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보는 사물들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들과 똑같은 거야. 내 마음속에 있지 않는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사물과 현상들만을 현실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속에 담고 있는 자신만의 세계가 발현되지 못하게 무의식적으로 억누르지. 그러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 거야. 그러나 일단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자신도 무작정 뒤따라 가겠다는 선택지는 사라져 버리지.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쉽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은 어려워." -헤르만 헤세('데미안')
"어떤 스님이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보았다. 스님은 그의 스승이신 큰스님에게 질문을 했다. “큰스님! 저 깃발을 한번 보십시오. 저게 깃발이 흔들리는 것입니까? 바람이 흔들리는 것입니까?” 스님이 대답했다. “그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다. 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혜능('풍번문답')
제시한 두 인용문은 맥락상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보이는 사물에서 느껴지는 것은, 곧 보는 사람의 내부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는 의미다. 큰 스님의 대답은 "사물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고 통찰하고 있다. 화엄종의 시조인 원효의 '일체유심조' 사상도 그 의미에서 비슷한 맥락에 있다. 슬쩍 뒤집어 생각해 보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사물에 대한 이해와 인지가 달라진다는 정통 심리학의 이해와 일치한다. '우리 마음 상태 여하에 따라 보이는 세상과 사물이 시시각각으로 다르다'는 사실은 일상의 경험이다. 심지어 바로 눈앞에 있는 사물도 우리의 관심과 마음이 향하는 바에 따라, 인식하지 못할 때도 많다.
생각을 좀 더 확장시켜 보면,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의미를 발견해 내지 못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내면의 마음을 살피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외부의 표면적인 것을 살피는 데에 더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내면의 소리, 양심의 소리, 자아의 소리를 의식적으로 무시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이다." -헤세('데미안')
압락사스(Abrasax)는, 알렉산드리아의 영지주의 신학자인 바실리데스( Basilides, 117~138)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된 개념으로 양면성을 가진 신(神)이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인간의 구원은 참된 지식을 통해 가능하다'라고 믿는 사상을 말한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라고 믿는 정통 기독교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래서 영지주의 기독교는 초대 기독교의 출발 당시부터 이단으로 취급되어 기독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기독교 이단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 중심의 심리학과 철학을 포함한 모든 과학적 사고는 기독교 사상과 배치된다.
압락사스는 거룩하고 선한 신성과 악한 악마성을 동시에 지닌 신이다. 중세 시대에는 여러 악마들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인 칼 융은 압락사스(Abrasax)를 이렇게 설명한다. "압락사스는 모든 대립물이 하나의 신성한 존재 안에 결합된 신이다. 기독교의 신, 그리고 사탄의 개념보다 더 고차원적인 개념의 신이다"
압락사스(Abraxas)의 형상은, 수탉의 머리, 남자의 몸, 뱀이나 전갈로 만든 다리와 같은 복합체로 그려진다. 그는 두 손에 각각 힘과 지혜라고 불리는 채찍과 방패를 들고 있다. 신의 실체가 과연 저러하다면 인간은 오죽하겠는가? 칼 융은 인간의 밝은 면 뒤에 가려있는 어두운 면을 '그림자(Shadow)'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압락사스의 모습은, 인간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인간과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이율배반적인 사회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이라는 것을 감히 부인하기는 어렵다.
