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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Nov 12. 2018

독서의 계절

많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읽은 사람들은 당연히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은 않다. 독서는 마음에 단지 지식의 재료들만 공급할 뿐이다. 우리가 읽은 지식들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사색이 만들어 준다.』

-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가, 1년에 1000권 독서, 3년에 1000권 독서... 운운하는 상업 작가들의 독서법에 관한 책들을 보았다. 그중에 그럴듯한 일리는 있지만, 다소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되는 한 책의 저자를 보니 역시나 일본인이다. 하긴  일본은 출판문화가 발달한 나라다. 잠시 선자리에서 완독이 가능할 정도로 글보다는 그림이 많은 책들이 부지기수고, 심지어 지하철  피크타임에 잽싸게 자리 잡는 법도 책으로 나올 정도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다. 


그러고 보니 블로그에서 수천 권의 도서목록과 서평을 포스팅하는 블로거들도 종종 본다. 보통은 그러려니 하고 그냥 지나친다. 수백수천 권의  독서를 했다는 이들이 남의  글, 남의 생각을 평하고 논하거나, 또는 남의 생각을 가지고 자기 생각을 끼어 맞추거나, 혹은 어줍잖은  상상력을 애매모호하게 펼치는 것 이외에, 분명한 자기 생각이 담긴 제대로 된 글 한편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제법 긴 세월, 책방에서 서서 종종 눈치 독서를 하느라 속독이 자연스레 몸에 배었다. 덕분에 책방에 한 시간 정도만 서서 훑어봐도 수십 권을 예사로 본다. 책 표지의 요약된 서평과 목차를 쓰윽 살피고, 빠르게 책장을 넘기며 대충 훑어보는 식이니 가능한 일이다. 이런  방식이라면 꾸준하게 지속할 수 있는 인내와 의지를 갖고, 마음만 먹는다면 1년에 천여권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겠다. 이처럼 내가 추구하는 정보를 찾고 보는 독서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나는 머리가 둔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재능마저 빈약하다. 그래서 글 한편을 쓰기 위해 최소한 책 서너 권을 뒤지고, 조금 어려운 개념이면 논문까지도 뒤진다. 그러나 내가 글 한편을 쓰기 위해서 아무리 책을 서너 권 보고 논문을 여러 편 봤어도 제대로 읽은 것은, 관심을 가지고 몰입하여 읽은 책 한 권뿐이다. 게다가 분명한 주제와 자료가 주어졌음에도 스스로 마음에 흡족한 글 한편 써내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정작 쉽게 나오는 글은 무언가 강력한 도전을 받거나 자극이 주어졌을 때, 우러나온다. 그래도 박약한 재능이라 고쳐쓰기를 시도 때도 없이 한다.


그런데 성서의 잠언이나 전도서, 불교 경전, 사서오경, 제자백가, 유대인들의 탈무드, 중국 고대 설화집과 민담집, 인도의 경전이나 설화, 북미 인디언들의 설화나 잠언, 제3세계의 작품 등등, 혹은 성장하면서 흔히 웃어른들이나 주변의 꼰대들에게 숱하게 들었던 소위 '뻔한 소리'들을 추려내어, 오늘에 맞는 옷을 입히고 각색하여 마치 제 것처럼 철학자, 작가, 어른, 스승 행세하는 이들을 흔하게  본다. 이른바 언론 문화권력에 진입할 수 있는 정치적인 능력이 있다면, 어떤 차원이든 자신을 상품화하여 그들과 동화(同化)할 수 있는  변신의 재주만 갖출 수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소리'를 문학이나 예술로 잘 포장할 수 있는 글재주만으로도, 얼마든지 대접받으며 먹고사는 것이 가능하게 된 세상이다. 단 이것도 간도 쓸개도 내어주며 줄을 잘 서야 그나마 가능한 일이다.


