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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Jan 05. 2018

황금률(Golden Rule)

세월호 참사 이후로 공감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다뤄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공감의 특징 중의 하나를 타인의 정서에 대한  '헤아림’이라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헤아림'의 개념은 그 유래가 아주 오래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류의 공통된 보편 정신 속에서도, 기본적인 윤리원칙으로 소위 ‘황금률(黃金律, Golden Rule)로 존재해 왔다. 


황금률(黃金律, Golden Rule)은, 3세기경 로마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가 신약성경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복음 7:12)"라는 말씀을 황금으로 써서 벽에 붙인 데서 유래한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행동규범으로써, 마치 황금으로 여겨질 정도로 귀하고 소중한 말씀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황금률은 신약성경에만 유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대 중근동의 각종 문헌에서 약간의 표현만 달리한 채 숱하게 찾아지는 까닭이다. 구약성경의 외경 격인 토빗기 4장 15절에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는 구절이 있다. 토빗기는 기원전 734년부터 612년 사이의 중근동의 역사, 삶들을 설화 형태로 기록한 책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는 "내가 이웃에게서 나무랄 말한 것들을 나는 행하지 않겠다.”하였다. 


탈무드에서 랍비 힐렐은 율법의 요지를 묻는 이방인에게 “당신이 당하기 싫은 일을 당신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율법 전체의 정신이며 다른 모든 것은 그 설명이다. 가서 그것을 배워라.”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이희영. 『바빌론 탈무드』, 동서문화사, 2009). 마태복음서보다 이후에 기록된 디다케 문서에도 이런 글귀가 나온다. “생명의 길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당신을 만드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당신 이웃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시오. 또 무슨 일이든지 당신에게 닥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거든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마시오.” 이외에도 중근동의 고대 문헌들에 비슷한 내용들이 많이 찾아 진다.


이렇듯 황금률의 내용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행동규범, 즉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타인과의 관계에 기초한다. 황금률은 성경, 신구약 전체에 걸쳐 인간의 보이지 않는 내면적 믿음이 태도나 행위로써 드러나는 증거로써, 관념적이거나 요식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인관계에서 마땅히 나타나야 하는 행위적 결과물이라는 게 여러 기록들에서 동일하게 강조된다. 황금률은 그야말로 인간 관계론의 핵심이다. 


정리하면, 신약성경과는 달리, 초기 기독교 문서에는 황금률이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을 너희도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라고 금지 형태로 나온다. 이는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 즉 ’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과 문장의 지시 형태만 다를 뿐 그 내용은 똑같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한 마디로 평생 지키고 행하여야 할 덕을 나타낸 말이 있습니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바로 서(恕)라는 말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베풀지 마라(己所不欲勿施於人).” 


여기서 말하는, 서(恕)는 용서라는 뜻이다. 더 넓은 의미의 관용을 의미한다. 관용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다”이다. 즉 자신을 헤아리고 미루어 스스로 용서하는 마음을 타인에게까지 확장하는 것, 그것이 바로 관용이다. 바로 관용이 대인관계에서 평생을 지키고 행해야 하는 덕이라고 공자는 강조한다. 이러한 관용의 삶에서 나타나는 결과로 “무릇 인자는 자신이 서고자 할 때 남을 서게 하고, 자신이 도달하고자 할 때 남을 도달하게 한다. 능히 가까이서 미루어 깨닫는 것이 인을 행하는 방도이다.”라고 공자는 가르친다.


대학 치국평천하장(大學 治國平天下章篇)에는 이를 더욱 자세하게 풀이한다, 그것은 “혈구지도”(絜矩之道)라는 경구로 압축된다.  혈구(絜矩)란 나무나 쇠로 만든 ‘ㄱ’ 자 모양의 곱자로 잰다는 뜻으로, ‘자기의 처지로 미루어 남의 처지를 앎’을 이르는 말이다. 즉, 내 마음을 살피고 헤아려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혈구지도(絜矩之道)”라고 한다. 그 원 내용은 이렇다. 


“군자는 혈구의 도가 있다. 윗사람이 싫었던 것을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고, 아랫사람이 싫었던 것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뒷사람에게 먼저 하게 하지 말고, 뒷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앞사람을 따르지 말며, 오른쪽 사람에게 싫어하는 일로 왼쪽 사람과 교제하지 말고, 왼쪽 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오른쪽 사람과 사귀지 말라는 것이니, 이를 혈구의 도라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요체는 '너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강조한다. 