"모처럼의 통찰도 그들이 그전에 생활해 오던 실제적인 상황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취하는 행동이 내포하는 위협과 고통을 무릅쓰는 등의 생활의 변화 없이는 사실상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에리히 프롬('소유냐 삶이냐')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들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선하든 악하든, 이유불문하고 그것은 모두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하고 좋은 것은 드러내고, 악하고 나쁜 것은 가능하면 드러나지 않게 감춘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 수치로 여기고 감추는 그러한 것들을 다른 사람의 행위에서 발견하였을 때, 우리는 그의 그릇됨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혐오하고 정죄함으로써 내 속의 어두운 것들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또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자기 인식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실체를 아는 그만큼 우리의 삶과 일상의 언행에서 좀 더 진지해지고 좀 더 겸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선도 악도 모두 내 안에 다 들어 있다. 변화도 퇴보도 모두 내게 달려있다. 우리속의, 밝고, 어둡고, 좋고, 싫고, 나쁘고, 자랑스럽고, 수치스러운 모든 것들은, 우리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우리에게 어떤 변화의 동기를 부여해 준다는 점에서,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늘 그래 왔듯이 습관처럼, 어느 한 측면이라도 우리가 애써 의식적으로 회피하거나 혹은 무시해 버린다면, 그것은 우리를 인간답도록 이끌어주는 소중한 것들의, 의미 절반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실수를 범하는 것과 같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이 문장은 많은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분석 심리학에 대해서 어느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이 인간이해의 관점에서, 분석심리학의 거두인 칼 융과 비슷한 견해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헤세의 작품들은 어렵고 낯선 심리학 용어들이 아닌 일상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이론이나 사상 혹은 완전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차원에서, 분석심리학이 제시하는 인간의 내면 구조는 진짜의 자기를 알 수 있게 우리를 이끌어주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융 분석심리학에서 페르소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는 인간의 정신구조, 즉 자아를 설명하는 심리학 중요한 용어들이다. 이것들은 자아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우리 인격의 한 부분을 각각 차지한다. 각각 개별적인 특성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며 통합되어 있다.
페르소나(persona)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착용하던 가면(假面)을 뜻한다.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외적 인격'이 페르소나다. 페르소나는 자아가 외부의 현실세계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형성할 때, 연약한 자아를 대리하여 사회와 관계를 맺는 매개체의 역할 또는 사회적 적응 수단의 기능을 한다. 다시 말해 페르소나는 사회와 환경의 산물이다.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보편적인 사회적 원칙이 자아와 타협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페르소나는 사회나 집단이 요구하는 역할, 의무, 사회적 약속인 규범, 기타 다양한 행동양식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집단이 요구하는 역할이라는 점에서, 개개의 집단마다 다 다른 역할로 기능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집에서의 모습, 직장에서의 모습, 친구, 부모 기타 등등 제각각 다르다는 말이 되겠다.
이러한 점에서 페르소나는, 개인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고유의 특성을 뜻하는, 개성 하고는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의 경우, 군대의 모든 신참 이등병, 그리고 대한민국 예비군 모두는 거의 예외 없이 동일한 행동특성을 보인다. 일반 사회와 관련된 개인의 모든 것은 아무런 구속력이나 영향력을 갖지 않는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다소 우스개 소리 같지만,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을 연상하면 더욱 뚜렷해진다.
이처럼 페르소나는 나의 참모습이 아니다.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일 따름이다. 사회나 집단이 요구하는 나의 외적 모습, 즉 외적 인격이다. 그러나 사회와 나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의 기능과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외적 인격이기도 하다. 융은 이렇게 말한다.
"페르소나는 ‘참다운 것’이 아니다. 페르소나는 인간이 ‘무엇으로 보이느냐’하는 것에 관한 개체와 사회와의 타협의 한 소산이다. 그것은 어떤 이름을 받아들인다. 칭호를 획득하거나 지위를 나타내거나 이것저것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성이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페르소나는 해당자의 개성과의 관련에서는 부차적인 현실, 즉, 단순한 타협물과 같은 것이며, 이 타협에서는 흔히 당사자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페르소나는 가상이며, 농담 삼아 말하자면, 2차원적인 현실이다."
-C.G.Jung, '인격과 전이' (한국 융연 구원 C.G. 융 저작 번역 위원회 역, 솔 2007)
페르소나는 사회의 기대 혹은 타인들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페르소나는 고정되고 불변하는 외적 인격이 아니다. 외부세계의 상황이나 집단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는 외적 인격이다. 사회 혹은 집단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행동규범이자 사회적 역할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을 여행하거나 혹은 외국에서 정착하여 살 때 흔히 혼란에 직면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혹은 정반대일 수도 있는 문화, 관습, 규칙, 규범, 가치관들을 그 사회가 요구하는 까닭이다. 가령 태국 같은 나라에서 귀엽다거나 혹은 사랑스러운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라든가, 이슬람권 국가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왼손으로 타인의 신체를 터치하거나 음식을 다루는 행위, 이란 등의 중동 이슬람권 국가에서 최고라는 의미로 손가락으로 엄지 척을 하는 행위, 브라질에서 손가락으로 OK사인을 하는 행위 등등, 이러한 행동은, 단지 문화적 차이때문에, 상대를 모독하고 분노를 유발하는 대표적인 금기가 된다.
