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스트들처럼 임의적인 생각으로 사실의 근거를 알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과학과는 거리가 먼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은 심지어 사실 자체를 그르게 인식하게 한다. 과학적 지식이란 주어진 조건에서 명료한 진실을 알게 될 때까지 숙고하여 증거를 찾아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비과학적인 지식을 배제한 올바른 지식을 구축할 수 있다.”
위의 인용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 후서'에 나오는 말이다. 올바른 지식과 비과학적인 지식 그리고 수박 겉핥기식의 피상적인 지식이 구별되어야 함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 올바른 지식이 어떻게 구축되는가를 설명한다. 지식의 한자말은 '知識'(지식)이다. 사전적 의미는 "교육이나 경험, 또는 연구를 통해 얻은 체계화된 인식의 총체"라고 나와 있다. 따라서 사전적 정의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인 통찰과 그 의미에서 일치한다.
물론 현대 철학의 관점에서 지식의 정의는 머리가 둔한 나로서는, 어설프게 요약하기가 힘들 정도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주 분분하고 다양하기까지 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둔한 내 머리로는 그게 그 말인 것 같기만 하고, 개념에 있어서 말꼬리를 잡아 늘이고 비틀어 파고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지식을 낱말로 풀어서 보면, 지(知)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알다, 슬기, 앎', 식(識)은 '알다'라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굳이 동일한 의미의 낱말을 겹춰서 단어를 사용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지(知)라는 낱말의 속에 슬기(智, 지혜)라는 의미에 비중을 두고 식(識) 자와 결합시켜 앎의 의미를 더욱 부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슬기의 뜻이,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분별하고 일을 정확하게 처리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재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이란,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분별하고 일을 정확하게 처리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재능을 통해 아는 것"이라는 의미를 추론해 낼 수 있다. 아리스토 텔레스가 강조하는 올바른 지식의 의미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을 따로 불러 물었다. "지자(知者, 지혜로운 사람, 지식이 많고 사리에 밝은 사람 혹은 지식인)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자로는 대답하기를,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알게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자공(子貢)은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입니다". 끝으로 안회(顔回)는 대답하기를, "지자(知者)는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에 공자는 자로와 자공에게는 과연 '선비다운 대답'이라 칭찬한다. 반면에 안회에게는 '훌륭한 군자다운 대답'이라고 극찬한다. 이 일화는 공자 가어(家語)에 나온다. 공자 가어는 논어에 나오지 않는 문답과 일화를 기록한 일종의 외전 격이다.
노자도 안회와 비슷한 말을 한다(노자 33장 변덕). "사람을 아는 자는 지혜로운 자(知者) 요, 자신을 아는 자는 명철한 자(明者)다.". 그리고 말을 더 덧붙인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이지만, 나를 이기는 사람은 진정한 강자다." 이에 대한 옛 현인들의 주석은, '지(知)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두운 밤에 등불을 켜고 길을 밝혀가며 찾아가는 것이고, 명(明)은 환한 대낮에 눈앞에 보이는 전체를 조망하며 길을 찾아가는 것'이라 비유한다.
공자에게는 3000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학문적으로 특출한 성과를 이룬 이들을 일컬어 72현(賢)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안회(顔回)와 자공(子貢)과 자로(子路) 이 셋은 독보적인 인물들로, 공자와 아주 가까운 일상의 자리에서 공자를 수행하고 공자와 서로 질의응답을 통해 공자의 사상과 철학의 중심을 이루는 수제자들이다. 그중에서도 공자가 그 도량에 있어 자신과 거의 동격으로 보는 인물이 29세 약관의 나이에 요절한 안회다.
논어 위정 편에서 공자는 자로에게 이렇게 훈계한다. "자로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함이 진정한 앎이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남겼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어째튼 위의 말들을 바탕으로 해서 참되게 안다는 것의 의미를 중요한 것으로부터 훑어서 종합해보면, 그 우선순위가 먼저 자신을 아는 것이 최선이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아는 것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알게 하는 것이 차선이 된다. 그런데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지식이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역설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단편적인 것이 아닌 제대로 참되게 알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로 나름 이해된다. 자칫하면 간과할 수 있는 지식에 관한 중요한 요점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이에 관련해서 현대 분석철학자인 비트겐쉬타인은 '이것이 지식이다'라고 딱 잘라 대답하기 곤란한 화두를 던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지루해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상황에서 그가 지루해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면을 보고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온전한 지식이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좁은 소견에 특정한 상황을 확대 해석하여 일반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을 지적하는 말로 이해하면 되겠다. 일반화의 오류란, '인간이나 사물 혹은 현상의 단면을 보고, "저것(사람)은 당연히 저럴 것이다."라고 미리 짐작하여 판단하는 오류이다'(위키백과). 즉, 제한된 사실만을 가지고, 가설에 대한 구체적인 검증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무명자 윤기 선생은 「한거필담(閒居筆談)」에서 비슷한 맥락에서 이를 한탄한다.
