를 무궁한 천지 사이에 맡기고 있기란 준마가 좁은 문틈을 달려 지나가 버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자기의 기분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 수명을 보양하지 못하는 자는 모두가 도에 통달하지 못한 사람인 것이다. 네가 하는 말들은 모두 내가 버리는 것들이다. 당장 뛰어 돌아가거라.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너의 도라는 것은 본성을 잃은 채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사기와 허위일 뿐이다. 그런 것으로는 사람의 참된 모습을 보전할 수 없느니라. 어찌 논의할 대상이나 되겠느냐?』(인용 글 출처: 옛글 닷컴/장자(잡편)/제29편 도척)“ 

이 말에 공자는 아연실색한다. 그것도 역사적 인물의 사례와 인간 본성에 근거를 둔, 조목조목 일리가 있는 비판과 질책이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벌벌 떨며 도망치듯 황망하게 도척을 떠난다. 아마도 공자는, 논리의 압도나 양심의 가책보다는 죽음의 살기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도척에게서 도망치듯 돌아온 공자는 유하계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픈데도 없는데 뜸을 뜬 셈이 되고 말았네. 허둥대며 달려가다가 호랑이 머리를 매만지고 호랑이 수염을 잡아당긴 셈이니 자칫하면 호랑이에게 먹힐 뻔했네.”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공자가 그를 직접 대면하고 혼비백산한 것은, 인간적으로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이 경우는 똥이 더러워서 의식적으로 피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무서워서 피한 것이다.


또 도척은 ‘도둑놈도 도(道)가 있느냐’는 부하의 질문에, 소위 도둑의 오상(盜賊五常), 즉 도둑놈의 도로 ‘성·용·의·지·인(聖勇義知仁)’을 들었다. ‘어떤 집의 소장품을 추측하는 것이 성(聖), 도둑질할 때 공범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勇), 맨 나중에 나오는 것이 의(義), 훔칠 물건인지 아닌지 아는 것이 지(知), 그리고 훔친 물건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인(仁)이다 ‘라고 설파하며 떼강도 부하들을 독려한다. 핵심은, 일면 일리있는 이 말을 다름 아닌 살인강도의 수괴, 악인의 대명사 도척이 했다는 데에 있다. 이를 두고, 후한 광무제는 도척이 공자의 말씀을 뇌까린다고 한탄했다. 


일설에 의하면, 도척은 인간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며 사람의 간을 씹어 먹고 한평생 흉악한 패악질을 일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천벌도 받지 않았다.  사람의 도덕과 윤리, 법과 정의를 무시하고, 초월한 위치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도척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도척에게 잘 보이고, 그의 그늘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생명, 선(善), 인(仁), 의(義), 도(道)와 같은 것들은 고리타분한 것, 의미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이 숭배하고 따르는 것은, 오욕칠정을 충족시켜주는 돈과 힘,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무법, 정의과 도덕을 무시하는 절대 강자의 권력이었다. 현재 누리는 동물적 욕구충족과 자기만족이 중요할 뿐이다. 훗날 그들이 후세의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지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설령 있었다 할지라도 아마 모른 척했거나,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척이 아무리 언설이 좋고 논리와 명분이 뚜렷할지라도, 본능의 충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금수보다 못한 사악하고 흉악한 강도요, 탐욕스러운 도적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그러한 그를 다르고 추종하는 무리들은 사람의 무리가 아니라, 짐승보다 못한 한갓 흉악한 도적의 무리, 탐욕의 무리일 뿐이다. 


