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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Jan 02. 2018

착각은 자유다

"당나귀가 인류의 성스러운 유물을 등에 잔뜩 싣고 가게 되었다. 길가의 사람들이 경배를 하자 당나귀는 사람들이 자기를 찬양하고, 향과 기도문이 자기에게 바쳐지는 것으로 알고 고고한 체하며 또각또각 걸었다. 어떤 사람이 그런 당나귀를 보고 당나귀가 큰 착각을 하고 있음을 알고 충고했다. "당나귀야, 넌 바보짓을 하고 있어. 사람들은 네가 아니고 너한테 실린 유물을 보고 경배하는 거야, 사람들은 네 등에 실린 우상들을 칭송하지만 너는 한낱 한찮은 꼭두각시로 생각하지."  "사람들은 어리석은 법관을 그가 입고 있는 법복 때문에 우러러본다." -'내 마음에 지혜를 주는 라퐁텐 우화'(그림책 2014)-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들 자기가 보고 이해하는 세계를 객관적인 세계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실상이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한, 착각일 수도 있다. 착각하면 뒤이어 연상되는 단어는 오해다. 그 차이는 뭘까? 사전을 뒤져보면, 착각이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잘못 느끼거나 지각(知覺)함', 그리고 오해란,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거나 이해함'이라고 나와 있다. 단어의 뜻으로 보면, 착각은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인지적 오류의 차원이다. 오해는 사고의 과정을 거친 논리적 오류의 차원이다. 전자가 원인이라면 후자는 결과라 이해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즉 오해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단정해도 되겠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착각과 오해는 가끔 겪을 수 있는 일상의 경험이다. 이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것과는 달리, 인간이 그리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인지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착각이나 오해를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여러 인지 이론들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보고 싶은 대로 보고자 하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과 아포페니아((Apophenia)의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기대 심리를 충족하는 부분적 현실만을 인식하는 경향'을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요인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예상 또는 기대 혹은 희망 등에 어긋나는 현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다양한 근거와 견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판단을 합리화시키는 근거만 선택적으로 수집하는 편향된 시각을 가지게 된다. 불편하지 않는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불리한 정보는 무시한다. 이 경우 이성이 아닌 감정적 논리에 따라 현실인식이 이루어지므로 객관적ㆍ합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진다. 

깊이 간직하고 있는 신념과 충돌하는 사실을 제시하면 사람들은 신념을 바꾸기보다 그 신념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는 우리의 상식과 어긋나지만 여러 조사 결과는 일관성 있게 그것을 증명해준다. 경제적으로 상층으로 올라서려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수입의 불평등을 드러내는 도표를 제시해 보라.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보다 당신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공적 혹은 사적 생활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무장한다.” 감정, 자아, 가치, 궁극적인 믿음 등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직면할 때, 우리는 자신의 방어를 깨부술지 모르는 것에 대항해 자신을 차단해버린다. (파커 J.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 옮김, 글항아리 2012)

반대의 부정적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즉 자기 생각에 아니다고 판단되면 그 판단을 합리화시켜주는 합당한 정보만 추려내게 된다. 쉬운 예를 들어,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은 부분, 단점만이 눈에 자꾸 들어오고, 반면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단점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장점만 보인다. 남녀가 결별하고선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헤어진 이유와 원인을 서로 상대에게서만 찾아내고자 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어떤 상황, 어떤 형태로든 자기는 문제가 없고 완전한데 결점과 문제는 상대에게서만 찾아진다. 정리하면, 확증편향이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찾아서 골라가며 듣고 보는 것'을 뜻한다. 인지부조화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된다.  혹자는 이것을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바보의 벽'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이와는 약간 다른 차원이지만 '예기불안'이란 것도 있다. 이는 '자기가 실패할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생기는 신경증. 수면, 성교, 수험 따위의 평범한 일상적 행위를 할 때 한 번 실패했던 일이 연상되어 또다시 실패를 예감하고 불안을 느끼는 상태(네이버 사전)'를 말한다. 특히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다. 불편한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태도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데,  어떤 불안감이나 혹은 의심 때문에 상대를 대하는 자신의 외적 태도가 변화되고, 그 불안하고 수상한 태도로 인해 상대에게 예상치 않은 오해와 갈등을 초래하거나 증폭시킨다. 