문제는 페르소나를 진정한 자기로 착각하거나 무작정 벗어버려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다. 착각의 경우, 오랜 세월 자기에 대한 성찰없이 사회생활에서 기계적인 삶을 반복할 때 발생한다. 페르소나를 자기 자신의 참모습인 내적 인격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페르소나를 자신의 진짜 인격으로 착각하고, 마치 자신의 명함처럼 내미는 것이다. 가령 학교 교장선생님이 공중목욕탕에서 교장 행세를 하고 있다고 상상하면 되겠다. 가령 술에 취해 술집에서 난동 부린 막장 검사가 있다고 하자. 그를 체포하려고 온 경찰에게 "내가 검사인데, 네가 감히"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해의 경우는, 섣부른 자아실현의 명목으로 외적인격인 페르소나를 스스로 벗어던지는 경우다. 이 경우, 자칫 무의식의 충동이나 본능에 휘둘리게 되기 쉽다. 사회적 혹은 인간적으로 관계 단절의 위험을 스스로 초래하기도 한다. 두 경우 모두 인격해리, 즉 외적 인격과 내적 인격이 뒤섞이는 혼란을 겪게 된다. 인격해리는, 한 사람 속에 두 개 이상의 인격이 존재하는 다중인격 증상을 말한다. 이들이 생활속에서 주변 사람들과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일상의 일이다.
정리하면, 페르소나는 사회에 자기를 적응시키는 데에 필요 불가결한 외적 적응 수단이다. 동시에 '참다운 나'는 아닐지라도, 나의 자아를 이루는 전체 정신의 일부이기도 하다. 진정한 자기, 참 자기와 구별해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부정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해서 동일시해서도 안된다. 진정한 자기와 페르소나를 구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지금-여기라는 시간적 공간적 위치에서 사회적 역할에 적절한 외적 인격, 즉 페르소나의 올바른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페르소나의 뒤엔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란 '인간의 심성에 밖으로 드러나는 밝은 성질들과 대비되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성질들'이다. 융의 설명에 의하면, '인격의 열등한 부분, 그래서 감추어진 측면, 모든 강함에 속하는 약함, 모든 낮에 따르는 밤, 선한 것 속의 악함' 등 이다. 다시 말하면 무의식적으로 감추려고 하기 때문에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은 우리의 약한 면이요, 악한 면이요, 규범을 벗어나 있는 부도덕하고 부정한 면이며, 더러운 면이며, 비열한 면이며, 부끄러운 면이다.
그림자는 페르소나 뒤에 숨어 있다. 모든 사람이 그림자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본래적인 결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외적으로 완벽하고 명석하며 강한 사람일지라도 내면의 허약함과 유아적인 어리석음과 유치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융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만일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공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실성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완벽한 거짓말쟁이임을 스스로 공언하는 셈이다. 어두운 나의 그림자와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바로 참 내 모습을 찾아가는 첫 발걸음이라 하겠다.
"그림자에 대한 통찰이란 바로 자신 안에 있는 열등한 인격에 대한 자기 인식이며, 자기 자신과의 만남은 우선 자신의 그림자와의 만남을 뜻한다. 그림자는 물론 좁은 길이며 좁은 문인데, 깊은 우물로 내려가는 자는 그것의 고통스러운 협소함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융, '인격과 전이')”
그림자는, 투사(psychological projection)를 통해 의식화된다. 투사란, 스스로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자기내면의 충동이나 생각을 외부 세계, 또는 다른 대상에게로 옮겨놓는 심리적 방어 과정이다. 즉, '자신의 흥미와 욕망들이, 마치 다른 대상이나 사물에게 속한 것처럼 지각되어 자신의 심리적 경험이, 실제현실인 것처럼, 외부의 대상에게서 지각되는 현상'을 말한다. 투사를 하게되면, 갈등의 책임이 외부의 존재나 상황으로 옮겨짐으로써, 자신은 그 책임에서 벗어난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자신을 기만하고 호도하는 심리적 정당성을 스스로 부여한다.
'자신의 눈에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은 본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돼지를 보고 나무란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 등등의 격언이나, '가장 부도덕한 인간일수록, 외면적 도덕과 원칙에 매우 엄격하다. 거짓말쟁이가 정직을 가훈으로 삼는다.' 등등, 역설적인 현실의 사례들은 투사를 설명하는 좋은 예다.