"지금 사람들은 서사(書史)를 약간 섭렵하면 곧 함부로 잘난 체하여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 생각하고, 기이한 문장을 발견하면 세상에서 빼어난 학자로 여기고, 어려운 글자를 기억해내면 남보다 뛰어난 견해인 양 여기고, 우연히 세상에서 오독(誤讀)하던 글자의 독음이라도 깨달으면 그들의 무식함을 비웃지만 자신도 오독하는 것이 무수한 줄 알지 못하고, 우연히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궁벽한 시구절이라도 찾게 되면 남들의 고루함을 조롱하지만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되는 줄 알지 못한다. 혹자는 남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여 우물우물 얼버무려 자취를 가리고, 혹자는 식견이 어리숙한 자들에게 자랑하여 과장을 일삼아 명성을 훔치는데, 이러한 무리들이 세상에 가득하다.(중략) 세상에서 관규여측(管窺蠡測)의 소견으로 함부로 타인을 논평하는 경우가 모두 이에 해당하니, 그 폐해는 결국 반드시 연석(燕石, 옥과 비슷하지만 보통의 돌)을 보배로 여기며 '화씨의 박옥'(和氏璞玉)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산계(山鷄, 꿩)를 귀히 여겨 봉황이 상서롭지 않다고 비방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식자의 눈으로 본다면 어찌 너무나 애석하고 크게 탄식하지 않겠는가.
관규여측(管窺蠡測)이란, '대나무 대롱으로 하늘을 보고, 소라껍데기로 바닷물의 양을 헤아린다'는 뜻이다. 비슷한 사자성어로, 관중규표(管中窺豹)가 있다. 이는 '대롱 구멍으로 표범을 보면 표범의 얼룩점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야(視野)가 매우 좁은, 즉 소견이 좁음을 이르는 말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안다고 하거나, 숲을 보고 나무를 안다고 하는 경우. 시각장애자가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서 코끼리는 나무와 같다고 생각하는 경우 등등 모두 이에 해당한다. 자신을 모르는 것만큼, 좁은 소견과 식견에서 비롯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이 또한 올바른 지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 하겠다.
요 며칠 동안 퇴계선생의 언행록을 읽었다. 퇴계선생 언행록은 공자와 제자들의 관계처럼, 문답 형식과 제자들의 증언들로 엮어져 있다. 퇴계선생의 언행록에는 학봉 김성일의 증언이 유독 많이 나온다. 그것도 퇴계선생의 수제자로, 학문과 인품이 남다르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김성일은 당파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임진왜란을 사전 대비하지 못하게 방해를 놓은 소인배의 대표적 인물이다. 임진왜란 직전, 정사 황윤길, 서정관 허정과 함께 일본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후에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 이라고 선조에게 거짓 보고했다. 이는 선조실록의 기록이다. 이 때문에 선생은 일반 대중에게 임진왜란과 연결하여 붕당정치의 폐단을 대표하는 소인배로 인식된다. 오늘날까지 대중에게 손가락질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득 의문이 들어서 김성일 선생의 삶과 이력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전혀 뜻밖이다. 그의 행적과 삶이 의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기록은 김성일에 대해 다른 말을 한다. 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선생의 양대 수제자로 손꼽히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세상 권세나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아,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대궐의 호랑이'라고 부르던 인물, 범사에 절개 있고 강직한 학행 일치, 언행일치의 인물로 평가한다. 심지어 일본 방문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 조선 선비의 자존감과 기개를 꺽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다. 일본인들은 유독 선생에게만 경의를 표했다.
일본에 대한 정세보고 이후, 선생은 세 차레에 걸쳐 상소문(箚)을 올린다. 주요 내용은 '당시의 난마처럼 엉망으로 되어 있는 군정(軍政)ㆍ민정(民政)에 대하여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그 실상과 병폐의 근원을 하나하나 척결하고 나아가 대안을 제시하고, 외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감하게 내정을 개혁하여 민중의 생활을 안정시킴이 급선무임을 애타게 주장하였다'(이우성, 학봉전집 해제).
