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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Jan 06. 2018

자유에 대하여

『탐험가 봅 바틀렛의 이야기이다. 그가 외국을 여행하는 중에 아주 희귀한 새 몇 마리를 얻었다. 본국에 돌아오기 위해 새를 새장에 가두고 망망대해를 항해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마리가 유난히도 시끄럽게 굴었다. 새장에 갇혀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새장을 발톱으로 할퀴고 머리를 찧는 등 몸부림치고 발광을 하였다. 봅은 그 새를 망망 대해로 날려 보내었다. 새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자유를 만끽하며 창공을 높이 날아올랐다. 몇 시간 후였다. 그렇게 날아올랐던 새가 다시 배로 돌아와서 지친 몸으로 갑판 위에 떨어져 쓰러졌다. 자유를 얻었다고 날아올랐지만 망망대해에 발붙일 곳이 없었고 먹을 것 또한 당연히 없었기 때문이다. 봅은 쓰러진 새를 주어 담아서 다시 새장에 집어넣었다. 새장은 더 이상 그 새에게는 감옥이 아니었다. 새장은 안식처가 되었다. 끝없는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이 새장에 있었던 것이다. 새장은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선이었던 것이다.』 

자유에 대해서 생각게 하는 일화다. 물론 일화의 결론은 인간의 의지를 벗어난 신적 의지인 구원과 연결된다. 이 일화의 한국판 출전을 더듬어보면, 모 유명 목사의 설교집, ‘주도적 신앙의 본질 1’에 수록되어 있다. 이 일화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탐험가 봅 바틀렛은 뉴펀들랜드 출신의 미국인 탐험가 Capt. Robert (Bob) Bartlett(1875~1946)으로 추정된다. 최초로 북극 항해를 시도했던 북극 탐험가다. 


일화에서 언급하듯이 일화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희귀한 새는 특정한 지역을 터전으로 삼고 산다. 육지와는 달리 대양은 특별한 종 외에는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못된다. 예를 들면, 대양의 언저리에서 서식하는 앨버트로스라는 새는 폭풍우를 뚫고 대양을 가로질러 수만 킬로를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 속의 새를 놓고 진정한 자유에 대해 논하려면, 새가 자유롭게 날아 다니던 고향 하늘, 고향의 숲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해 이 일화로 자유의 개념과 맥락 짓기엔 다소 무리가 따른다는 말이다. 다만 어떤 인식과 이해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주관적인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자유(Freedom)에 대해 사전을 찾아보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네이버 사전). 위키백과에는 “자유(自由, freedom) 또는 해방(解放, liberty)은 일반적으로 내·외부로부터의 구속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상태와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Liberty는 '1. (지배・권위 등으로부터의) 자유 2. 자유(노예가 아닌 상태) 3. (합법적인 권리로서의) 자유'라고 나와 있다. 위키백과의 설명에서 보듯이, 영어에서는 우리말과 달리 Liberty와 Freedom 둘 다 자유란 뜻으로 사용된다. 굳이 구별하자면,  Liberty는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 Freedom은 본질적인 '개인의 자유'에 해당된다. 우리말 사전의 정의로 보면, 이 두 단어의 의미가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 특히 '개인의 자유(Freedom)'라는 개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부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오랜 과거로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국가적 사회 공동체와 관련된 개인의 기본 인권, 즉 사회적 권리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그 역사가 아주 짧다. 근대 시민혁명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지금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사회적 자유는, 저항과 투쟁과 희생의 결과로 얻은 것이다. 자유의 역사는 평등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권리의 행사에 관한 실천적 문제가 평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독재정권의 역사가 반복된 우리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이 본격적으로 사회적 화두가 된 것은 4.19 혁명보다는, 1987년 군부독재정권 하에서 일어난 6월 항쟁이 그 시발점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그 역사가 아주 짧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자유는 종교적 신앙의 자유를 시작으로 하여, 사상의 자유가 쟁취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적 자유의 기틀이 형성되었다. 16세기 초 종교개혁운동으로 시작된 대규모의 농민운동이 그 첫 단추다. 종교의 자유를 얻는 데에 무려 백여 년 동안 치열한 전쟁이 치러졌다. 이 와중에 대표적으로 볼테르, 존 밀턴, 존 로크, 몽테뉴, 루소, 미라보 백작 등으로 이어지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서 자유에 대한 철학적 개념의 바탕이 세워졌다. 이들 사상가들은 폭압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초지일관 자신들의 신념을 책으로 출간하므로써 전제 권세에 저항했다. 이들의 사상은 이후 16세기 후반 네덜란드, 17세기 후반 영국, 18세기 말 영국과 프랑스에서 연이어 일어난 시민혁명의 사상적 근간을 이루게 된다.


