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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12. 2017

욕망과 양심

"욕망이란 인간의 본질이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된다고 파악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스피노자, '정서의 정의', 에티카(Ethica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1675)》


인용한 문장은 스피노자가 정의하는 욕망의 개념이다.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욕망'의 단어는 전통적인 개념의 '욕망(慾望)'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 'cupiditas'(쿠피디타스)다. 단어의 뜻은, 여성명사로 '욕망, 열망, 갈망. 탐욕, 물욕, (특히 금전에 대한) 애착•인색. 욕정, 성욕' 등등으로,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연상 가능한 욕망, 또는 욕심의 내용들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중세 기독교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성 어거스틴의 『행복론』에서 '쿠피디타스(cupiditas)'가 찾아진다. ‘쿠피디타스(cupiditas)’란 '유한하고 덧없는 것을 사모하는 상태'라고 어거스틴은 정의한다. 앞서 열거한 본래의 단어가 가진 뜻을 모두 포괄하여 결과론적인 의미를 담아 내었다고 헤아려진다. 이와 반대되는 단어로 ‘카리타스’(caritas) 즉 '어느 누구도 낚아채 갈 수 없는 영원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태'라고 정의하였다. 어거스틴의 행복에 관한 결론은 단순명료하다. 찰나적이고 덧없는 것과 영원한 것의 대조를 통해서, 결국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가진 사람만이 행복하다.”이다. 이처럼 전통적, 종교적, 도덕적 관점에서의 욕망은 부정적이고 불순한 대상이며 덧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스피노자에게 욕망은, 단순히 종교적 도덕적 차원으로 판단하여 제거나 억압, 은폐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욕망을 통해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고 통찰했다. 인간이해에 있어서, 신성(神性) 또는 이성(理性)으로부터 출발하는 전통적인 철학사변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정의에 따르면,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욕망이 제거된 상태의 인간은 인간이 아닌 그 무엇이다. 그래서 욕망은 제거될 수 없는 것이다. 욕망 없이는 인간이 존재할 수도 없다. 욕망의 이해없이 인간이 파악될 수도 없다. 그 순서를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성은 욕망을 무작정 제어할것이 아니라, 욕망의 실현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 스피노자 윤리학(에티카)이 지향하는 바라고 이해해도 되겠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통합적인 힘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 라고 정의했다. 코나투스란, '지속적으로 자기를 보존하고 존재를 유지하려는 경향' 을 뜻한다. 코나투스가 증가하는 쪽으로 긍정적이고 바람직하게 행동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곧 스피노자 윤리학의 핵심이다. 이를 통해 욕망의 작용은 인간의 능력을 증대시키는 긍정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헤아리게 한다. 


한 마디로 '지속적인 자기 보존의 경향성(혹은 동력)'으로 정의되는 '코나투스'는, 인간 본질로서의 욕망이 그 근원이라는 점에서, 소위 이성론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의지'와는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다. 이성론자들이 말하는'자유의지'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즉 자연상태의 결정된 인간본성을 넘어서는 정신적인 어떤 힘을 의미하기때문에,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는 상반된 철학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는 경험에, 후자는 이성에 그 철학적 사변의 근거를 두고 출발한다. 


하지만 그 출발은 비록 다르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실천적 삶의 행위의 기준을 모색하고 합력하여 선을 추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서로 같다. 물론 둘 다 메타(meta), 즉 충동이든 의지든 그 동기의 근원을 명확하게 밝혀낼 수 없다는 점에서 선결문제해결의 오류라는 논리적 허점을 서로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아는 분명한 사실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항상 같이 하지 않는다. 현실적인 삶에 있어서 인간 본질로서의 욕망이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코나투스'든 그 본질을 넘어선 정신적인 능력으로서의 '자유의지'든 항상 선한 쪽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비록 수많은 윤리적 도덕적 기준 또는 지침 또는 관습과 규범, 혹은 법이 존재한다하더라도 말이다. 인류의 역사든, 국가의 역사든, 개인의 역사든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이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왜 그런 이율배반적인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최소한 양식과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양심으로 느끼고 안다. 그것이 욕망과 상관없는 일이라고는 부정할 사람은 없을게다. 다만 자신이 관련된 사안에서 만큼은 단지 암묵(暗默)할 따름이다. 대신에 자신을 탓하고, 손가락질하기 보다는 드러난 세상에게 타인에게 여지없이 투사하여, 자신을 도덕적으로 합리화하는게 심리적으로 더 쉽고 편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욕망과 양심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조선의 실학자 성호 이익선생은 《성호사설, '독서사환'(讀書仕宦)》에서 이렇게 통찰하고 있다. "물욕이 양심을 이김에 따라 양심이 사라지고, 양심이 사라짐에 따라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비록 옛 성인이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밝혀 주었고, 지나간 역사가 엄연히 증명하는데도 물욕이 늘 마음속에 걸려 있어서 다만 일이 같지 않고, 시대가 다르다는 것만 보고 양심의 여하는 반성하지 않는다. 이러므로 잠깐 사이에 일의 방향이 바꿔지고 먹었던 마음도 변하게 된다." (이익, '독서사환')


