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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Jan 11. 2019

요동의 돼지

"거듭 말하지만 위험은, 그대가 모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다." -장자끄 루소, '에밀'-


후한서(後漢書) 주부전(朱浮傳)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의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반란군(叛軍)을 토벌하기 위해 하북(河北)에 포진(布陣)하고 있을 때, 어양태수(漁陽太守) 팽총(彭寵)은 3000여 보병을 이끌고 달려와 가세하여 광무제를 도왔다. 또 팽총은, 광무제가 옛 조(趙) 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을 포위 공격할 당시 군량 보급의 중책(重責)을 맡아 차질 없이 완수하는 등 여러 번 큰 공을 세워 후한 건국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후한(後漢) 건국 직후, 광무제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팽총은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일컫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알게 된 대장군 주부(朱浮)는 팽총에게 그의 비리를 꾸짖는 글을 보냈다.


"그대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옛날에 요동 사람이 키우는 돼지가 대가리가 흰 (白頭) 새끼를 낳자 이를 상서롭고 진귀하게 여겨 왕에게 바치려고 하동(河東)까지 가 보니, 그곳 돼지는 모두 대가리가 희므로 크게 부끄러워하며 황급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금 조정에서 그대의 공을 논한다면 폐하(光武帝)의 개국에 공이 큰 군신 가운데 저 요동의 돼지에 불과함을 알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팽총은 토벌 당하고 말았다.


'요동의 돼지(遼東豕, 요동시)'라는 한자 성어의 유래가 되는 이야기다. 요동지시(遼東之豕), 요동백시(遼東白豕)라고도 한다. 출전의 일화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요동의 돼지'는, "견문이 좁고 오만한 탓에 자신의 하찮은 공(功)을 드러나게 으쓱대며 자랑하는 사람"을 비유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표준국어 대사전에는, '견문이 좁아 세상 일을 모르고 저 혼자 득의양양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그 뜻을 풀이하고 있다.


최근 유튜브나 언론, SNS와 블로그를 포함한 인터넷 공간에서, 자기가 아는 것만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확신하고 주장하는, 지극히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은 물론 눈으로 보는 것마저 그 진위를 의심할 지경에 이른 팍팍한 현실에서, 세상 만사 인간사의 모든 진실과 정의(正義)와 해법이 오직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요동의 돼지' 상황이 따로 없다. 


고대 그리스의 격언에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이 있다. 말하는 것으로만 따지자면 예수·공자·부처에 버금가는 성인(聖人)의 언설(言舌)이요, 도덕군자에다 정의로운 애국·충렬·지사요,  노자·장자에 견줄만한 정도의 초인적 휴머니스트의 마음이며, 복잡다난한 세상사의 문제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해결하는 전지적 신(神)의 권능이다.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함부로 판단하거나 강제하거나 억압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자유다.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데는 자유가 아니라, 나름의 도덕 원칙에 입각하여 자신의 언행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자유, 즉 자율이 요구된다.  '사탄(악마)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후 11:14)는 말이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그 말 뒤에 가려져 있는 '말하는 사람의 실체' 다. 다수가 주장하면 사슴도 말이 되고, 허구도 사실이 되며, 거짓도 진실이 된다. 생각하기를 귀찮아하고, 의문을 가지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거짓을 무턱대고 진실로 확신하는 이러한 ‘다수의 힘’은, 사람들의 합리적 이성과 비판적 사고의 기능을 마비시켜 온갖 허위·조작 정보, 가짜 뉴스를 퍼다나르게 만드는 마중물이 된다. 이성에 입각한 비판적 사고가 마비된 이러한 사람들에게서는,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헤아려 본다거나, 정보의 내용에 의문을 가지거나, 정보의 사실과 거짓 여부를 헤아리거나,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자기가 모르는 것은 아예 부정한다.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막말과 혐오와 저주는 일상다반사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기준이 아닌 주관적 인상을 바탕으로, 대상을 직관적으로 비평하려고 하는 태도'를, 문학에서 '인상비평(印象批評)'이라고 한다. 인상비평은 대상을 통해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구애됨이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비평의 대상이 작품이나 사물 또는 상황이나 사안(事案)이 아닌 인간에게 초점이 맞춰질 때 문제는 달라진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간에 인간을 향한 인상비평은 자칫하면 편견과 상호 간의 오해와 갈등의 불씨가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비평(批評)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아름다움·추함·선악·장단·시비를 평가하여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고, '비판(批判)'의 사전적 의미는, "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함'의 뜻으로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평가를 하는 것"이다. 비판(批判)과 같은 뜻으로 흔히 혼동하는 비난(非難)은,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을 뜻하는 말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비평 혹은 비판은 그 사실적 근거가 명확하고 충분해야 하며, 또 객관적이고 구체적이어야만 한다. 