서구 시민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주로 부르조아지(bourgeoisie 중산층)다. 부르조아지란, 상업활동으로 자본과 경제력을 갖추고, 부의 축적을 이룬 중소 상공인들을 말한다. 이들은 성밖에 거주하는 일반 하층민들과는 달리, 귀족들처럼 안전한 성내에 거주한 까닭에 이런 호칭이 불려졌다고 한다. 마르크스 이후에는 주로 자본가 계급을 뜻한다. 이들은 일반 시민, 노동자, 농민들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며 시민혁명을 주도한다. 부르조아지들이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호응을 이끌어 낸 것이 바로 만민평등사상이다. 만민평등사상은 "개인의 사회활동의 자유'가 하나님이 주신 당연한 권리로 믿는 사상"을 말한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여기로부터 나왔다. 시민혁명의 성공으로 봉건 전제군주제, 계급 차별제도 등의 구체제가 무너진다. 그 결과로 얻어낸 것이 바로 자유, 즉 인간의 기본권으로서의 자유다. 


이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만든 정치 체제가 의회 민주주의 체제다. 그러나 투쟁으로 힘겹게 얻은 자유의 권리는 법적으로 중산층에게만 주어졌다. 왕족이나 귀족들과 차별 없이 평등하게 주어졌다. 이는 당시의 계층에 국한된 제한된 평등으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평등임을 의미한다. 정작 시민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 농민, 하층민 즉 민중은 소외된 것이다. 시민혁명 이후 2백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것도 점차적으로 남녀 구분 없이 민중들에게 주어진다. 인종, 남녀의 성별, 계층 구분 없이 개인의 기본적 인권으로 자유와 평등이 사회법으로 보장된 것은, 19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마침내 법적인 권리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연방제 국가인 미국의 경우, 여성 참정권은 1984년에 미시시피주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개인의 사회활동의 자유를 인간의 당연한 기본권리로 주장한 부르주아지들의 사회사상을 일컬어 자유주의(liberalism)라고 한다. 영어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또 역사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이 말하는 자유는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상태'임을 의미한다. 국가나 특정 집단 혹은 특정 계층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유다. 다소 비약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축적한 경제적 기득권을 지키고 누릴 사회적 자유'다. 이점에서 귀족들과 같은 전통적 특권계층과 차별받지 않는 평등은 중요하다. 실제로 시민혁명 이후 의회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회적 평등과 차별을 문제 삼지 않았다. 브루조아지들이 획득한 권리의 평등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평등을 제한하려고 시도하였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획득한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정치적 참정권을 행사하여 국가 권력의 개입이 가능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다. 소위 자기들만의 리그다. 


현실 역사에서 봉건 지배체제는 무너졌지만, 일반 민중들은 새롭게 부상한 신흥 지배계층들에 의해 여전히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머물렀다. 단지 억압과 구속의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러한 점은 '만민평등;이라는 자유주의 사상의 본질적 내용과는 배치된다. 이는 자유의 어두운 면으로 인식된다. 자유는 힘있는 자들만의 권리가 아니다. 무언가 특별한 것을 가진 자들만의 권리도 아니다. 평등은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을 뜻한다. 자유는 의무를 요구할 뿐,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교훈을 얻지 못한 역사, 진지한 자기반성이 없는 역사는 반복한다.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돌기도 한다. 