자기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도록 스스로 억압하게 되면, 우리의 무의식은 자동으로 그 책임을 물릴 수 있는 대상을 바깥에서 찾는다. 다시 말해 희생양을 찾는다. 내면 속에 그림자로 존재하는 갈등의 뿌리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믿고싶기때문이다. 투사는, 자기 그림자의 성질들과 관련되는 것이 외부에서 발견될 경우, 즉시로 일어난다. 투사의 과정을 통해 타인에게 그것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비난함으로써 그 책임을 외부로 전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를 만들어 내는 주원인이 되기도 한다. 인간 사회의 거의 모든 상황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충돌의 밑바닥에는 투사가 큰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투사가 대중심리에 편승하여 집단적 투사로 시너지가 일어나게 되면, 엄청난 사회적 혹은, 개인적 비극이 초래되기도 한다. 갈등과 자기 기만의 뿌리로 작용할 수도 있는, 자신의 그림자를 직접 대면하여 만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칼 융에 따르면, '자신의 그림자와 대면하는 일은 고정관념의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게하는 의식 확장의 한 방법'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통찰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인식함에서 오는 겸손함이다. 또한 그림자의 위험성을 인지함으로써 무한한 인간 본질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그것은 자신과 사람에 대한 조심성이다. 또한 자기 내면의 모습들을 정직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유약함이나 무력함을 인정하게 된다. 즉 그것은 실존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고정관념의 좁은 시각으로부터 벗어나 의식을 확장하는 방법으로서 정신의 전체성으로 가는 중요한 과정이다."(융, 인격과 전이)
그림자를 따라가 보면 그 뒤에 원형으로서의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가 있다. 아니마는 남성적 자아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인 특성이다. 반면에 여성적 자아의 무의식 안에 있는 남성적인 특성을 아니무스라고 한다. 즉 남성에게서 여성성이 발견된다면 아니마, 여성에게서 남성성이 발견된다면 아니무스다. 이는 중년 이후에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무의식 속에서 때론 부정적으로 때로는 긍정적으로 우리의 자아를 간섭한다.
무의식의 한 원형으로 자아 속에 존재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직접적으로는 들여다볼 수 없다. 다만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오직 투사를 통해서 의식화될 수는 있다. 아니무스는 집단의식에 의해서 규정되는 남성 혹은 남성성을 상징하는 동물이나 사물에 투사되며, 아니마는 여성 혹은 여성성을 상징하는 동물이나 사물에 투사된다.
페르소나가 외적인 집단의식이 공유하는 외부 세계와 관계를 연결시켜주고, 또 지탱케 하는 연결 고리라면, 그림자는 내면의식으로 들어가는 아주 좁고 어두운 통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내면의 자아 속에서 집단 무의식의 세계와 연결시켜주는 무의식의 연결고리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서로 정반대의 특성을 보인다. 그러나 자아를 구성하는 원형의 한 부분으로 개인의 무의식 및 집단 무의식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는 과정'이 바로, 칼융 분석심리학의 핵심 용어인, '개성화(Individuation) '이다. 개성화는 다른말로 '자기실현' 이라고 부르기도한다. 개성화의 목표는, 인격 전체가 균형 잡힌 인격의 무게 중심인 '자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는 완벽함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식의 부단한 확장을 통해 온전함을 지향하는 역동성을 가진다. 온전함이란, '각각의 요소가 원래 그대로의 상태와 기능으로 잘못된 것이 없이 바르게 고루 존재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헤르만헤세의 소설이 강조하는 '진정한 자기'란, 의식과 무의식을 합친 '나의 전부'이다. 헤세에 따르면, '자기실현'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헤세는 이러한 과정을 가리켜 '인간화(Menschwerdung)'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자기실현의 관점에서 '무의식의 의식화'로 요약되는 융의 '개성화'와 의식과 무의식을 합치는 헤세의 '인간화'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즉, 자기실현의 과정은 의식의 영역뿐만 아니라, 부정하고 싶은 무의식의 영역 전부를 자기로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헤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인간 형성의 길은 전진성으로부터 시작된다. 거기로부터 그 길은 죄로, 선과 악에 대한 인식으로, 문화와 윤리와 종교, 그리고 인류의 이상에 대한 요구로 인도한다. 이 단계를 진지하게, 개성적인 개체로서 철저히 살아 간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절망에 이르게 된다. 그 이유는 덕성의 실현, 완전한 복종, 만족스러운 봉사란 존재하지 않으며, 정의란 달성될 수 없는 것, 선이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망은 이제 멸망에 이르게 하거나, 또는 정신의 세 번째 영역인 도덕과 법의 피안 상태를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자비와 구원을 요구하는 것은 보다 높은 종류의 무책임으로 가는 길이다. 간단히 말해서 신앙으로 가는 길이다" -헤세('한 편의 신학(Ein Stueckchen Theologie,1932')
