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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29. 2017

안다고 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

"역사가 되풀이되고 예상치 못한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 (조지 버나드 쇼) 

얼마 전부터 우리 네 고전산문을 작정하고 읽기로 했다. 다행히 한국 고전번역원에 우리 선조들의 문집들이 공개적으로 열려 있다. 길게는 수천 년, 짧게는 백여 년 전의 옛 고전들을, 특히 산문을 찾아서 읽는다. 읽은 글은 정리하여 개인 블로그에 담는 작업을 함께 했다. 십여 년 전인가. 모 광고 카피에서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을 뜻깊게 본 적이 있었다. 이 말은 영화 '메멘토'(Memento, 2000)에서 인상 깊었던 대사,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라는 말과 늘 함께 연상된다. 아무튼 블로그는 뭐든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기록하기에 좋은 저장 창고다. 공부가 따로 없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책을 엮어 묶은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뜻이다. 공자가 낙향하여 주역(周易)을 집중하여 읽을 때, 책을 묶은 끈이 세 번이나 낡고 닿아서 끊어질 정도로, 몇십 번이고 반복하여 숙독하였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위편삼절은 단순한 암기형 지식이 아니라, 독서를 통한 지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온전한 이해로 가는 가를 보여 주는 좋은 일례다. 성인 공자가 그렇할진대, 아둔한 사람인 나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비록 어리석은 자일 지라도 천 번을 되새기다 보면 천 번에 한 번쯤은 깨닫는 것이 있다는 옛 말이 새롭다.


여하튼 옛 고전 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적인 패턴을 발견한다. 그 특징 중의 하나는 옛 현인들이 관점의 글을 쓰거나, 감상을 드러내거나, 의론(意論)을 전개하면서, 자기 생각이나 혹은 경험, 감정, 정서일지라도, 공히 그 근거를 반드시 밝힌다는 데에 있다. 그 근거는 주로 자기가 경험한 사실과 지난 역사의 선례에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추상적인 관념이나 이론 또는 허구에 근거를 두고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다는 말이다. 역사적 사실이란, 사건, 상황뿐만 아니라 인물, 지리, 문화, 정치, 문헌, 일상 등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 이와는 별개로 관념이나 추상적인 이론을 주장할 때는 반드시 논(論)으로 구분하여, 자신의 견해, 주장 등임을 밝히는 글임을 분명히 했다. 물론 여기에도 마찬가지다.


옛 선조들의 산문 글의 중심에는 사물과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과 관찰, 이해, 그리고 이를 통한 성찰과 자기반성이 거의 빠지지 않는다. 성찰과 반성은 자기에 대한 이해가 없고, 동시에 역사에 대한 공감적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공감적 이해는 주로 심리치료 분야에서,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공감'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치료적 개념이다. 공감적 이해를 요약하면, “자기 정체성과 주관을 유지하면서, 마치 자기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대상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 그 대상의 감정을 헤아리고 이해하려는 능력”이다. 이는 주관적인 판단, 평가, 해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옛 현인들의 글에서 이러한 공감적 이해가 특징적으로 돋보인다. 


옛글에 '문장을 모르는 자와 문장을 말할 수 없다(계곡 장유)'라는 말이 있다. 또 '용렬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는 도덕과 인문을 논할 수 없다(영재 이건창)'는 말도 있다. 용렬(庸劣) 이란, 마음이 변변치 못하고 졸렬하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뜻과 주관이 바른 것으로 확실하게 잡혀 있지 못하고, 인성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비록 공감은 할 수 있을지언정, 공감적 이해는 어렵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다. 공감적 이해는 인간 이해에 있어서 필수적인 개념이다. 당연히 공자와 맹자의 저술에서도 탁월하게 돋보인다. 마찬가지로 일부 관념론 철학자를 제외한 근현대의 뛰어난 서양 철학자와 사상가들도 대부분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추적함으로써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사상의 논리적 전거로 삼으며, 이론과 사상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는 인간이 살아온 경험의 기록이다. 이런 점에선 인간의 적나라한 삶의 모습이 가감 없이 기록되고, 수천 년에 걸쳐 문장의 오차가 별로 없이 구전(口傳)된 문서로 엮어진 구약성서는 특별난 것이다. 공자가 기록한 춘추도 마찬가지다. 그 외에도 오랜 시대를 걸쳐 인류에 평가되고 회자된 역사의 기록들도 그렇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 간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과거의 창을 통해 현재를 보는 것'이라고 하였던 E. H. 카의 말은 대단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늘 하는 말이지만, 공적 역사든 개인의 역사이든 과거로부터 성찰과 반성이 결여된 모든 론(論)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모두 포함한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다. 역사 속에 인간의 모든 성공과 실패, 선과 악이 다 들어 있다.  따라서  인간 이해는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다. 현재는 과거의 오늘이다. 과거가 현재를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면, 결국 우리 자신도 그리고 우리가 속해있는 현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착각이요 오해에 불과할 것이다. 하물며 현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미래를 조망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하겠다. 