자유는 좋다. 아름답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자유의 역사에는 한(恨)과 피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현재 누리는 자유는 세상 어떠한 가치와도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요. 기본적인 권리다. 기본적인 권리함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사회적 권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두가 평등하게 누린다는 점에서, 개인의 사회적 자유는 무제한 허용될 수는 없다. 인간은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에는 마땅히 책임과 한계가 따르게 된다. 


인간의 자유가 그의 이웃에 저주가 된다면 그 자유는 종식되어야 한다.’ 영국의 성공회의 목사이자 저술가인 프레드릭 윌리엄 파라(Frederic William Farrar, 1831~1903)의 말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구분하는 선은, 내가 누리고 또 지키고자 하는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거나 침해하는 여부에 달려 있다.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의 자유의 행사는 당연히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고, 타인의 생각을 침해할 가능성이 많다. 심지어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고 부당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행복이란 개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밀(J. S. Mill)은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간섭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칸트(Immanuel Kant)는 ‘자유의 법칙은, 서로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절대적인 자유를 갖는다. 절대적이라 함은 오직 자기에게만 속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문제는 현재 내가 누리는 자유가, 타인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는가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가를 판별하는, 기준과 원칙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의 여부다. 가장 단순한 원칙과 기준은, 개인이 가진 인간적 양심의 법칙이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작동을 안 한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존 로크(John Locke)는 "법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라고 말한다. 사회의 실정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정하게 만들어진 법은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만든 사회적 안전장치요, 약속이다. 따라서 안전장치인 '공정한 법 원칙'과 '법 정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아무리 표면적으로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자유를 강조하더라도, 그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하물며 양심이 아예 실종된 상태라면 두말 할 것도 없다.


자유주의는 태생적으로 구조적인 허점을 가진다. 다시 현대에 와서 수정되어 재구성된다. 자본주의 경제 사회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허점과 실패를 극복하는 보완으로 적자생존과 자연도태라는 자연법칙이 적용된다. 이는 강자의 논리, 지배자의 논리로 자유주의를 재해석한 결과다. 이를 이론적 토대를 갖추고 새롭게 탄생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적자생존, 경쟁과 도태, 그리고 합리성과 효율성에 있다. 신자유주의는 비록 과거 자유주의의 유산인 ‘평등. 박애. 자유’라는 타이틀을 달고는 있지만, "평등과 박애"는 상업적 경제적 실리(實利)와 이해득실(利害得失)이 전제된다. 신자유주의의 합리성과 효율성 아래선 종교도 민족도 국가도 큰 의미가 없다. 오직 적자생존의 이해득실(利害得失)만 있을 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신자유주의는 어쩌면, 유대인들이나 종교단체에서 말하는 선민(選民) 의식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다. 선민(選民) 의식은, 특정 민족이나 집단이 신(神)이나 신적 존재에게 선택되어 다른 민족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세월호 이후, 공직사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마치 커밍아웃하듯이 드러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엘리트 의식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닌 자는 결코 자유인이 아니다.’ 노예 출신으로 고대 그리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인 에픽테토스(Epictetus, 55~135)의 말이다. 자기를 잃고 산다는 것은 곧 자유를 잃은 삶이다. 주변의 현실적 상황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다. 자신이 주체가 되는 자기 인식, 자기 시각이 아닌 누군가가 정해준 인식의 틀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 주변의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다. 입안에 무언가를 머금고는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색안경을 쓰고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선명한 색을 볼 수도, 제대로 인식할 수도 없다. 신자유주의 아래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물질과 황금으로 도배된 거짓 복음에 동조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구원과 달콤한 축복에서 소외되고, 도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예 간과하고 사는 것, 실체를 정확하게 모르면서 물결에 휩쓸려 그냥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다.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 1909-1997)은 그의 논문 ‘자유의 두 개념(Two Concepts of Liberty)’에서,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누어 설명한다. 소극적 자유는 ‘어느 누구도 내 활동에 개입하여 간섭하지 않는 만큼 자유로운(liberty from)” 즉 구속이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다. 여기에는 자유주의가 천명하는 거의 대부분의 자유, 신앙의 자유, 사상과 언론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등등이 해당된다. 적극적 자유는, ’ 모든 활동에 자신이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는 자유(liberty for)‘ 즉 주체적으로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개인의 자아완성, 자아실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생각해 보면, 소극적 자유는 자유를 가로막는 구속이나 속박의 원천이 자유롭고자 하는 개인의 밖에 있다. 따라서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적 요소의 근본적인 변화를 필요로 한다. 반면에 적극적 자유의 장애나 구속의 요인들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부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적극적 자유는 자유롭고자 하는 개인의 내적 변화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내가 내면의 장애를 극복하고 변화하여 자유롭다고 해서, 자기를 구속하는 외부의 장애 요소가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과연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반대로 외부의 장애요인들이 제거되어 구속상태에서 해방되었는데, 자기 내면에서 자유를 가로막은 장애 요인이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이또한 마찬가지다. 결국 자유는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의 변화가 다함께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소극적인 자유와 적극적인 자유는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자유론자로서의 벌린의 주장들과 결론을 뒤로하더라도, 벌린이 구분한 자유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자유가 어떻게 정치적 이념으로 오도되고, 혹은 대중의 지배 수단으로 이용되는가 하는 판별의 관점을 제공해 준다. 소극적 의미에서의 자유인 개인의 사회적 자유를 사회 전체 계층이나 집단에게 일방적으로 적용하면, 개인의 자유를 획일화하여 전체의 목표를 위한 희생을 강요하고 유린하는 전체주의로 빠져 버린다. 적극적 의미의 자유를 특정 집단과 계층 혹은 특정 개인에게만 적용하면 독재 혹은 전제주의가 된다. 