"30분 내내 말씀드린 것이라... 새로운 답이 필요할 것 같지 않습니다." 어제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히지 않고, 질문의 화두로 내건 경제 정책의 문제보다는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 즉 대통령의 역량과 자질을 문제 삼는 듯한 한 기자의 당돌한 질문에 대한 문 대통령의 현답이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 같았으면, "그냥 막 나가자는 것이지요?"라는 직설적인 답변이 나올 만한 상황이다. 지난 막장 정권에서, 아주 다소곳한 표정으로, 정해 준 시나리오에 맞춰 열심히 받아쓰기를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과거 오바마 방한 때 기자회견 중에 한결같이 벙어리 행세를 하던 기자들의 모습 또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정말 새삼스럽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쉽게 말해, 자신이 사회적으로 어떤 집단, 어떤 위치, 어떤 계급 혹은 계층에 속하는가에 따라 생각과 관점이 전혀 달라진다는 마르크스의 철학적 사유는 경험 상 매우 큰 설득력을 가진다. 여담으로 개는 자기에게 목줄을 걸고 잠자리를 마련해주며, 끼니마다 밥을 주고 자기가 싼 똥까지 치워주는 사람을 주인으로 따른다. 개는 인간이 가장 먼저 길들인 동물이라고 한다. 사람을 마주한 개가 요란하게 짖으며 길길이 날뛰는 것은, 자기 뒤에 주인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의 이면에는, 무엇보다 주인의 관심을 끌고 인정받기 위한 심리적 동인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럴 때 개의 행위를 자제시키기 위해 달래고 토닥이는 주인의 손길은, 오히려 개의 공격성을 더욱 강화하는 기폭제가 된다. 각설하고 사람의 속은 주관적으로 짐작하거나 추측할 수는 있어도, 단정적으로 섣불리 판단하거나 함부로 평가하기는 아주 어렵다.  그러나 직접 대면의 상황에서는 다르다.  말하는 태도와 자세, 표정, 눈빛, 음성 등을 통해 질문자의 심기와 의도를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지만, 백번 보는 것보다 직접 한번 겪어보는 것이 더 낫다. 한갓 아둔한 필부에 불과한 내가,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장에서 본 한 기자의 불편한 질문에서 '요동의 돼지'를 연상하고 '짖는 개'를 떠올리는 것은, 내 알량하고 좁은 소견 탓만은 아닌듯하다.