논리 오류 중에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 즉 ‘우연히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에 인공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행동을 뜻하는 오류'가 있다. 확증편향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는 '벽에다 총알을 쏜 뒤 그 총알 자국을 중심으로 과녁을 그리는 식의 논리 오류'를 말한다. 즉, 근거를 바탕으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거기에 맞춰 근거를 만들어 내는 식의 논리 오류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흔히 우연을 필연으로 확신하는 것으로, 이는 착각보다는 의도적인 오해에 가깝다. 


아포페니아(Apophenia)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현상이나 정보에서 규칙성이나 연관성을 추출하려는 인식 작용'을 나타내는 심리학 용어다. 1958년 독일의 정신병리학자인 클라우스 콘라트(Klaus Conrad)가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서로 연관성이 없고, 특정한 의미도 지니지 않은 현상들에 대해 일정한 형식으로 규칙성이나 연관성을 부여하여 의미를 추출하는 인식 작용을 나타내는 말이다. 주변의 현상이나 대상을 유형화하여 인식하고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 사고의 특징에서 비롯된다"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이와 비슷한 것으로, 불분명하고 불특정 한 현상이나 소리, 이미지 등에서 특정한 의미를 추출하면서 나타나는 착각과 오인(誤認) 등을 의미하는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현상, 주관적인 종교적 신비체험, 주술적 심령 체험이나 사진, 암시 기법에 의한 최면 전생 체험 등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외에도 인간이 쉽게 인지할 수 없는 반복된 특정한 메시지 또는 이미지가 무의식적인 잠재의식으로 기억되어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서브리미널 효과(subliminal effect)', 하드락 팝 음악 원반에 악마의 메시지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 '백워드 매스킹'(Backward Masking)등도 이에 해당된다. 


인간의 뇌는 우리가 경험한 것들을 ‘저장, 유지, 회상’이라는 재구성 과정을 거쳐 기억으로 남긴다. 이 때문에 개개인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도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뇌에 주입되어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숱한 암시들은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만약 당신이 점쟁이나 무당의 예언 또는 숱한 심심풀이형 심리테스트, 성격 테스트 등의 다양한 사이비 심리학이 제시하는 콜드리딩, 각종 매스미디어에서 인터넷에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검증되지 않은 각종 지식과 정보 등에 자신과 관련지어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아포 페니아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소리 없이 작동된다. 이를 에리히 프롬은 실체가 보이지 않는 익명의 권위, 즉 명령도 명령하는 자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저항할 이유조차 존재하지 않는 익명의 권위가 인간의 무의식에 암시하는 형태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고 통찰했다. 


어째튼 착각에 관한 한 인간이라면, 누구든 예외는 없다. 당신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가령 전문 사기꾼들에게 걸리면 누구라도 바보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만약 직업 제비 또는 전문 선수에 걸려서 넘어가지 않는다면 당신은 여자가 아닌 남자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당신은  인간이 아닌 그 무엇이다. 정말 질이 나쁜 인간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또 오해하도록 상대를 심리적으로 조종하는 부류들이다. 물론 가장 과학적이고 지적능력이 탁월하며 객관적이어야 할 과학자들도 이러한 착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학에서 법칙과 이론은 관찰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이론은 관찰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 따라서 과학에서의 관찰은 철저히 객관적이며 이론 중립적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경험주의에 입각한 귀납주의 과학관이다. 귀납주의(inductivism)란, 과학적 지식이 관찰 가능한 사실로부터 얻어진다는 철학적 견해를 말한다. 

 

그런데 과학철학자인 N.R 핸슨(Hanson 1924~1967)은 관찰과 발견의 패턴에서 어떠한 선입견도 없는 객관적 관찰이 존재한다는 경험주의 인식론을 부정하였다. 핸슨은, '관찰자의 경험은 그가 겪은 사전 경험이나 지식, 기대 등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순수한 관찰은 존재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관찰자는 관찰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측면을 통해 대상을 이해한다. 이것을 '관찰의 이론 의존성(theory-laden)'이라고 한다. 핸슨은 '해석'이라는 것이 '보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서로 다른 두 관찰자가 똑같은 그림을 보지만 두 사람의 시각적 경험의 내용은 다르다. 이는 각자가 시각적인 경험을 가지게 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각기 다른 이론적 맥락에서 보기 때문으로 보았다. 이로써 핸슨은 전통적인 경험주의 입각한 귀납주의 과학관의 토대를 흔든 것이다. 


