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웨인의 선택
흔히 '아더왕'하면 원탁의 기사가 떠오른다. 아더왕을 필두로 원탁의 기사들 이야기에서 기사도 정신, 대범함, 충성심, 명예 그리고 용맹하고 장중한 그들의 무용담은, 읽는 이에게 재미와 감동을 함께 선사한다. 원탁의 기사 중에서 두드러진 인물은 거웨인과 랜슬롯이다. 이들은 아더왕 못지않은 전설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특히 '거웨인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야기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버전에 따라 약간씩 전개가 다르긴 하지만,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더왕이 적국의 포로가 되었다. 적국의 왕은 아더왕의 용맹에 존경을 표하고,아더왕을 처형하지 않는 대신에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왕은, " '모든 여자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찾아오면 자유롭게 놓아줄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처형할 것이다. 대신에 1년의 시한을 주겠다."라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아더왕을 대신하여 기사 거웨인이 해답을 찾는 여행을 떠났다.1년이 거의 다 될 무렵, 거웨인은 늙고 추악한 모습의 한 마녀를 만난다. 다행히 마녀는 거웨인이 찾는 해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녀는, 거웨인이 자신과 결혼해주면 해답을 가르쳐 주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거웨인은 추한 마녀와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고 해답을 얻는다. 마녀가 가르쳐 준 해답 덕분에 아더왕은 자유를 되찾는다.그 해답이란, '여자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도하는 것'이었다.
한편 결혼 첫날밤을 맞이하여 침실에 들어간 거웨인은 깜짝 놀란다. 마녀가 아닌 아름다운 미녀가 거웨인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녀는, 자신이 하루의 절반을 미녀 혹은 추악한 모습의 마녀로 살아야만 하는 저주에 걸려 지금껏 살아왔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그녀가 밤과 낮 둘 중의 어느 쪽에 미녀로 있기를 원하는지, 거웨인이 선택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거웨인은 주저 없이 말했다. "변하는 것은 모든 여자가 간절히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당신이니,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 옳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마녀는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하루 중의 반은 마녀, 반은 미녀로 살기는 싫습니다. 나는 항상 원래의 내 모습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저주가 완전히 풀렸다. 마침내 거웨인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축복을 얻는다. 덤으로 낮 동안에는 힘이 2배가 되는 축복까지 받았다.
이 이야기가 특별한 것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존중'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남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주도적인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겉모습이나 외적 조건에 상관없이,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거웨인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가히 모범을 삼을 정도로 훌륭하다. 또한 인간관계의 본질을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웨인의 인격을 제대로 간파하고, 남편으로 점찍은 마녀 역시 현명하고 지혜롭다.
추한 노파와 기사 이야기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이 이야기는 다양한 버전으로 재구성되고 각색된 이야기다. 그런데 이야기는 존재하는데, 그 출전을 밝힌 자료가 전무하다. 개인적인 조사에 의하면, 아더왕과 관련된 설화나 구전, 그리고 소설 그 어디에도 이야기의 출처를 찾아볼 수 없다. 이 이야기는 국내 청소년문고의 아더왕 시리즈에 실려 있다.
다만 이 이야기의 원전이라고 추측할 만한 저작은,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나온다.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바쓰 댁 이야기'에 등장하는 '추한 노파와 기사'(the Loathly lady and the Knight) 이야기가 그렇다. 그런데 배경과 등장인물과 구성은 앞의 이야기와 비슷하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이는 마치 성인 어른들의 경계와 교훈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서구의 잔혹동화가, 현대에 와서 어린이들을 위한 순수동화로 각색되어 아름다운 이야기로 탈바꿈한 것과 일면 닮아 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더 왕의 한 기사가 인적이 드문 들판을 거닐다가, 한 처녀를 발견하였다. 기사는 처녀를 강간하였다. 소문은 금방 백성들에게 퍼졌고, 기사의 만행은 백성들을 격분시켰다. 결국 아더 왕에까지 탄원이 올라갔다. 기사는 붙잡히고,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봉착한다. 이때 아더왕의 왕비가 개입하여 기사에게 반성과 회생의 기회를 준다. 왕비는 기사에게, "일 년 하루의 시간 동안 여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한 해답을 찾아오면 사형을 면하게 해주겠다"라고 조건을 제시하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인 기회를 얻은 기사는, 해답을 찾아 방방곡곡을 헤맸다. 그러나 1년이 다 지나도록 만족할만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절망에 빠진 기사는 우연히 늙고 추한 노파를 만났는데, 기사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그 노파는 해답을 안다고 자신하였다. 다만 자신을 기사의 부인으로 맞아주면 해답을 알려주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사는 이에 동의하였고, 마침내 기한 하루를 남기고 왕비에게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목숨을 건진다.