사환(仕宦)의 뜻은, '벼슬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학식을 가진 사람이 사회적 또는 공적책임과 지위가 있는 직책을 맡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독서사환은 독서를 통한 배움과는 별개로 사회적 공적 직책을 가진 사람들(혹은 지식인, 지성인)이 흔히 보이는 언행불일치, 그리고 생각따로 마음따로 행동따로 등의 이중적 사고가 생기는 근본을 지적한 글이 되겠다. 그 키워드는 '물욕'과 '양심'이다


물욕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욕망이든 욕심이든 욕구든 불구하고 그렇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욕심이 양심을 넘어설 때에 문제가 된다. 그런데 언행불일치와 이중적 사고도 보통 사람들 또한 예외없이 마찬가지다. 평균 이하라고 생각되는 나도 마찬가지다. 굳이 벼슬살이(사회적 직위)를 특정하지 않더라도, 자기 기준의 좋고 싫음, 같고 다름, 유불리, 손해와 이익 등은, '옳고 그름'과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개념이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게다. 


비록 내가 좋은 것이라 해서 누구에게나 선(善)이요 옳은 것이며, 싫은 것이라해서 타인들에게도 마땅히 나쁜 것(惡)이고 틀리거나 잘못된 것(wrong)일리는 없다. 하물며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고 다른 것이라해서 기피하고 혐오하는, 또는 적대시하여 제압하고 제거해야 하는 적(敵)이 될리는 더욱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기 이해관계나 좋고 싫음에 따라 마음에 들지 않는 것, 또는 다른 것(different)을 선과 악, 옳고 그름과 착각하거나 혼동하기가 쉽상이다. 자기 양심에는 전혀 개의치않고, 자기 좋은대로 합리화하여 단정하는 경향이 흔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Leviathan, 1651)에서 다음과 같이 통찰하고 있다. "욕구나 욕망의 대상이 어떠하든 간에 그 당사자의 입장에서 마음이 강렬하게 이끌리는 그것은 '좋은 것(good)', 즉 '선'이다. 반면에 미워하거나 혐오하는 대상은, '악'(evil)이다. 경멸하거나 쓸데없다고 여기거나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것들 또한 마찬가지다. 선이든 악이든 경멸이든 이러한 표현들은 늘 그것을 사용하는 당사자에게 달린 것이다. 즉 단순하고 절대적으로 선이니 악이니 그러한 건 없으며, 그것들에 대한 공통의 규칙 또한 없다." 


어쨌든 성호 선생의 통찰처럼 '독서'와 '사환'을 분리시켜 놓고 보면 학식이나 사회적 역할 및 공적 지위는, 사물의 바른 도리와 이치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식견이나 그 사람됨을 나타내는 인격과는 별개의 것이란 것을 다시 확인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겉치레는 쉽다. 하지만 하늘이 알고 또 자기 마음이 아는 감추어진 속내를 꾸며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 옛글에 '마음이 공정치 못한 사람은 책을 읽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을 보았다.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근래에 지식인, 정치인들의 '내로남불'이 마치 유행처럼 당연시되는 것을 본다. 자본과 권력이 주는 달콤한 맛에 양심을 온갖 수식과 논리와 명분으로 가려 버린 언론인들, 그리고 거기에 기생하여 완장찬 마름 행세를 마다 읺고 곡학아세하는 기지촌 지식인들은 말할 가치조차 없다. 이런 자들에게서 무슨 올바른 시비 판단을 기대하겠는가? 과거는 현재를 보는 창이라 했던가. 요즘은 과거와 달리 인터넷을 뒤지면, 공개적으로 표명된 것들은 웬만하면 다 나온다. 아무리 시치미를 떼고, 모르쇠로 일관한다해도 소용없다. 아무리 세탁을 하고 고소고발을 난무하며, 부지런히 흔적을 지워도 마찬가지다.  