임진왜란 당시에는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의 직책을 맡았다. 초유사(招諭使)란, '나라에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아하던 임시 벼슬'이다. 경상도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여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각지를 돌며 격문을 돌려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임란 초기에 타 지역과는 달리, 경상도 지역의 민심을 회복하고, 경상도 지역에 왜적의 침입을 봉쇄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어수선한 난리통에 백성들이 지도자를 믿고 일심 단결하여 따른다는 것은, 그 지도자의 인품과 역량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과 동문수학한 유성룡이 임란의 와중에, 선조에게 초유사란 직책을 김성일에게 주라고 강력 천거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진주대첩(1차)을 김시민 장군의 상관으로 직접 진두지휘하였고, 2차 진주성 전투 중에서 병사하였다. 병사하는 순간까지도, 선생은 '나라의 운명과 붕당의 폐단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성리학자로, 의병장으로 함께 활약했던 정구(鄭逑)가 쓴 선생의 행장에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선생의 사후에 1등 공신에 추서 되었다.
'아' 다르고 '어'다르다고 하는 말이 실감 난다. 기록되고 전해진 사실 속의 단 몇 줄의 문장 때문에, 김성일 선생의 실제 행적이 가려졌다. 조선왕조 실록에서 특히 선조실록은, 선조 이후에 따로 선조 수정 실록이 만들어졌다. 당시의 정파적 이해관계로, 심하게 치우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선조 수정실록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이처럼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해석에 의한 지식, 또는 앞뒤가 거두절미된 요약형 지식은 위험하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상식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해석된 지식, 주입된 지식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내가 안다고 하는 지식과 그 실체는 다를 수도 있다. 퇴계선생의 언행록과 학봉선생의 문집을 읽으면서,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지식의 실체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대나무 대롱으로 하늘을 보고, 소라 껍데기로 세상과 사람을 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물며 자신을 아는 일에서는 오죽하겠는가.
한편으로 우리네 옛 선비들의 정신문화,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졌던 선비정신은 막상 그 뚜껑을 열고 보니, 이 또한 내가 알고 있던 지식과는 다르다. 옛 선비들의 글을 직접 대하고 보니, 그 바탕이 되는 학문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사유와 성찰의 차원이 달랐다. 나는 여태껏 선비정신을 양반 정신으로 착각 또는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비정신과 양반 정신은 그 질적인 차원에서 전혀 다르다. 조선 선비들의 글을 남이 해석해 준 것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내 눈으로 내 생각으로 직접 읽음으로써, 비로소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지식 혹은 상식의 실체가, 이렇듯 알량하고 가소로운 것이다. 세상이든, 사람이든, 자기 자신이든 간에, 일면을 보고 안다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마땅히 경계할 일이다. 특히 요즘 같은 사회 현실에서, 일면만을 부각시키고 일반화하여, 세상이 주는 사회적 권위로 대중을 호도하고, 가르치려 드는 기지촌 지식인들의 관규여측을 특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두 번 속는 것은, 사람이기에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반복되어, 고정관념, 편견 등으로 고착되고 나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것은 일종의 사회문화적 집단세뇌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세상에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나름으로 표절해 본다, "상식이란 평생토록 외부로부터 습득한 편견의 집합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데미안」 전영애 옮김, 민음사, 2000)
언행록과 학봉선생의 문집을 읽고, 마음에 울렁이는 소회(所懷)를 나름 장황하게 풀어낸다. 우물 속 개구리는 바다를 모른다. 하루살이는 내일이 있음을 모르고, 풀벌레는 계절이 있음을 모른다. 내가 딱 그 짝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나 자신이 안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아는 지식에 대해서 다시 돌이켜 보는 계기로 삼는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옛말이 새롭다.
그럼에도 나의 좁은 소견이나 알량한 상식도 그렇지만, 답답한 것이 내게 또 있다. 관심을 가지는데도 불구하고, 내 안이든 세상이든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다만 느낌으로만 인지하고 어림짐작만 할 뿐이지, 내 둔한 머리로는 좁은 눈으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고, 또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아무리 그 진면목을 살피고 헤아려 보려 해도 막상 그 형체가 드러나지 않아, 특정할 수 없는 것에 있다. 글쓰기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도구임에는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쓴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라',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이다'"라는 현인들의 말을 다시 되새김한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때까지...(2016.4.5)
『내가 평생 동안 두고두고 생각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나는 하루도 독서를 안 한 날이 없다. 하지만 일처리는 이치에 합당하지 못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또 마음 먹은대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적이 많았다. 그런데 평생토록 글 한 자 제대로 읽지 않은 듯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스스로 일마다 이치에 합당하다고 여기고 확신한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공부를 하였기에 그러한가? 다른 한 가지는, 내가 스스로 돌아보면 때때로 천박하여 미천한 종에게조차 부끄러운 점이 많이 있다. 하지만 남들은 나를 볼 때 그래도 가증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남들에게 미움을 받아 언행이나 모습이 좋지 못하다고 지목받는 사람들이 있다. 저 사람들은 그 마음이 도대체 어떤 상태인 것일까? 속을 들여다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이 두 가지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성대중(成大中,1732~1809) 청성잡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