성호 이익선생(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구하는 바가 있어 글을 읽는 자는 아무리 읽어도 소득이 없다."라고 통찰하였다. "구하는  바가 있어서 글을 읽는 것"을 '유구독서(有求讀書)'라고 한다. 그 폐해에 대해 선생은 이르기를 "읽기를 멈추기만 하면 캄캄해진다. 마치 소경이 희고 검은 것을  말하면서도 그 희고 검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 말하는 바가 귀로 들어와서 입으로 나오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비유하였다. 


시험공부와 같은, 특정한 목적을 통과하기 위해서 하는 독서, 다시 말해 내용의 일부분을 선별하여 암기하는 독서가 곧 유구독서에 해당된다. 한편 내가 글 자료를 찾기 위해 관련 목차를 뒤지고 해당 부분만을 찾아서 읽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발췌 독서다. 책의 개요를 쉽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서평 또는 책 표지의 나오는 홍보용  발문이나 작가 서문을 훑어보는 것에 국한된 독서, 책의 개요와 주제를  요약한 것을 찾아 읽는 요약 독서 등등 이 모두가 유구독서에 해당된다.


흔히 말하기를,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다'라고 한다. 뻔한 소리 같겠지만, 양식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필수 자원이다. 이런 점에서 독서는 마음을 성장시키고 사고능력을 키워주는 좋은 자원에 해당한다. 하지만 마음의 양식이 될 수 없는 자원, 오히려 개인에게 해악을 끼치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해치는 자원도 세상에는 무궁무진하게 존재한다. 이것을 구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정보와 지식이다. 지식의 사전적 설명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다. 정보는, 사물이나 대상의 관찰, 측정, 평가, 분석 등을 통해서 구축된 사실자료를 말한다. 따라서 지식은 정보를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고, 정보는 지식의 기초가 되는 관련 자료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호사설의 저자는 성호 이익이다'. '성호 이익은 조선 시대의 학자다.' 이는 지식이라기보다는 단순 '정보'에  해당한다. 정보는 특정 대상, 사물 혹은 상황에 관한 단편적인 사실자료다. 반면에 성호 이익은 어떤 인물이며, 성호사설의 내용 및  그 사상이 어떠한지 인과관계를 포함하여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아는 것은 '지식'이다.  지식이 다른 대상, 사물,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지적 체계를 이루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사고력을 그리 요하지 않는 정보와는 달리 지식에 사고력이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종합해 보면,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통합하여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아는 것을 '지식'이라 하겠다. 지식은 축적이 되면 스스로 성장하고 발전한다. 어떤 점에서는 성장하고 발전된  지식의  역량을 '지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정보의  중요성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효용가치에 있다. 그 가치를 다하면 정보는 더 이상 유용한 것이 못된다. 그래서 목적을 이루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다. 마치 새로운 기능을 탑재한 신제품 전자 기기를 사용하기 위해서 사용설명서를 보는 것과 같다. 또한  단순히 보는 것, 읽는 것과 사고력을 요하며 읽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심리적 욕동이나 욕망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단순히 보는 것은 일시적인 욕구이나 욕동의 충족은 될 수 있을지언정, 마음의 양식은 될 수 없다. 


가끔  지나치다가 TV 화면에서 누가 누군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되는 젊고 어린 여자 아이들이 반쯤 벗고 나와서 몸을 흔드는 광경을 본다.  멀쩡한 내 눈을 '도다리'처럼 쏠리게 만드는 그 광경은 내 숨겨진 므흣한 본능의 욕구를 일시적으로 건드려 잠시 눈의 즐거움을 줄지언정, 결코 마음의 양식은 되지 못한다. 그 시간, 그 장소만 지나치고 나면, 그 즐거움과 기억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유구독서는 목적을 충족하면, 그 효과는 소멸되고 만다. 다시 말해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독서, 지식을 전시하고 팔기 위한 자료를 구하기 위한 독서, 논증 또는 인용자료의 수집에 국한한 독서, 또는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고 인정받기 위한 독서 행위, 책이나 책 페이지 전체를 인증샷으로 부각하는 행위 등등, 이러한 독서 습관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의 한 부분만을 차지할 뿐, 정작 지식과는 모두 거리가 멀다. 