밀(J.S. Mill)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의 목표는 사람마다 다른 다양한 개성의 실현에 있다.’ 인간의 능력과 됨됨이는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획일화된 것은 인간 본연의 고유한 개성이 아니다. 개성의 실현이란, 자아인식(自我認識)을 전제로 한 주체적 존재로서의 자아실현(自我實現)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타인이 아닌, 자기가 주체가 되어 선택하고 결정한 인생의 목표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데에 자유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처음 사전적 정의에서 보았듯이, 개인적 자유를 의미하는 Freedom과 사회적 자유를 의미하는 Liberty는,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융합적인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처음의 새 이야기로 돌아가자. 새가  스스로 새장 속으로 다시 돌아온 순간부터, 자유를 포기하고 생존을 선택한 셈이다. 새는 더 이상 자기 의지로,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새가 아니다. 단지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본성에만 충실하면 된다. 인간이 주는 먹이에 길들여진 새는 단지 누군가의 취미와 즐거움 혹은 외로움을 대리 충족시키는 관상용으로 전락되어 버리고 만다. 본성을 잃어버린 새는 단지 노리개 감에 불과하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쉽게 길들여진다. 그 길들임의 수단은 채찍과 당근이다. 그 바탕에는 생존의 본능이 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담보로, 자유는 쉽게 유보되거나 상실된다. 


개인의 사회적 자유가 제한된 불평등 구조의, 건강치 못한 사회 경제 시스템은 마치 새장과 같다. 주인이 때 맞춰 물과 모이를 주지 않으면 새는 죽는다. 생과 사가 공히 주인에게 달려 있다. 유형무형의 다양한 사회적 장치를 가진 권력에 의해 적절한 당근과 채찍으로 인간을 거기에 적응하고 순응하도록 길들여진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는 자신이 사육되고 길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인지 못한다. 인간이 동물처럼 사육되고 길들여지는 순간부터, 인간은 도구 혹은 수단가치로 전락되고 만다. 마치 새장에 갇혀 버린 새처럼.