도척처럼 자기 논리를 갖추고 인간의 탈을 쓴 부류, 동일한 의미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말이 전혀 안 통하는 부류, 혹은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부류가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말은 통하는 것 같지만,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부류, 뒤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부류가 분명히 존재한다. 사람의 탈을 쓰고 차마 하지 못할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부류들이다. 오히려 돈과 권력의 힘을 믿고 큰 소리를 치는 부류들이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론 말이 안 통하는 이러한 부류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기와 생각과 이해(利害)가 충돌한 다른 사람들을 기억한다. 힘과 권력이 주어질 때, 반드시 뒤통수를 치고 보복을 한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양의 머리를 내걸고, 공자의 말을 한다. 도척의 뇌와 심장을 가진 인간들이 군자 인척, 애국자인척, 도처에서 얼굴과 입술에 거룩한 침을 발라가며 무치한 후안들을 들이 내민다. 이러한 형국이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인 트렌드처럼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이 겉 다르고 속 다른 것, 생각 다르고, 말 다르고, 말 다르고 행동 다른 것 등등 유독 정치하는 사람들, 내 눈에 잘못된 짓을 예사로 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  어찌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남의 일만에 국한할 수 있을까? 가만히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가 보자. 글 서두에 인용한 안자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전달의 와중에서 본질이 왜곡되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출전이 되는 고사가 가리키는 바는,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야기는 소스타인 베블런이 말하는 '모방 본능', 즉 사회 경제적 기득권 계층의 행동을 모방하려는 피지배 계층의 모방 본능과 닮아 있다. 동시에 피지배 계층인 일반 대중이 지배계층의 속성을 닮아간다고 통찰한 헨리 조지의 관점과도 맥락이 통한다. 또 기울어진 법정의와 불공정한 원칙에 관한 문제도 개입되어 있는 복합적인 내용이다. 제 영공의 문제는 이상한 풍습의 원인, 불공정한 법정의의 문제가 영공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바담풍' 해도, 너는 '바람풍' 해라는 식이다. 이 점을 안자는 제영공에게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안자의 해법은 오해의 근원과 소지를 아예 제거하거나, 차별 없이 공평하게 공정하게 시행하는 데에 있다.


'진보와 빈곤'의 저자 헨리 조지는, '지배 권력이 부패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속성에 따라 대중이 닮아가며, 점차적으로 부패한다'라고 간파했다. 부패한 권력아래에서는 반드시 부패한 국민들이 있다는 말은 현실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어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  

권력이란 사전적으로 '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힘, 또는 남을 알아듣도록 타일러서 어떤 일에 힘쓰게 함'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모든 권력은 지배 속성을 가지고 있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지배하는 것, 그것이 곧 권력이 가진 힘의 속성이다. 굳이 권력을 정치적인 의미에만 국한시키지 않더라도 힘이 행사되는 인간사의 거의 모든 부분에, 권력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만, 보통 사람의 경우, 애써 의식하지 않거나 스스로 무시하거나 혹은 부정할 따름이다. 이른바 우월한 위치에 서 있는 자들, 완장찬 자들의 갑질은, 주변에서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고 또 당할 수 있는 일임에도 그렇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아무리 사소한 권력일지라도 권력행사의 주체 혹은 이른바 갑질의 주체가 당신일 수도 혹은 나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되겠다.


사회구성주의는, 경험이나 지식 또는 사회 현상은 개인 혹은 집단이 구성하는 보편적인 경험과 인식의 소산물이라는 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개인의 감정이나 정서 혹은 지식도 마찬가지다.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날리가 없다'는 속담은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이해해도 무리는 없다. 다시 말해,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 시대적 배경이나 환경 또는 상황이 '양두구육'이라는 고사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는 말이 되겠다. 


1971년 미국의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 박사는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 라는 연구 주제로 실시한, '스탠포드대학 감옥실험(SPE: Standford Prison Experiment)'을 분석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상황은 시스템에 의해 창조된다. 시스템은 상황이 발현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지지, 권위, 자원을 제공한다. '썩은 상자 제조자'에 해당되는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썩은 상자' 속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심지어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사악하게 돌변할 수 있다. 어떤 인간이 저지른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끔찍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들 모두가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적절한 아니 부적절한 상황적 조건만 형성된다면 말이다." 이를 '루시퍼 이펙트(Lucifer Effect)'라고 한다. 


환경과 상황의 영향을 받지 않고 구성되는 삶의 이야기는 없다. 시류와 풍습, 즉 요샛말로 트렌드 또는 패러다임은 공간적이든, 시간적이든, 인위적이든, 자연발생적이든 반드시 시작되는 환경과 지점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라도, 실제로는 의당 '그럴 수도 있다'는 데에 있다. 가랑비를 맞아도, 옷이 젖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잘못되고 나쁜 것을, 욕하면서 닮아 간다는 말도 있다. 굳이 '밥그릇' 때문에, '먹고사는 일' 때문에 라고 애써 합리화시키지 않아도 그렇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힘과 에너지가 행사되는 곳에서는, 그 특성에 따라 그 아래에 거하는 사람들도 점차 닮아간다고 한 말은 분명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2)

고사에서 가리키는 안자의 해법을 따르자면, 오해의 근원과 소지를 아예 제거하거나, 겉과 속의 다름이나 차별됨없이 공정하고 공평하게 적용하는 데에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올바른 의지, 분별력, 그리고 양심이 그 바탕에 자리할 때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양두구육형 인간, 도척과 같은 부류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맹자는 이에 맥락이 닿는 한 기준을 제시한다. 