노파가 가르쳐 준 해답은, "여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남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였다.
기사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다시 절망에 빠졌다. 추한 노파와의 결혼 약속 때문이다. 결혼 첫날밤의 침실에서 노파를 맞이한 기사는 현실을 뼈저리게 통감한다. 부인이 너무 못생겼고, 늙고 추한 데다가 출신마저 천한 계층의 사람임을 재차 인식했기 때문이다. 기사는 몸서리치며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슬퍼했다. 그런 기사에게 노파는 이렇게 위로하였다. "주님의 은총과 인간답게 사는 것 그리고 가난하고 낮은 신분이 오히려 재산보다 가치 있을 수 있답니다. 내가 못생기고 늙었기 때문에 외간 남자와 놀아날 걱정도 없고 그 때문에 창피를 당할 염려가 없지 않겠어요. 그뿐인가요. 내가 추하고 못생긴 것이 오히려 정조를 지키는 훌륭한 방어막이 될 수 있잖아요." 그러고는 비록 자신이 추하고 못생겼지만 '소박하고 진실된 부인이 되는 것'과 '젊고 예쁘지만 정숙하지 못한 부인이 되는 것', 이 둘 중 한 가지를 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기사에게 준다. 자포자기의 심정에 빠진 기사는, 노파에게 "당신 스스로 선택하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파는 남편의 말에 아주 기뻐하며,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탈바꿈하였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행복 속에서! (In perfect bliss!).
자율(autonomy) 혹은 주도권(hegemony)
앞의 거웨인 이야기와는 다르게, 이 이야기엔 명예 혹은 권선징악 같은 정의의 실현이나 도덕적 교훈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인간의 욕망과 그 적나라한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뿐이다. 다만 이야기의 중심주제로 '자신이 주도하는 삶'은, 그 내용에서 앞의 거웨인 이야기와 비슷하다.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중심 주제에서 거웨인 이야기가 '자율(autonomy)'에 가깝다면, 바쓰댁의 기사 이야기는 '헤게모니(hegemony 주도권, 패권)'에 가깝다.
'자율'은 칸트 윤리학의 중심개념이다. 사전에 '자신의 욕망이나 남의 명령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객관적인 도덕 법칙을 세워 이에 따르는 것'을 '자율'이라고 설명한다. '헤게모니(주도권)'는 '어떤 집단을 주도할 수 있는 권력이나 지위'를 뜻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행사하는 모든 형태의 영향력까지 포함한다. 헤게모니(주도권)의 특징은 다수의 동의를 통해 형성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물리적 힘을 바탕으로 하는 강압적 지배력과 구별하여 '정치적 지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율이든 주도권이든 최종의 목적, 즉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다시 말해, 무엇을 추구하든지 간에 인간다움 혹은 인간성(인격)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과, 욕망의 충족이나 외적인 어떤 가치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정의(正義)적 차원에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자기 주도적인 삶'을 원하는 사람에게만 국한하는 말이다.
바쓰댁 이야기에 나오는 기사 이야기는, 바쓰댁의 경험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여기엔 재산, 사회적 지위, 부부생활을 포함한 성적(性的) 자유의 문제까지도 포함된다. 바쓰댁은 5차례에 걸친 결혼생활을 거치면서 죽은 전 남편들이 남긴 유산으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즉, 바쓰댁은, 과정이야 어떠하든지 간에, 경제적으로 완전한 자립 능력을 가진 여인이다. 유럽의 중세시대는 기독교 전통의 가치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남성 중심의 위계와 권위주의가 지배하던 사회다. 이런 점에서 바쓰댁 기사 이야기는 단순한 풍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가치체계에 반하는 탈남성주의, 탈위계주의의 진보적 특성이 찾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위 체계에 반하는 진보적 생각이, 무자비한 종교재판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았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 이유는 해학과 풍자로 구전되는 이야기 속에 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쓰댁 이야기가 실린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중세 파블리오 문학에 속한다. 파블리오 문학이란, 구전으로 전해지는 민담, 설화 등을 짧은 이야기로 정리한 것이다.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겉으로 내세우는 종교와 도덕적 가치관 뒤에 감추어진 적나라한 인간 욕망의 문제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당시 지배계급에 속하는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부패와 탐욕의 치부를 해학으로 풍자하는 내용이 많다. 다양한 에피소드 안에 담긴 해학과 풍자는, 때로는 양심의 정곡을 찔러 아프긴 하지만, 누구든 허허 웃어넘길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너도 나도 스스럼없이 웃자고 하는 우스개 소리에 도덕이나 윤리 혹은 정의의 잣대를 무턱대고 갖다 댈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누군가가 우스개 소리에 발끈한다면, 도둑이 제 발 저려 스스로 커밍아웃하는 것과 다름없다. 때문에 다소 양심이 찔리고 화가 나더라도, 그저 남의 일인 양 남들처럼 허허 웃을 수밖에 없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조선시대의 해학집인 '고금소총', 마당놀이 해학극 등이 파블리오 문학에 해당된다. 아주 오래된 옛이야기 속에 담긴 해학과 풍자는, 오늘날 상황에 그대로 적용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 이유는, 어떤 방식, 어떤 수단, 어떤 가치로 치장된 인간이 아니라, 벌거벗긴 인간의 민낯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자율과 자유의 차이
위의 두 이야기를 통해 생각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기 주도적인 삶'에 대한 것이다. 자기 주도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율성'이다. 물론 외적 요소로 경제 사회적 자립능력도 빼놓을 수 없다. 자율은 흔히 자유와 혼동한다. 자유의 사전적 정의가,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또는 그러한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세운 어떤 준거에 입각하여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여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자율은 자유와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주도권을 자율로 혼동하기 쉽다.