스스로 새장에 갇히는 것을 선택한 새의 이야기는 질문을 몇 가지 남긴다. 개인의 자유를 훼방하고 가로막고 있는 적은 누구인가? 신자유주의? 부패한 국가권력? 자본가로 대변되는 사회 문화적 경제적 강자?, 아니면 사회정의와 법과 도덕을 초월하여 군림하는 특정계층들의 집단이기주의? 물론 이러한 것들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구속한다는 점에서 자유의 적, 민주주의 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경제적 사유권력으로 대표되는 재벌은 매우 위협적이고 위험한 자유의 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새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모습이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현대 산업사회의 근간을 이루며, 사회 지배구조의 주요 대상인 시민 계층을 이루는 ‘우리’ 속의 ‘나’ 일 수도 있다. 어쩌면 자유의 진짜 적은, 사회가 전제주의로 회귀하든, 독재로 치닫든,  지도자가 유체 이탈하든, 무전유죄·유전무죄가 되든, 무권 유죄· 유권무죄가 되든,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똑같은 생각, 똑같은 행동, 똑같은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나', 혹은 '우리'일 수도 있다. 


오늘 지금-여기서 누리는 자유는 누군가의 투쟁과 희생으로 얻은 참으로 소중한 가치다. 누군가에게 자유를 빚진 것이다. 그것도 그 획득의 역사가 매우 짧다. 힘겹게 얻은 자유를 '어떻게 지키고 누릴 것인가? '라는 방법의 문제는 온전히 자신에게 달려있다. 애써 하늘로 비상하여 날라 올랐다가 제풀에 지쳐 다시 새장으로 돌아온 가련한 새처럼 무언가에게 다시 길들여져 그것이 낙원으로 가는 구원선으로 자기를 합리화하며 살 것인가?. 혹은 고통스러운 현실에 무기력하게 체념하며 나는 것을 포기하고, 누군가의 수단가치로 사느냐? 아니면 험난한 대양을 가로지르며 자유롭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날아가는 앨버트로스처럼, 주체적인 삶의 주인이 될 것인가?  "일시적인 안전을 얻기 위해서 본질적인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인간은 자유도 안전도 누릴 자격이 없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헨리 조지는 「진보와 빈곤, 1879」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장 천박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일상처럼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가 당연시된다. 부패를 부러워하다가 마침내 부패를 묵인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정부는 결국은 국민을 부패시킨다.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정확하게 인식한 사람만이 자기 자신을 도울 수 있다. 자기를 돕는 그 경험과 인식의 깊이만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자신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질 수 있다. 스스로 자유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차의 바큇살처럼 자유는 확장되기 시작한다. 


최근 꼭두각시처럼 여겨지는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의 여당 대표가 "자유를 유보해서라도 경제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라는 공공연한 발언을 최근에 들었다. 기가 막힐 일이다. 이들 집단이 생각하는 자유의 의미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또 이름 앞에 '자유'라는 명칭을 달고 활동하는 사회적 단체나 조직들의 과거 현재의 면면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자유는 우리가 상식으로 아는 개념적 정의의 자유가 아니다. 어김없이 그 뿌리는 과거 현재의 독재권력과 연결되어 있다. 마치 사기꾼의 신념과 가훈이 '정직'이라고 내세우는 것이나, 조폭이 팔뚝에 보란듯이 '차카게 살자'라고 문신을 새긴 것과 같다. 이들이 내세우고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헌법 어디에고 "자유민주주의" 라는 정체(政體)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대한민국의 국가의 정체(政體)를 선언하는 헌법 제 1조는 이렇다.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세월호 참사 1주년을 앞두고, 고통스럽고 미안한 현재의 양심을 가만가만 토로하던 어떤 선한 이의 말이 귓전에 맴돈다. "분노하고 한편으론 무기력한 양가적 감정, 그래서 아직도 묵묵히 버티는 양심들에게 부끄럽고 존경스럽고 감사하다". 선한 양심의 토로... 그냥 숙연해질 뿐이다. 여전히 미안하고 부끄럽다. 무슨 말을 더하랴.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아직도 해방된 것은 없는 듯이 보인다. 스스로를 질책하듯, 내가 가진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바보새라 불리는 앨버트로스가 부러워진다. (201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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