"닭이 울면 일어나 부지런히 선을 행하는 사람은 순임금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고, 닭이 울면 일어나 부지런히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은 도척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순임금과 도척의 차이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이익(利)을 추구하는가, 선(善)을 추구하는 가의 차이다"(맹자/진심(盡心)/상上25)

혜강 최한기 선생은 사람을 분별하면서, 그 사람의 과거 및 현재의 행사, 즉 일상의 행동거지나 이루어 놓은 일을 살피지 않고 사람을 판단하고 추측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보지 못하는 방구석에 앉아서 세상사를 안배하는 것과 같다'라고 통찰한다.

 "면상(얼굴)과 배상(당장 눈에 보지 않는 실제의 모습), 심상(마음)은 모두 행사(行事, 일상의 행동거지, 이루어진 일)의 상(像)에서 참고하여 검증할 수 있다. 면상에는 근거를 댈 수 있는 단서가 있고, 배상에는 바로잡아 밝히는 단서가 있고, 심상에는 지향하는 실제가 있으니, 모두 쓸 만한 상이 된다. 행사에서 참고하여 검증하지 않는 것은, 비유하자면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 방구석에서 세상사를 안배하는 것과 같다." - 최한기(崔漢綺, 1803~1877), 「행사상(行事相)」『인정(人政)』 권 4, 「측인문(測人門)」 

'하찮은 나비의 작은 날갯짓일지라도 태풍을 일으킨다'라는 말이 있다. 비록 그 맛이 쑥처럼 쓸지라도 바른 것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삿된 것들이 속에 자리 잡게 되면 그게 나라든, 사회든, 집단이든, 집안이든, 개인이든, 개인과 개인의 관계든 문제가 깃들기 마련이다. 삿된 것들은 옳고 바른 것들, 순수하고 선한 것들, 진실된 것들, 등등 정리(正理)의 대척점에 있는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 정리(正理)란 올바른 도리 또는 상식이라는 뜻이다. 정리(正理)적 삶의 기준은 양심이 그 척도가 된다. 수 천년 전 공맹의 옛시대나 지금이나 옳고 바른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정리(正理)의 삶에는 언제나 어려움이 깃드는 경우가 많다. 


양심이 실종된 사회, 사회적 약자들에게만이 양심과 정의와 도덕과 윤리가 법으로 강제되고 적용되는 사회,  일반 대중에게만 사회적  의무와 무한책임이 부여되는 사회, 돈과 권력의 우산 아래 거한 사회적 강자에게는 예외사유가 용납되는 사회, 심지어 명명백백한 사회적 불법, 범죄행위를 저지르고 그 죄질이 아무리 사악하고 막중할지라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설령 책임을 진다 할지라도 법적 양심적 면죄부를 황금과 권력이 보장하는 사회, 또는 그 효력의 증거가 되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어쩌면 피지배 그룹에 해당하는 보통 사람이 시류에 물들지 않고, 분별력 있는 바른 정리(正理)와 상식으로 산다는 게, 어지간한 각오와 의지가 아니라면 단지 희망사항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한 두 번 속는 것은 비록 내 잘못이 아니라 할지라도,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속는 것은 분명 내가 어리석은 탓이다. 하물며 아예 물들임 당하거나, 길들여지거나, 세뇌당하거나, 스스로 모방하며 사는 것은 오죽하겠는가. 비록 그럴지라도 희망은 필요하다.  '상상이란 오직 우리가 미래에 희망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것에 의해서 제한된다'. 유연휘발유를 발명한 찰스 케터링(Charles F. Kettering,1876~1958)의 말이다. 희망은 의지를 필요로 한다. 


양두구육의 원전이 되는 고사는 단일 의미만 아니라, 생각할 만한 여러 교훈들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그것은 당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 또한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세상을 가리키고, 또 남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나머지 부분은, 이렇듯 언제나 나를 다시 향한다. 뉴스를 뒤적이다가 양두구육의 고사를 떠올린다. 부끄러움이 뭔지 도통 모를 것 같은, 도척과 같은 후안무치한 무리들이 온갖 언론 지면을 잠식하고 있음을 본다. 그들이 또 어떤 분탕질, 어떤 사기질을 칠는지, 도척의 개 형상을 하고 어떻게 곡학아세를 할는지, 이런저런 갑갑한 생각에 몇 자 끄적인다.(201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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