혹자는 말한다. 어떤 분야든지 천권 이상의 독서를 한다면, 학문이든 문학이든 한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지식이 일정 이상 축적되면 사고능력이 괄목하게 성장하고 발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달에 한 권 이상  60 평생을  쉬지 않고 정독을 하며, 꾸준히 독서한다 해도 일반 생활인들은 채 일천 권을 채울 수 조차 없다. 단순하게 계산을 해도 그렇다. 이는 학문과 문학을 전업으로 하는  문인, 학자일지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물며 사회생활에서 서로 부대끼며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일반인들은 오죽하겠는가? 만일 그 절반만 가능하다 해도 문학이든 학문이든 생애에 뭔가 남다른 성과를 이루어낼 것이다. 이렇듯 누군가의 표현대로 '합목적적으로 몰입하여 읽는 독서'는 어렵고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거듭하는 말이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특정 주제와 관련된 서너 권의 책과 함께 서너 편의 논문만 제대로 읽으면, 전문가가 아닐지라도 타인의 생각이 아닌, 분명한 자기 생각이 담긴 장문의 글 한편 정도는 쓸 수 있다. 또 마음만 단단히 먹는다면 강좌까지 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특정 주제를 논한 20여 권 이상의 책, 20여 편이상의 관련 논문을 제대로 읽어낸다면, 자기 이름을 건 웬만한 논문 한편 정도는 써낼 수 있다. 단, 제대로 몰입하여 독서를 했다는 것이 전제가 되었을 경우다.


글은 추상적인 관념 혹은 상상력만 가지고는 안된다. 상상력은 어린아이들의 특기다. 어린아이들의 상상력을 논평하여 논리를 따지고 문학적이라거나 감동적이라 분석하지 않는다. 단지 흥미로워하고 그 순수함을 재미있게 즐길 뿐이다. 어떤 장르든 간에 제대로 된 글이 되려면, 사실 자료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사색의 과정(관찰과 연구) 그리고 그것을 적절하게 풀어내는 사고력 또는 재능이 요구된다. 남의 것을 베끼고 각색하여 마치 제 것인 양 꾸미는 일은 쉽다. 하지만 경험적이든 과학적이 든 간에 글은 생각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는다. 


인간사,  세상사의 모든 것을 전부 경험하거나 알 수 있는 방법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가치는 소중하다. 올바른 독서는 우리의 제한된 인식과 사고력을 키울 뿐만 아니라 확장시킨다. 식견을 넓힐 뿐만 아니라 마음과 인격을 더 나은 성숙한 단계로 이끈다. 사람을 사람답게 좀 더 나은 인격으로 성장하고,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는 지성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 곧 마음의 양식이다.  뛰어난 암기력으로 숱한 정보를, 수많은 방법 서설들을 머릿속에 아무리 쌓아 놓아도 그것이 지식의 역량으로 함양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마음의 양식이 되는 조건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인격과 학문 혹은 인격과 지식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현실적인 실례를 들자면, 여담으로, 늘 가지고 있는 의문이지만, 특히 요즘 들어 우리 옛 고전을 읽고 여러 자료들과 글들을 참고하면서 나름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세속 권력의 시녀가 되어 물신주의와 상업주의 가치관에 찌들어 버린 철학자와 심리학자, 문인, 학자 그리고 종교인들은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소위 고전을 탐구하고 인간됨에 관한 공부를 한다는 인문학자라 하는 이들, 특히  한문학을  연구한다는 이들과 유학을 연구하고 경전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가르치는 훌륭한 말과  글, 바람직한 가치들과는 다르게, 막상 일상에서 드러나는 그들 자신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어떤 개인의 인격이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비판할 자격이나 권리는, 내게 전혀 없다. 단지 다르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마땅히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나도 그들과 특별히 다른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이들의 삶이 대중을 가르치고 인도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공인의 위치에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일반화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이기적인 개인주의자들이며, 탐욕스러울 정도로 이익 지향적이며, 수구 꼰대의 권위적 경향성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진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언론이라기보다는 문화 권력 집단이요, 상업적  정치집단이라고 봐도 무방한, 조중동의 문화 항목과 오피니언 항목에 주요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다면 어김없다. 얼핏 보면 정의롭고  바른말을 하는 듯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피하고 은근슬쩍 곡학아세 하거나, 또는 단지 관망자로서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그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공자가 '덕의 도적'이라 불렀던 향원 부류들이 이에 해당한다. 바로 이들이 요즘 흔히 말하는 극우 보수(수구)의 이념적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세우는 가치관과 말과 삶이 실상과는 전혀 다른 자들이다. 이와 반대되는 사회 정치적 이념을 가진 부류에도 이러한 이들이 제법 보인다. 이들이 보이는 공통된 특징은, 같은 우리말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말 자체가 아예 안 통한다는 데에 있다. 굳이 칼 포퍼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전혀 다른 양극단의 우월한 집단에 위치한 이들은 묘하게도 닮아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꽤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 일반화시키기엔 무리하다는 것을 잘 안다. 