한편, 나름으로 세운 준거에 따라 스스로 통제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뜻하는 이성(理性)은 자율성의 바탕을 이룬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자율성이 추구하는 목적은 자신의 인격 혹은 타인의 인격으로, 인간을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단순히 값어치를 따질 수 있는 수단이나 도구적 존재가 아니고, 인격 또는 인간성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존재라는 말이다. 따라서 자신이든 타인이든 존중과 배려는 자율성의 전제가 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자율성을 존중받는 사람은 기본적인 성숙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자신의 자율성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자율성의 원칙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양심 혹은 이성적인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이차적으로는 사회적 합의로 규정한 법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 도덕적이든 정의적 원칙이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간에, 마땅히 지켜야 할 이러한 원칙들이 역설적이게도 합리성이나 효율성 혹은 편리함을 이유로, 곧잘 무시되거나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거부하기 힘든 무의식적인 욕망이나 사회적 권위 혹은 유형무형의 다양한 영향력에 의해서, 누군가가 정해준 것들이 기존의 원칙들을 대신하여 자리 잡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관습, 전통, 교육, 집단 무의식, 문화 등등 사회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사실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따라서 자율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나 착각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어떤 시인은 이렇게 독백하였다. “묶였던 줄에 내가 길들여졌다는 것을, 몰랐다 묶여야만 묶여있어야만 안심이 된다는 것을, 몰랐다 풀리는 것이 한없이 불안하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풀어질 때 위험하다는 것을, 몰랐다 가장 가까운 것을 잃을까 봐 다칠까 봐 헤어질까 봐 아플까 봐 불안한 것도 묶인 것이란 것을, 몰랐다 너무 오래 묶여있어서 이제 묶여있지 않으면 정말 불안하다는 것을, 몰랐다"(강미정 詩, '몰랐다' 부분).
시인의 시(詩)는, 자신이 처한 그릇된 상태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우쳐 준다. 모든 심리치유는 자신의 문제 혹은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마음의 치유는 아예 불가능하다. 기억해야 할 것은, 자기반성적인 성찰을 통해 얻는 깨달음은, 개선의 가능성과 그 방향만을 제시할 뿐, 변화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생각이 구체적인 의지의 차원으로까지 발전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꿈 혹은, 희망에 불과하다 하겠다.
진정 원하는 것 혹은 간절한 욕망이나 절실한 욕구가, 현실에서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때로는 희망마저 고통으로 변할 수 있다. 이것은 희망이 가진 역설이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사항이 의외로 많다. 누구에게나 희망사항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는 또 다른 희망의 가능성을 찾는다. 이야기가 잠시 여담으로 흘렀다. 어째튼 자율성은 마음 혹은 생각의 차원, 또는 단순히 아는 것으로만 머물러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타율(他律)과 오율(誤律)
자율에 반대되는 말은 타율(他律, heteronomy)이다. 타율(他律)은 사전에서, '다른 규율.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정해진 원칙이나 규율에 따라 움직이는 일. 남의 명령·구속 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교육학자인 리치(J. M. Rich)는, 'heteronomy(타율성)'의 사전적 의미를 그릇된 자율, 즉 오율(誤律, homonomy)'의 의미로 이해한다. 인간은, 물리적인 강제나 통제, 압박, 그로 인한 불안 등등, 불가항력적이거나 개인능력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인지할 때, 저항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적응하거나 순응한다. 이런 점에서 타율의 의미가 '그릇된 자율', 즉 '오율(誤律)'로 이끈다고 보는 시각이다.
