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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Jul 10. 2018

벼와 피

"남성 중심의 지배적 사고는 집단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까닭에 더 이상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의 기대에 맞춰서 그것에 도전하기가 아주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일은 분명하게 보이는 것부터 해체하는 일이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여전히 존재하는 남성 지배의 무의식이 지닌 상징적 구조를 탐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남성 중심의 지배적 사고가 전통적으로 오랜 세월 확대 재생산을 가능하게 한 메커니즘과 제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들을 차단하고 변화를 위한 힘을 자유롭게 펼치기 위하여 그러한 남성 지배적 사고를 능히 무효화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지난 수천 년 동안 벼농사에서 벼와 잡초인 피를 구별하고 제거하는 것은, 물 관리와 함께 일 년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농부는 잡초를 뽑고 논 돌보기를 단 하루도 게을리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벼와 피는 눈앞에 가까이 두고 봐도 구별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만 피는 잎사귀를 펼쳐 보면 가운데에 선명한 흰 줄이 세로로 나 있고, 줄기는 뿌리 근처로 갈수록 붉은색을 띤다. 그럼에도 워낙 비슷해서 자칫 잘못하다간 벼와 피를 같이 뽑아버리는 실수를 흔히 한다. 

벼와 피를 구별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피 이삭이 막 영글 무렵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런 다음, 적당한 때에 논에 들어가 잠시 뒤로 물러서서 보면 된다. 벼는 애초에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맞추어 심는다. 이 때문에 약간 떨어져서 보면. 일렬로 줄을 맞추고 위로 곧게 자란 벼들 사이에 무질서하게 줄을 이탈한 피를 확실하게 볼 수 있다. 게다가 벼보다 큰 키에 제 이삭의 무게에 못 이겨 축 늘어지는 까닭에 더욱 쉽게 구별이 된다.  이렇듯 피는, 때가 이르면 제 이삭의 무게에 못 이겨 스스로 고개를 꺾어 자신이 피임을 밝히 드러낸다. 이는 농부들의 오랜 경험과 관찰에 의한 지혜다. 


최근 여성 집회의 전면에 핵심 키워드로 등장한 문구로 "곰", "재기해"라는 말을 보았다.  찾아보니 소위 일베 혹은 메갈리아의 용어다. 곰은 "문"을 거꾸로 뒤집은 글자, "재기해"는 '재기'라는 이름을 가진 모 시민단체의 대표인 남성이 한강에 투신자살한 것을 비꼬는 말이다. 풀이하면, "문대통령은 자살해 버려라!"는 말이 된다. 이러한 슬로건을 통해 페미니즘 집회를 이끄는 사람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자칭 수구, 보수, 진보 언론 가릴 것이 없이, 언론의 이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찾기가 힘들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부추기는 형국이다. 종북 프레임이 더 이상 힘을 얻지 못하고 무의미해지니 이제는 경제문제와 더불어 페미니즘과 인권 프레임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듯하다. 

'여성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여성 자신이다.'라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남성과 여성, 힘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라는 힘의 논리에 의한 적대적인 구별 짓기로, 서로 적대하고 혐오하는 마음을 결집하여 정치 세력화를 하고 또 더욱 강화시킨다고 해서, 부조리한 차별이 바로 잡히고 평등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 듯하다. 오히려 혐오감과 적대심만 더욱 키울 뿐이다.  구별 짓기는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포함하고 배제하는 형식 논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구별 짓기는 사회, 문화, 학력, 자본, 성장배경과 환경, 인종, 젠더, 이념 그리고 취향 등 다양한 무언가에 의해 결정된다. 

구별 짓는 사람은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구별 지음을 당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구별 짓기로부터 차별이 시작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혐오는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름을 존중할 줄 모르는 차별과 편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타인을 존중할 줄 모른다는 것은 곧 자기를 존중할 줄 모른다는 뜻이며, 자신을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온전하게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육체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은 짐승도 한다. 다만 인간과 달리, 짐승은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종족의 번식을 위해서 본능적인 사랑을 한다. 

주위를 돌아보면, 끊임없이 양성 평등을 부르짖는 데도 불구하고 성의 상품화는 여전하다. 더욱 노골적이고 공공연한 현실이다. TV나 온갖 잡지 그리고 각종 매스미디어, 심지어 인터넷에서 언론 사이트를 열면 어김없이 마주치게 되는 민망한 선정적인 광고 배너들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블랙마켓 전문 조사업체인 하보스코프 닷컴(Havocscope)의 2015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한 해 성산업의 규모는 최대 12.9조 원으로 세계 6위다. 한국 형사정책연구원의 '조직범죄 단체의 불법적 지하경제운영실태(2015)'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매매 시장 규모를 30조~37.6조 원으로 추정한다. 하물며 성(性)과 연관된 기타 문화 산업을 포함하면 그 규모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치에 이를 것이다. 