기철학을 정립한 혜강 최한기 선생도 헤아림의 도, 즉 추측의 도를 모든 경험적 인식론의 바탕에서 관계적 차원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이처럼 황금률은 바로 “헤아림”,  즉 공감과 그 차원을 함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황금률은 자기 인식과 이해의 존재론적 가치를 헤아림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웃과 타인에 대한 관계론적 가치로 그 헤아림이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자아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대를 그리고 그대는 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황금률이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탈무드, 불교를 비롯한 타 종교, 고대 철학자 등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에 의해서, 형태만 달리하고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음을 눈치 챌 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의 보편적 삶의 지혜로 다양하게 강조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가, 비록 서양과 동양이라는 환경적 지리적 요인들에 의해서, 전자가 개체 중심의 논리적 사고의 특성을, 후자는 관계중심의 감정적 사고의 특성을 가진다고 이해하지만, 그 본질에서는 동서양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처럼 진리는 형이상학적이고 복잡한 설명과 난해한 해석 그리고 설득과 논증이 필요한 어떤 것, 혹은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들의 지식이나 관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류의 정신 속에 이어져 온 경험을 통한 보편적 지혜(보편 정신 또는 보편적 가치) 속에 존재한다. 


그런데 공기처럼 가장 익숙하고 보편적인 삶의 지혜일수록 우리는 곧잘 그것의 중요성을 망각하거나 간과한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아는 것을 가지고 혹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 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의외로 가장 근본적인 것, 기본적인 것이 오히려 무시되거나 그 실천이 어렵다. 인간의 자기본위적인 경향과 손실과 이득을 따지는 자기 편향은 거의 본능적이기 때문이다. 아는 것(지식)과 실천은 전혀 다른 차원임을 삶의 경험을 통해서 뼈저리게 느낀다. 우리가 사는 삶의 여정에는 곧잘 그 우선순위가 자의든 타의든 곧잘 뒤바뀌거나 엉뚱한 것이 자리 잡고 있을 때가 허다하다. 


결국 황금률의 핵심은 “혈구지도(絜矩之道)” 즉 “바른 헤아림”에 있다. 자기를 살펴 미루어 헤아리고 자기를 헤아리는 그 마음으로 남을 헤아리는, 이 헤아림의 과정이 바로 소통이요 곧 공감의 시작이다.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예수의 '죄 없는 자 돌로 치라는 간음한 여인'의 일화 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같은 일화에 굳이 사족을 달지 않아도, 헤아림으로써의 공감은 황금률과 그 맥락이 깊이 닿아 있다. 이 헤아림으로써의 공감은 단순한 인지적 이해 상태가 아닌 동일한 정서적 경험의 동일선상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헤아림을 통하여 자신은 물론 이웃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정립하고, 고통과 번민과 갈등을 최소화하여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더불어서 지향하는 데에 있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관계론적 차원의 소통의 바탕을 이룬다. 황금률은 그 실천의 핵심이다. 평형 저울추는 서로 민감하게 영향력을 주고받지만 동등한 무게를 가질 때에야 비로소 평형을 이룬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연후에 남들이 업신여기며, 집은 반드시 스스로 무너뜨린 후에 남들이 허물며,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친 이후에 남들이 치는 것이다."(맹자, 이루상 8장).  나와 나, 나과 너, 나와 우리라는 존재와 관계의 두 차원이 상호작용을 하며, 평형을 이루는 것이 건강한 삶과 행복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정신적 평형이 깨어져 불균형을 이루고 그 불균형 때문에 고통과 번민과 갈등에 빠지는 것, 그것이 곧 불행이라 할 수도 있겠다. 


요즘 온통, 힐링, 웰빙, 공감, 도덕, 정의, 사랑이라는 말들이 난무한다. 그럼에도 사회는 위에서부터 곳곳에 암덩어리처럼 고착되어 썩어 있는 듯하다. 그 아래에 펼쳐지는, 마치 막장처럼 여겨지는 세태는, 마치 앵무새처럼 강조하는 그러한 단어들에 적합하게 변할 기미를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뭐 눈에 뭐 밖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고상한 비꼬임을 당할지라도, 할 말은 해야 하는 법이다. 


비록 일부에 불과하다할지라도 황금률을 그 어느 집단들보다  누구보다도 잘 알듯한 종교인들이 세월호가 주는 사회적 교훈과 의미들을 비하하고,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일장기를 휘날리며, 구국기도회를 하는 모습은 한편의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세월호는 여전히 차갑고 어두운 물에 잠긴 채로 현재 진행 중이다. 


“모든 것은 이전에 이미 말해졌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앙드레 지드의 말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표절해 본다. "황금률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만 남아 있을 뿐." (201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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