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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Jun 22. 2018

기필(期必)하다


옛 고전산문을 읽다 보면 가끔 생소한 한자어들을 만난다. 그중에 '기필'(期必)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꼭 이루어지기를 기약함'이란 뜻이다. 기약(期約) 이란, '때를 정하여 약속함. 또는 그런 약속.'의 뚯이다. 정리하면 " 목표를 정하고 반드시 그러하기를 약속함"이 되겠다. 기필(期必)은 약속보다 강한 의미의 맹세에 가깝다. 맹세는 약속을 의지적으로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요, 다짐이다. 그러고 보니 '기필코'라는 말이 떠 오른다. 익숙한 말이다. '기어이', '반드시', ' 틀림없이 '꼭' 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렇듯 일상적인 말도 막상 한자어로 대하면 생소한 경우가 많다.


어째튼 무엇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각오나 다짐, 약속 혹은 맹세는, 그것이 바르고 선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네 옛 선조들은 한결같이  '기필(期必) 하지 마라'라고 가르친다. 이와 비슷한 가르침은 성서에도 나온다. '도무지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오직 너희는 옳은 것을 옳다 말하고, 그릇된 것은 그릇되다고만 말하라. 이러한 바탕에서 나오지 않는 그 이외의 말들은 모두 악으로부터 나온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마 5:33-37, 약 5:12). 인류의 위대한 가르침이나 금언은 추상적이거나 혹은 관념의 사고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삶에서 실재하는 보편적 경험으로 부터 나온 지혜의 말씀들이다.


잠시 생각해 보면, 삶의 현장에서 세상사 한 치 앞을 알 수도 없거니와 자신의 마음조차도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반드시', ' 틀림없이 꼭' 하고 약속하거나 심지어 맹세릏 해 본 경험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누구나 있음직하다. 자신에 대한 것이든 타인에 대한 것이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피치 못할 나름의 사정 때문에 지키지 못할 경우가 허다하다. 시간, 상황, 공간, 거리, 기대, 의지 등 수많은 변수가 여기에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시적인 감정에 이끌려 지키지 못할 약속이나 맹세를 예사로 하고, 결국에는 ' 인간이 또는 세상사가 다 그렇지 뭐..'하고 마냥 핑계될 수는 없는 일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떠나서 누구나 자기 혹은 자기의 삶를 이롭게 하기를 바란다. 심리적 의존 혹은 정신적 노예상태가 아니라면, 삶은 어차피 옳든 그르든 자기중심의 사고를 기반으로 하기 마련이다. 생각도 느낌도 선택도 결심도 각오도 모두 내게 속한 것이다. 그러나 기대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잠시라도 약속이나 맹세가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는 사람의 입장으로 바꿔놓고 생각해 볼 수 있다면, '기필하지 마라', '맹세하지 마라'는 가르침은 엄청난 반성의 무게로 다가온다. 결국 믿음의 문제다. 헛 약속, 헛맹세의 결과는 신뢰의 파괴와 다름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와는 다른 형태로 간혹 일상의 대화 혹은 말과 글에서, 전제나 조건이 붙어 있는 조건부 의사표현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가령, '~하면 ~하겠다'는 형태의 말이다. 마치 타인을 배려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을지라도 이러한 표현의 밑바탕에는 이기적인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 당장은 어찌할 생각은 없고, 차후에 상대의 행동이나 상황 여부에 따라 자기 마음을 정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는 기필이나 맹세보다 삼가고 경계해야 할 말이다. 세상사가 그렇듯이 사람의 마음도 수시로 변하기 마련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제목의 영화도 있다. 이는 영화의 내용을 떠나서 누구나 흔히 경험할 수 있는 말이다. 대상에 대한 현재의 감정이나 느낌이 어떻게 변할는지는 어지간한 신뢰가 없이는 섣불리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다. 


신뢰 그리고 존중과 배려는 참된 인간관계의 근본을 이룬다. 참된 인간관계는 조건이나 계약의 구속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조건이 상실되고 계약기간이 사라지면 끝나는 사무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우기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의도하는 바 어떤 도구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진정성 있는 마음, 즉 참되고 바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나 의지는 조건이나 상황에 구애 받음없이 절로 우러나오는 것으로 한결같기 마련이다. 이는 결국 개인의 인간성(人性) 또는 가치관의 문제와 연결된다. 경험에 따르면 조건부 의사표현의 경우, 십중팔구는 애당초 없었던 일, 혹은 후회스런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이런 말을 듣게 될 때, 애당초 기대는 포기한다.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린다.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 마저 손익계산, 이해타산이 당연시 여겨지는 세상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세상인심이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다.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 지금의 '사랑' 혹은 '존경'의 마음과 말이 내일이면 혐오와 저주와 악담의 마음과 말로 어찌 변할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게 요즘의 염량세태(炎凉世態)다. 하물며 약속이나 맹세는 오죽하겠는가. 실상과 진심은 겉으로 표현된 말에 있지 않다. 조건부적인 이해타산에 따라 일시적으로 나오는 감정은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다. 오늘의 은인이 어제의 사랑이 현재의 우정이 지금의 내 편이, 내일의 원수로 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르고 선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 어린 감정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무리 상황이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외적인 조건이나 상황마저도 초월한다. 그것은 귀로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다. 


백호 윤휴 선생(1617~1680)의 '언설'(言說) 중에 이런 글이 나온다. "말이란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 오직 말할 만한 것을 말해야 하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지 않아야 할 뿐이다... 진실이 아닌 말은 말하지 않아야 하고(無實之言不可言), 바르지 못한 말은 해서는 안된다(非法之言不可言)". 다시 성서의 가르침이 새롭게 다가온다. "오직 너희는 옳은 것을 옳다 말하고, 그릇된 것은 그릇되다고만 말하라. 이러한 바탕에서 나오지 않는 그 이외의 말들은 모두 악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한때 느껴지는 좋은 감정이나 일시적인 느낌은, "이해의 전 단계인 '오해'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법정스님의 심사가 헤아려진다. 옛 선현들의 글을 대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옷깃을 다시 여미게 된다. 기필(期必)이란 말을 풀어내면서, 기필하는 것도 많고, "이해의 전 단계인 '오해' "로 가득 차 있는 듯한 좁쌀만 한 가슴이, 미처 자신을 합리화할 겨를도 없이 뜨끔거린다.

(2018.1.18 제목 '이해의 전 단계'로 쓰고, 2018.6.22 제목 바꾸고 다시 고쳐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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