바담 풍 꼰대는 온 천하에 널려 있다. 하지만 진짜 어른은 사막에서 나무그늘 찾기처럼 귀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런 자들의 처세와 삶의 능력을 때론 부러워기도 한다. 나는 왜 저렇게 살지 못할까? 고민도 때론 한다. 내가 갖은 유혹에 저항하여 결단코 욕망을 양심과 맞바꾸지 않겠다고 확언하고 장담할 자신 마저 없다. 다만 내 욕망으로 보자면 언제나 부러워할 뿐, 내 양심으로는 결국 그게 아니라며 부끄러워하고 애써 거부할 따름이다.  


글을 정리하고 보니, 결국 나도 욕망을 빌미삼아 자신을 합리화하는 모순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도덕적 종교적 윤리적 관점에서 냉철하게 판단하자면, 나는 결코 선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아니다. 또 도덕적인 사람도 아니고, 정의로운 사람은 더욱 아니다. 뿐만 아니라, 껍데기는 안 그런 척한다 할지라도 내면으로 도덕이나 윤리에 어긋나는 욕망이나 욕심에도 그리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일탈도 가끔은 꿈꾼다. 다만 내 욕심, 내 욕망, 내 욕구때문에 의도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가하거나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쁜 놈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어쩔 수 없는 세월 탓에, 가끔은 꼰대 짓도 예사로 한다. 어쩌면 껍데기만 어른인 척 하는 어린 아이에 나는 불과할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느끼는 게 수 십년 전의 아이 때와 별반 달라진게 없기때문이다. 결국 내가 가진 모순과 내면적인 갈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어려움을 택하기보다는, 세상과 사람에 투사하는 쉬운 방식으로 글쓰기를 택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은 인간 본질, 그 자체"라는 스피노자의 말에 작은 위안을 가져 본다. 세상과 사람을 향한 투사보다는 반면교사로써 지속가능한 '코나투스'를 애써 생각해 본다. 적어도 독서를 통해 내가 가진 욕망의 모순을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욕망이 이끄는 '코나투스'가 적어도 오늘보다는 내일은 좀 더 나은 사람, 좀 더 양심적인 사람이 되게 해주리라는 작은 희망때문이다. 


"글을 많이만 읽는 것을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섭렵하라는 것은 아니다. 많이만 읽고 연구하지 않으면 막히고 고루해지는 병통이 있기 때문이다. 남이 하지 않는 것을 나는 하고, 남이 하는 것을 내가 하지 않는 것은 지나친 행동을 하려 해서가 아니다. 오직 '선(善)함'을 택하였을 뿐이다. 남이 하지 않는 것을 나 역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나 역시 하는 것은 맹종하려 해서가 아니다. 단지 '옳은 것'을 따랐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아는 것'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덕무(李德懋, ''이목구심서') 


인용문은, 스스로를 '책만 읽는 바보'(看書痴 간서치)라 평가한, 형암 이덕무 선생의 글이다. 배움은 끝이 없다. "오직 선함을 선택할 뿐이고, 단지 옳은 것만을 따를 뿐." 옛 글의 독서는, 그야말로 나를 현실적인 각성으로 이끌어주는 몽학선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수없는 각성과 앎에도 불구하고 항상 걸려서 넘어지는 곳은, 언제나 실천이라는 이름의 문턱이다. 또 '코나투스'(Conatus)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이 나를 합리화 하고 또 정당화 하였던가.  옛 현인들의 글은 한결같이, 잠자던 내 양심을 은근히 찌른다. 껍데기만 그럴싸한 어른같고 속은 어린아이만도 못한 졸보에 불과한 나에게, 문득 드는 사사로운 생각들이 그렇고 그렇다는 이야기다.(2017.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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