성(性)의 상품화는 남녀 구별이 없다. 그 소비계층도 마찬가지다. 단지 그 규모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性)을 어떤 형태로든 상품화하는 것은 곧 돈, 다시 말해 자본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개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도덕적인 판단에 우선하여 차이를 인정하고, 다름을 존중하는 열린 사고와 태도가 마땅히 요구된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그 실체를 분명하게 볼 수는 있지만, 막상 손으로 잡으려 하면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구름은 실재한다. 


사회 전반에 구조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부조리는, 그것이 부당한 것이라는 개개인의 인식의 변화로부터 시작하여 사회 전반의 공감대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개혁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원천적인 인식의 전환, 즉 사고방식이 변화되지 않는 한 구조적인 개혁을 이루기란 어렵다는 말이 되겠다. 

더욱이 
브로디외가 익히 통찰했듯이 남성 중심의 지배 의식은 집단 무의식에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까닭에, 남녀 공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성지배적 사고에 익숙하게 젖어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페미니스트로 자처하는 여성 스스로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데에 있다. 개혁 또는 개선은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아울러 오랜 전통 혹은 관습에 의해 
남성지배적 사고에 젖어 있는 여성 스스로의 자각 그리고  일방적인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자기 혁신에는 침묵을 하고, 섬뜩한 혐오감과 살벌한 적개심만 돋보일 뿐, 정작 부조리한 구조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마땅히 문제의식을 가지고 의심하며 또 따져 봐야 한다.  아울러 이러한 관점에서 거의 정신질환에 가까울 정도의 젠더 혐오를 부추기는 사람들, 그리고 성평등의 문제를, 미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가 냉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촛불민심과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의 의지를 가로막는 민주주의의 적, 사회 공공의 적은, 군, 사법, 입법, 행정, 경제, 언론, 교육, 문화, 종교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가 깊고도 넓다. 불의와 불법과 불평등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던 과거의 부조리한 현실에서 마땅히 부르짖어야 할 때는 정작 침묵한다. 반면에 마땅히 힘을 모으고 마음과 뜻을 모아서 사회적 공감대를 이끌어 내고, 불법과 불의와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한 구조와 그 핵심이 되는 인적 적폐를 제거하고 청산해야 할 때 오히려 혐오를 부추기고 편을 가르며 구별 짓는다. 이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의심스럽다.  자신의 마음조차 바르게 하지 못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바로 잡겠다는 말인가? 


 "이(利)란 곧 재앙의 시초다. 마음이 밝지 못한 것은 이(利)가 마음을 가려서이다." 이 말은 조선 후기의 문인 지산(芝山) 심익운 선생의 통찰이
다. 선생은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백성의 재앙 되는 것은 나라 안에 세 부류의 도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른바 '향당(鄕黨)의 도적', '주군(州郡)의 도적', '조정(朝廷)의 도적'이다. 쉽게 말하자면 국가와 정부 그리고 사회 각계각층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탐욕스럽고 불의한 적폐 세력을 통칭하여 세 부류로 나눈 것이다.  "이게 과연 나라인가?"라고 탄식하던 때가 엊그제만 같은데, 이제 겨우 바르게 잡혀가는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그 배경에는 이른바 세 부류의 도적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누군가의 수단이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더욱 치욕스러운 일이다.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세 부류의 도적을 과감히 제거하지 못함은 법 때문이다. 게다가 검찰은 말할 것도 없고, 법을 다루고 집행하는 사법부가 오히려 심각한 부당거래와 부패와 적폐의 온상임이 속속 밝혀지고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옛 시대 같으면 사거리에서 목이 잘려 매달려도 부족할 것만 같은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가히 신이 내린 축복이라 할 만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보이지 않는 곳은 치울 수가 없지만, 최소한 보이는 곳만큼은 치우고 정리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503을 숭모하는 자칭 애국 집회에서 휘날리는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최근 여성 집회에 내걸린 섬뜩한 비인간적인 슬로건은, 공히 마치 벼 논에서 벼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웃자라난 피가 결국에는 무질서 한가운데 이탈하여 자기 모습을 밝히 드러내는 것을 연상케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한걸음 물러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존재한다. 나는 농부가 아니라서 안다고 자신하면서도, 여전히 피를 벼로 곧잘 착각할 때가 있다. 돌이켜 보니 벼가 아닌 피였다는 사실에 후회도 실망도 곧잘 한다. 때로는 자신이 피처럼 여겨질 때도 간혹 있다. 분명한 것은 논에서, 잡초에, 가라지에 불과한 피를 보고도 제거하지 않을 농부는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공공의 적이며 민주주의의 암적인 뿌리는 이른바 세 부류의 도적 들일 것이다. 이들을 제거하는 일은, 비록 지극히 단순하고 사사로운 생각이지만, 옛날 힘들게 농사를 짓는 농부가 논에서 피를 제거하는 작업과 같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20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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