결국 헤세의 자아실현에 대한 통찰은 궁극적으로 신앙으로 귀의하는 것이다. 그런데 융이나 헤세는 둘 다 기독교와는 무관한 사람들이란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헤세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 형성의 제1단계, 즉 참 자기를 아는 단계에서 생을 마감한다. 1단계를 거쳐서 제2의 단계에 이른 소수의 사람들은 비로소 선악의 본질과 실체를 깨닫게 되고 죄를 인식하며 절망에 빠지고, 결국 신앙에 의지함으로써 번뇌와 책임을 덜어내며 생을 마친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3단계에 도달한다. 제3의 단계는 자기실현의 완성단계로, 신념, 축복, 또는 열반의 경지다. 헤세는 괴테, 모차르트, 부처, 노자만이 자기실현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헤세가 말하는 자기실현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힘든 여정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참된 자기를 찾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되는 참으로 중요한 여정이다. 참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세상과 사물,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전환과 아울러 그것들을 왜곡됨이 없이 바르게 분별하는 인식의 확장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헤세는 소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를 통하여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쉽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은 어렵다. 사람은 각기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만 한다. " -헤세('데미안')
못나도 '나'고, 잘나도 '나'다. 아무리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이라할지라도 누구나 삶의 진정한 자유를 꿈꾼다. 누구나 진실로 사람답게 살기를 소망한다. 여기에 별 다른 이유는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때문이다. 그러나 소망하고 희망할지라도, 진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희망사항에 그칠 뿐이다. 자신을 책임진다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알려해도 알 수없거나, 스스로도 모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가짜를 사랑할 수는 더욱 없는 법이다. 허물이 있든 없든 있는 그대로의 '진정한 나'를 알아야만, 비로소 자신을 온전하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논리로 자신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진실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경험에 따르면, 존재 그자체로 사랑받아 본 사람만이 진실한 사랑을 공유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느끼고, 아는 만큼 이해하고, 또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 또한, 비싼 댓가를 치르고 얻을 수 있는 삶의 소중한 경험이다.
"남을 아는 것이 깊은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아는 것도 깊고, 남을 아는 것이 얕은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아는 것도 얕으며, 폭넓게 고르게 앎과 치우침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최한기, '기측체의/추측록').
이제 마무리를 짓자. 당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각자가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은 '진짜 자기'에 관한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마치 나침반 같고, 도로의 방향 표지판과 같다. 한편 헤세의 성장소설은 '진짜 자기'를 찾는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가며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마치 여행 안내서와 같다. 목적지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는 나침반과 여행안내서를 손에 쥐고 있는 각자의 몫이다. 악착같이 알을 깨고 나온 새만이 장차 하늘을 날 수 있다.
"아도란 무엇이냐 질그릇이다... 입이 있어도 벙어리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못생긴 우리네의 질그릇이다."(송수권의 詩, '아도' 부분)
내가 거울로 보는 일상의 '나' 그리고 타인들에게 보이는 내가 다를 수도 있다고 한다. 목소리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만약 마음의 거울로 나를 비춰볼 수 있다면, 어쩌면 내가 못나고 흠집도 많고 투박한 질그릇 같은 존재일 것 같다는 상상을 해 본다. 글을 정리하면서, 페르소나가 없는 사람이 없고, 그림자 또한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게, 질그릇 같은 나로선 묘한 위안이 된다.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뭐라든 간에 현실의 거울로 보는 나는 여전히 세월과는 상관없는 나로만 보인다. 거울엔 언제나 익숙한 내가 보인다. 어쩌면 당신이 보는 내가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 진짜 내가, 어떤 모습인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은 온전하게 나의 몫이다. (2016.2.11 쓰고 2021.3.8 다시 정리하고 고쳐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