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이미 일컬어졌으나,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앙드레 지드)
최근 여러 곳에서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역사 혹은 과거 인물의 공과에 대해 함부로 평가를 해서는 안된다'는 말과 글 그리고 뉴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자주 접한다. 그 논리의 근거로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하고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을 들고 있다. 심지어 일제 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해방 이후 가까운 현대사까지 이러한 논리로 역사의 평가를 부정하고 왜곡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
논리적으로 그럴듯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참은 아니다. 논리는 단지 어떤 생각이나 주장을 이성적인 사고행위를 통하여 말이 되도록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렇게 믿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그것을 타인에게 주장하여 강요할 때에는 당연히 문제가 된다. 이들이 내세우는 것은 주로 한 가지로 압축된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경험이 남긴 실패 혹은 과실 또는 해악이 아니다. 오직 결과로써의 공적(功積) 혹은 공헌이다.'
이러한 논리는 결국 상황논리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 처한 상황에 따라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의 결과가 중요시되는 것이다. 상황논리란, '어떤 행위의 기준이나 원칙이 없이 상황에 따라 생각 또는 판단과 선택이 좌우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상황논리를 보충하기 위해 반드시 따라오는 논리가 바로 감정 논리다. 감정 논리란,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감정에 따라서 생각이나 판단이 좌우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허물이나 실수가 없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막상 상황에 부닥치면 인간이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식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해야만 하는 사실과 진실의 행위나 문제를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에 해당한다. 원인과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 수반된 수단과 방법을 생략하거나 무시하여 그 공과만을 평가할 수 있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생각건대 이는 주로 뉴라이트의 왜곡된 역사관에 자기도 모르게 동화 혹은 세뇌된 사람들로 추측된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극우 수구 세력으로 대표되는 뉴라이트의 주류는 소위 주사파로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운동권 출신들이다. 굳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알만한 사람들이 뉴라이트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주사파는 주체사상파의 줄임말이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이념으로 지지하며 그에 따라 사회운동과 반미운동을 주도하며 박정희 독재정권에 조직적으로 저항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의 특징은 마치 다단계 조직처럼 점 조직화되어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에 있다. 소위 악성의 친일 극우로 분류되는 뉴라이트들의 뿌리가 이렇듯 참으로 역설적이다.
사람이 변할 수는 있다. 다만 쉽게 변하지 않을 뿐이다. 특히 신념을 가진 사람은 더욱 그렇다. 사람이 변할 때, 간혹 본바탕마저 더러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신념의 극단에서 정반대의 극단으로 더 나쁜 쪽으로 바뀌는 경우에는 본모습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간 것일 뿐이다. 문제의 본질은 이러한 자들에 의해, 선과 악, 옳고 그름, 천함과 귀함, 사랑과 정의 등의 가치와 도리의 기준이 왜곡되거나 뒤바뀜으로써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올바른 가치관이 혼란스러워지고, 결국은 사회가 오염되고 부패한다는 데에 있다. 옛글에 묵자가 염료에 따라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슬퍼하였다(墨悲絲染)' 함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한홍구 교수는 참여정부 출범 이후 변심한 일부 주사파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뉴라이트라는 변종 극우가 정치 사회의 주류 기득권에 편입함으로써, 우리 역사가 본격적으로, 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식민사관과 일본 극우의 역사 이념으로 대표되는 소위 자학사관으로 왜곡되고, 우리나라의 합리적 보수는 마침내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고 진단한다. 