"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타인의 존재에 관한 질문은 한 사람의 신원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의 표현인 것만큼이나 상황에 따라 분노, 두려움, 놀라움, 유머, 조롱의 의미도 전달할 수 있다. 비난을 받을 때 정상적인 인간은 어떤 편견을 고수하는 반응을 보이며, 편견은 질문을 오염시키고 질을 떨어뜨린다." 인용한 이 문장의 내용은 어디선가 책에서 본 글을 기억나는 대로 대략 간추린 것이다.  누군가가 아무런 인과관계없이 다짜고짜 자기를 비난하거나 비꼰다고 느낄 때, 저항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사람의 진심은 자신의 주관 혹은 직관으로 함부로 또 섣불리 추측하여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술이란, '사물을 잘 다룰 수 있는 방법이나 능력'을 뜻한다. 기술은 배우고 익히고 부단한 연습과 훈련을 통해 자연스레 늘게 마련이다. '사랑은 기술'이라고 통찰한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관계에서 의사소통의 기술, 경청의 기술, 공감의 기술 그리고 존중과 배려 또한 중요한 기술이다. 아울러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 그리고 시의적절하게 올바른 질문하는 것  또한 마땅히 배우고 익혀야 할 중요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질문과 관련한 개인적인 여담으로 토론의 자리든 배움의 자리든 간에 공개적인 장소나 상황에서 어떤 주제에 관해 질문을 할 때, 자신이 왜 의문을 가지는가에 대한 뚜렷한 동기나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해답 혹은 의견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헤아려 본 적이 있다. 질문을 아예 안 하는 사람들은 일단 논외로 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상 대략 몇 가지 유형으로 간추릴 수 있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나름 정리해 본 유형은 대략 다섯 가지로 간추려진다.  첫째 분명하게 잘 이해되지 않아서, 둘째 자신이 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서, 셋째 자신이 아는 것이 맞는 것인가 확인하기 위해서, 넷째 상대를 저울질하기 위해서 즉, 상대의 진심을 떠보거나 혹은 판단하고 평가하기 위해서, 다섯째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를 경우 논쟁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다시 말해, 반박 혹은 공격의 빌미를 삼기 위해서, 등이다.


경험에 따르면, 공개석상의 질문은 주제와 내용에 관한 깊은 관심과 남다른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때문에 첫째 유형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나름 정성껏 답변하여 도와준다. 다만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할 일이다. 나머지 경우,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기 전에 반드시 역질문하여 질문자의 의견과 질문의 동기를 분명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역질문의 방식은, 둘째와 셋째 유형의 경우, 질문자 스스로 원하는 것을 충족할 수 있게 도와주는 효과가 있다. 넷째, 다섯째의 경우로 확인되면, 질문자가 궁금해하는 내용이 잘 정리된 도서 혹은 논문을 권함으로써 자칫 소모적인 논쟁으로 번질 수 있는 여지를 사전에 차단하여 갈등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다.


물론 참고 도서와 자료 목록은, 답변자가 이미 그 내용을 파악한 것으로 일상적으로 챙겨두고 있다는 전제에서 그렇다. 경험상 강제성·의무감을 요하는 과제가 아닌 한, 진정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 이외에 추천한 도서나 논문을 정독하고 어떤 형태로든 피드백을 주는 사람은 열에 불과 한 둘 정도다. 동기와 목적이 다른 무언가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스스로 안다고 확신하는데 굳이 머리 아프게 다른 자료들을 뒤적이며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하물며 취향 혹은 관심 자체가 다르다면 말할 필요도 없다. 의문을 요하고 자기 생각을 정리해야만 할 정도로 깊이 있는 사유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정말 귀하다.


"질문을 구성하는 힘은 인문정신의 핵심이다.(...) 우리 대부분은 인문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도 심각하게. 우리는 의심할 줄 모르고, 질문할 줄 모르며, 욕망 앞에서 솔직해질 줄 모른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임백준 칼럼중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내 손가락 하나가 가리키는 방향 아래에 잔뜩 힘이 들어간 나머지 세 손가락은 한결같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을 본다. 생각을 나름 정리할 때마다 나는 늘 느낀다. 나는 여전히 부끄러운 게 많다. 돼지를 보듬고 황급히 고향으로 발걸음을 되돌리는 저 요동사람처럼 말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의 한 대목이다. "어느 날 후미진 숲속에서 우연히 토끼와 곰이 마주 보고 앉아 똥을 누게 되었다. 토끼가 볼일을 다 보고 일어서려는데, 여전히 쭈그리고 앉아있던 곰이 토끼에게 질문했다. "토끼야, 뭐 빠진 게 없니?"  토끼는 엉거주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없는데? 왜?" 곰이 말하기를, "볼일 보고 밑을 안 닦았잖아?" 토끼는 "아... 난 또 뭐라고 괜찮아"  그러자 곰이 다시 토끼에게 물었다. "밑도 그렇지만 네 털에 똥이 묻으면 기분이 X 같지 않니?" 토끼는 "상관안해" 하고 쿨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곰은 토끼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는 자신의 밑을 말끔하게 닦았다."  (201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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