같은 그림을 보면서 상대도 나와 같은 생각, 같은 느낌일 것이라는 자기 확신은 착각이요, 오해일 가능성이 높다. 약간의 암시만 줘도 또 달라진다. 이는 일상의 경험으로도 익히 아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간과하거나 무시해버린다. 우리는 동물원 우리 속의 침팬지를 호기심으로 즐기며 구경하고 관찰한다. 그런데 침팬지 역시 우리를 구경하고 관찰하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판단하고 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착각이 다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눈에 콩깍지가 씐 연인들, 사랑하는 자식과 부모, 등등 잠시 사람을 행복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일은 허다하다. 행복한 착각은 때때로 우리네 삶에서 잠시 현실을 잊게 하고, 행복한 정서로 이끄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형태의 착각을 '긍정적 착각'(positive illus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Taylor & Brown1988). 착각이 현실과 다르게 인식한다는 점에서는 물론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들이 긍정적인 정서를 유발하여, 긍정적인 결과를 준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긍정적 착각의 특징은,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자기 자신을 타인들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지각한다거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 사건을 실제보다 잘 통제할 수 있다는 자기 믿음,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예견하는 경향성에 있다.(Taylor & Armor,1996). 이렇듯 긍정적인 착각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이제 처음의 당나귀로 돌아가자. 착각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이고 또 자유다. 그런데 착각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 졸지에 멀쩡한 바보가 되든, 사기를 당하든, 뒤통수를 치든, 수치 혹은 치욕을 느끼든 말이다. 만일 당나귀가 인간의 말을 이해하고 있다면 사람들의 충고를 듣고 실상을 깨닫는 순간, 얼마나 쪽팔렸을까? 이는 일상의 경험이다. 당나귀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다. 다행히 착각으로 인한 쪽팔림은 순간적이다. 정작 문제는 착각이 오해로 발전하여 쪽팔림인지 부끄러움인지 수치인지 치욕인지 뭐가 뭔지 도통 모른다는 데에 있다. 


착각이 오해를 거치고, 부적절한 행동으로 외부로 표출될 때, 문제가 생기고 갈등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다만 착각이 혼자만의 문제에 국한될 때, 때론 쪽팔리게도 만들지만, 때론 스스로 희망과 행복을 느끼게 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의미의 오해는 다르다. 상대적인 어떤 대상이 상황이 존재한다면 그 결과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착각이 부정적인 관점의 뿌리 깊은 오해가 되어 집단의 착각으로 다시 자리매김할 때다. 그래서 오해가 집단의 문제로 비화될 때는 엄청난 사회적 갈등과 비극이 생긴다. 착각과 오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개인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아무튼 착각은 자유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내가 느끼는 자유 또한 착각일 수도 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어떤 형태로든 착각에는 책임이 따른다. 당연히 오해는 갈등을 초래하여 착각보다 더 큰 책임을 각자에게 요구한다. 


요즘 뉴스에서 벼슬자리가 주는 정치적 욕망에 사로잡혀, 교육자로서 앵무새처럼 강조하던 평소 정의롭던 자신의 신념과는 다르게, 서야 할 자리, 시시비비를 분간 못하는 한 인물을 본다. 어제 뉴욕타임스에서는 우리나라 대통령을 조롱하는 카툰을 봤다. 당나귀라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뭐가 뭔지 알 수도 없고, 또 이해도 못할 뿐만 아니라, 신경도 아예 안 쓸 테니 말이다. 더욱이 부끄러움이 뭔지도 모르는 당나귀가, 치욕을 느낄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당나귀 같은 사람들이 분명 있다. 착각은 자유다.


'사람들은 어리석은 법관을 그가 입고 있는 법복 때문에 우러러본다.' 그러나 법관이든 당나귀든, 실상을 제대로 알려서, 현실의 착각이나 오해에서 일깨워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귀하다 하겠다. 나는 걸치고 있을만한 법복도, 그렇다고 딱히 내세울 것도 없다. 그럼에도 간혹 당나귀 같은 착각이나 오해를 한다. 귀한 것을 등에 지고 가는 당나귀가, 등에 진 그 귀한 것 때문에 존경과 칭송을 받는 당나귀가, 충고라도 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당나귀가, 부럽기만 한 것은 참 씁쓸한 일이다.(201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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