결국 반공을 생존 이념으로 삼아 사회 기득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친일 수구 세력이 뉴라이트라는 변종의 사이비 보수, 신종 우익 세력과 합쳐짐으로써 극우로 재편성되고, 그 정당성을 역사의 왜곡 논리로 합리화하는 역설을 낳고 만 셈이다.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할 희대의 악인도 독재자도 가족을 사랑하며, 육체적 혹은 감정적 사랑도 나누며, 독서를 하며, 종교를 가지며, 인간적인 여가생활에 취미 생활도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하는 인간적인 삶을 들어서 그들이 사회적으로 저지른 명백하게 악한 범법 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부정부패에 불법과 불의로 대표되는 사회적 공인 혹은 악명 높은 마피아가 교회에 주기적으로 헌금을 하고, 고해성사를 하고, 거룩한 예배에 참석하며, 참회기도를 하며, 도덕과 정의를 논하며,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구제사업에 동참했다고 해서 그를 선한 사람,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상황 논리에 능한 사람은 비슷한 상황에서도, 자기가 과거에 한 주장이나 의견을 거리낌없이 뒤집는다. 혹 누가 그러한 모순을 기억하고 지적하기라도 하면, 그 때와 지금은 엄연히 다르다는 상황논리를 어김없이 내세운다. 다시 말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라거나,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라고 자기모순을 합리화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혹은 아예 '그런 말 한 기억이 없다', 또는 '결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라는 등 자기 부정·자기기만의 거짓말을 서슴치 않는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러한 상황논리는 단순히 이해관계에 충실한 기회주의자의 뻔뻔스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그저 사이비일 뿐이다. 단순한 기회주의자요, 논리로 무장한 배운 도적에 불과하다. 문제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런 자들의 권위에 맹신하고 이들의 상황논리에 무작정 동화·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있다.
성호 이익 선생은, "역사란 것은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선을 나타내고 악을 숨기지 않은 것은 옛날 역사의 공정함이다. 그런데 후세에 국가권력을 장악한 자들은 선을 권하는 말만 있고 악을 징계하는 말은 없다. 그 이유는 모든 야담(野談)과 기념하여 나타낼만한 공로나 공적에 의거하여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새의 한 날개가 빠지고 수레의 한 바퀴가 없는 것처럼 사심으로 쓰는 상투성을 면치 못했다".라고 통찰하였다.
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선생은, "자각하지 못한 자에게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각을 기피하는 자에게 역사는 과거일 뿐이다"라고 단언한다. 가랑비에도 옷이 젖기 마련이다. 여하튼 진실 혹은 사실의 여부를 뒤로하고, 진위의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는 추상적이고 인간적인 감성 논리 혹은 인문학을 빙자하거니, 왜곡된 상황논리로 사회 혹은 역사비평을 시도하는 자들을 마땅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인류의 보편적 경험의 기록이다. 그러한 보편적 경험은 선과 악, 옳고 그름, 성공과 실패, 명과 암 등등 이 모두가 포함된다. 나무에 한번 박힌 못 자국은 비록 뽑아내어 그 구멍을 때우고 덧칠하여 감쪽같이 감출 수는 있지만, 나무라는 존재 자체가 완벽하게 사라지기 전에는 결코 그 흔적은 없어지지 않는다. 악으로 점철된 어두운 역사도,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비굴한 역사도, 실패로 거듭된 후회스러운 역사도 엄연한 역사다. 당연히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해석된 것이 아닌 사실 그대로의 공정한 기록이어야만 한다. 진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해석된 사실을 가지고 진실이라 결코 말할 수는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건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일 따름이다. 상황에 따라 사슴을 말이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사실로 드러난 진실이 그때는 아니고 지금은 맞을 수는 없는 법이다.
윤기(尹愭 1741~1826) 선생은 역사의 기록에 대해 말하기를, "역사책을 짓는 법은 요컨대 진실을 기록함에 있을 뿐이다. 진실을 기록했다면, 사람의 선악, 사건의 시비, 세상의 치란을 살펴서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검은색과 흰색이 바뀌고 붉은색과 보라색이 섞일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무엇을 통해 당시의 진면목을 징험 하겠는가?(井上閒話) " 라고 지적하였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가늠할만한 최소한의 기준 혹은 원칙을 무시한 상황논리나 감정 논리는 단순히 자기합리화를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자각한 자에게 비로소 역사는 시간의 단위 구분이 필요 없는 생명체"라고 말하는 조정래 선생의 심사를 조금은 이해가 될 듯하다.(2018.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