문화와 관습, 삶의 양식과 사회체제가 전혀 다른 수백, 수 천년 전의 옛 글이 지금-여기라는 오늘, 현재를 관통할 수 있는 힘은, 그 중심에 인간이 있는 까닭이다. 그 힘은 역사 속의 인간을 해석하는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을 통해서, 영향력을 가지고 끊임없이 되살아 난다. 인간 이해와 함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여 아는 것, 다시 말해 인간 이해와 역사 이해는 철학과 함께 가히 학문의 기본임을 재삼 인정하게 된다. 

"많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것을 읽은 사람들은 당연히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 독서는 마음에 단지 지식의 재료들만 공급할  뿐이다. 우리가 읽은 지식들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사색이 만들어 주는 것이다. - 존 로크('Reading', 「Of The Conduct Of The Understanding, 1706」)

옛 선조들의 글을 통하여 늘 확인한다. 안다는 것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이해한다는 것은 별개의 차원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단편적인 지식만으로 무언가를 안다고, 이해했다고 확신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머리와 가슴을 거쳐서 두루 이해된 지식이야말로 바른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온전한 이해는 관심과 관찰 그리고 의문(疑問)을 가지고 확인하고 검증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어떻해야 온전히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나름 생각하기로는, 누구든지 자신처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언어로 남에게 능히 설명할 수 있다면, 비로소 온전한 이해에 이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아는 것을 남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뿐이다. 


공자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비슷한 맥락에서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통찰하였다. 스스로 모른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더 배우고 생각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줄의 시를 쓰려면 수많은 도시들,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 한다. 동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시인은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나같이 다른, 사랑을 주고받는 수많은 밤들, 진통하는 임산부의 외침, 가벼운 흰옷을 입고 잠을 자는 동안 자궁이 닫혀 가는 임산부들에 대한 추억도 있어야 한다. 또 임종하는 사람의 곁에도 있어 봐야 하고, 창문이 열리고 간헐적으로 외부의 소음이 들려오는 밤에 시체 옆에도 앉아 보아야 한다."(릴케, 말테의 수기)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여인은 어미의 심정을 모른다.. 자식을 키워보지 못한 어른 또한 부모의 심정을 모른다. 상처로 인해 고통을 겪어 보지 못하고 아파보지 못한 사람은 그 아픔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가난해서 굶어 보지 못한 사람은 배고픔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그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단 한 번도 사회적 약자가 되어 보지 못한 사람은 약자의 설움을 알 수 없다. 한 번도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에 신뢰와 존중과 배려라는 게 있고, 그 속에 인내와 헌신 그리고 고통 또한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외에도 수많은 예를 들 수 있다. 


관심을 기울이며 관찰하고, 의문을 갖고 다양한 사실적 근거를 확인하여, 마음과 귀를 열어 이해하고자 애쓰는 작업은, 독서뿐만이 아니라, 글쓰기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전 절차가 아닐 수 없다. 그중에서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공감적 이해의 노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충분한 사실의 보편적 근거가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실제로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물며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죽하겠는가.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 속담도 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일진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더 부끄러운 일이다.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양의 정보만 유용하다. 우리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주관적으로, 그리고 해당 정보가 유발할 수 있는 왜곡에 그다지 크게 경계하지 않고 정보를 지각한다. 신호는 진리다. 소음은 우리가 진리에 다가서지 못하게끔 우리의 정신을 산만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과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차이’다." (네이트 실버, 「신호와 소음」 이경식 옮김, 더퀘스트, 2014)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옛날 유행가의 가사 한 구절이다. 옛 선조들의 글을 읽을 때, 한결같이 느끼는 심정이다. 옛 현인들의 글은, 내가 아는 것,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이해하는 것의 차이를 깨우쳐 주는 몽학 선생이 아닐 수 없다. 몽학 선생은 '아이를 인도하는 자'라는 뜻의 헬라어 '파파이다고고스'(paidagogos)를 우리말로 번역한 단어다. 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귀족 집안에서 어린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빗나가지 않도록 도와주는 가정교사와 비슷한 것으로, 아이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노예를 말한다. 옛 글은 또한, 그릇된 것을 통하여 바른 것을 분변 하게 해 주는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때론 내 부끄러움을 일깨워주는 죽비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는 마음이 헛헛할 때 시(詩)를 읽고, 몸과 마음이 함께 허무해질 때 옛 글을 되씹는다." (2016.3.20)


“그대가 남들에게 불붙이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먼저 그대 안에서 불타고 있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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