독서하고 배우고 공부하고 또 가르치는 것과 다르게, 내심으로 지향하는 무엇 때문에 예사로 사슴을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기만이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이 내세우는 인간됨, 자유, 평등, 정의, 평화, 사랑, 도덕, 윤리 등등의 개념과 가치도 각각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아는 상식이나 가치가 저들이 강조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에서 표현한 것처럼, 똑같이 자유와 평등을 말할지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우월한 특권, 남다른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그들이 신앙한다고 하는 하느님, 신(神) 일지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하느님이요, 신일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2장)에서 이렇게 질책한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너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거듭 말하지만, 인격과 학문, 인격과 지식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학문과 지식의 정도만을 가늠하여 참된 사람의 품격(인격)을 기대하기는 무리한  일이라 하겠다. 근본부터가 다른 것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다만 다름을 인정하되 옳고 그른 것을 바르게 분별할 따름이다. 선생은 많은데, 참 스승이 귀한 세상이다. 핵심은, 자가당착의 자기모순을 경계하고 단순한 지식 정보나 지식 자료의 축적이 아닌 마음의 양식이 되는 양질의 독서를 원한다면, 말과 글과 사람을 동일시해서는 안되며, 가능하다면 책의 저자를 가려서 읽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인류에 의해 검증된, 고전의 독서는 매우 각별하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블로그를 하는 나도 유구 독서, 발췌 독서를 꽤 하는 편이다. 인용하거나 언급한 저 수많은 책들 중에서 제대로 몰입하여 읽은 책은 불과 수십여 권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나이가 되도록 내가 독서한 책이 얼마나 되는가를 가만히 따져 본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박 겉핱기식으로 훑어본 책은 숱하게 많다. 어린 시절 책가방 가득 채워 수업시간에 몰래 읽었던 무협지를 제외하고, 밤을 새워가며 머리를 싸매고 가슴이 울리도록 읽은 책을 애써 떠올려 보려니 고작 십 여편을 겨우 채울 수 있을까 말까 한다.  아예 기억마저 나지 않는다. 행여 누군가가 참고할만한 목록을 주욱 열거해 준다면, 아마 통틀어 50여 권이 채 안될 것이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여울목에 몰린 멸치 떼 같은 생(生)'에서 소인배를 간신히 면한 일천한 졸보로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한다.

 

성호선생의  '유구독서'란 말의 의미를 떠올리면, 안 그래도 옹졸하고 그리 뻔뻔하지 못한 졸보의 마음이 움츠러들고 한편으로 부끄러워진다. 앞서 인용한 사도 바울의 말에 이르면, 남을 향한 손가락은 다시 내게로 돌아오고, 말문이 턱 막힐 정도로 더욱더 부끄러워진다. 여하튼 책 읽기 좋은 '독서의 계절'이다. 이 가을엔 제대로 된 양질의 책 한 권이라도 잘 챙겨서 몰입하여 읽고자 한다. 그래서 내 비록 스스로 졸보는 면할 수 없을지라도, 내 알량한 지식의 밑자락에 매달려 있는 부끄러움만은 어찌 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침 바람이 제법 차갑다. (2016.9.25 쓰고 2018. 11.12 다시 고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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