사전(事典)의 정의(正意)에서 알 수 있듯이 타율은,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리치에 따르면, 오율은 타율에의 순응 혹은 적응의 결과로 형성된다. 실제로는 타율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의식적으로는 마치 자율인 것처럼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 오율이다. 자기 모순에서 오는 갈등을 극복하는 쉬운 심리적인 방법은, 아예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거나, 혹은 왜곡하거나 그러한 모순을 정당화 합리화할 수 있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율'은, '그릇된 자율', 또는 '자율의 가면을 쓴 타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오율은, 무의식적으로 자기모순에 대한 정당성을 끊임없이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사고와 선택적으로 편향된 인지, 지나친 자기 확신, 자기 합리화와 가식 등의 특징을 가진다.
인간 정신의 발달은 성장과정에서, 적절한 학습과 올바른 경험은 필수적인 것이다. 특히 어린 시절에 가장 가까운 부모로부터 각인된 학습과 경험은, 개인의 인성과 사회성을 평생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 특히 존중, 배려, 사랑, 공감 혹은 공감적 이해, 신뢰하는 능력, 무조건적인 수용 등등의 경우, 머리로 아는 것과 실천은 별개의 문제다. 성장과정에서 충분히 경험해 본 사람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러한 정서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록 그것의 가치를 안다고 할지라도 현실에서는 그러한 정서와 감정을 나누는 것조차 힘들다. 하물며 베푸는 일은 더욱 힘들다.
이러한 사람들의 인식의 밑바탕에는, 그러한 정서들을 대신하여 누군가가 아름답고 훌륭하게 아로새겨 준, 흠결없는 이상적인 지식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리치유에서, 올바른 정서 또는 감정을 직접 경험하고 재학습함으로써, 잘못 자리잡은 인지와 인식들을 자발적으로 해체하고, 인지를 온전하게 재구조화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치료적 요소가 된다. 이렇듯 오율은 올바른 체험과 학습의 결여, 또는 적절하지 못한 체험과 그릇된 학습의 결과로부터 비롯되기도 한다,
바쓰댁 기사 이야기에서 나는, 오율의 전형적인 특징을 발견한다. 자기 체험과 학습에 근거하여, 남편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주도권을 확보함으로써만이 결혼생활에서 '자신이 주도하는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렇다. 이는 '자율을 가장한 오율'에 다름없다. 결국 바쓰댁의 기사 이야기가 풍자하는 것은, 자율을 가장한 자기 욕망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거부감이 들지 않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일면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쓰댁의 바라는 바는, 오늘날 현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도덕이나 윤리를 떠나서, 누구나 자기 만의 욕망으로 가득한 꿈을 꿀 수는 있다. 또 그러한 욕망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행복할 것이라는 상상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가 채워지면 또 다른 하나가 등장할 것이다. 그것이 욕망의 한 특징이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 비약적이지만, 수백 년 전 옛이야기 속의 바쓰댁을, 오늘날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다. 참으로 역설이다. 일부의 바쓰댁들은 무리를 형성하고, 거리로 뛰쳐나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민망한 구호를 외치며, 과격한 데모를 하기도 한다. 인류사에서 여성이 사회적 권리를 남성과 동등하게 인정받은 것은 백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쓰댁은 어쩌면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항상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동정(童貞)이 조금도 부럽지 않아요. 사람들은 동정을 가진 그 사람들을 깨끗한 흰 밀빵이라고 하고, 우리 같은 여자들을 보리빵이라고 부른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에 보면,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 보리빵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의 배를 불리셨어요. 그래서 나는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자리에서 오랫동안 살아갈 거예요. 나는 성미가 그리 까다롭지 않답니다. 난 아내의 신분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대로 한껏 자유롭게 내 아랫도리 연장을 쓰면서 살아가겠어요." (바쓰댁 이야기 중에서).
어째튼 욕망이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을 품는 것도 꿈을 꾸는 것도 무한한 자유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지켜야만 하는 다양한 규범들과 법, 의무들, 또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생각이 열리며, 마음도 몸도 다 열리도록 가치관이 온통 바뀐다 할지라도,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곧 존중과 배려의 마음이다. 이는 어떠한 명분으로든 다른 고상한 가치들과 대체할 수는 없다.
적률성( hotonomy, 適律性): 조화와 화합
이제 장황한 글의 결론을 맺자. 리치는 '오율성'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적률성'( hotonomy, 適律性)'이다. 그는, '적률성이란 개인의 자율성과 타인에 대한 순응성이 조화된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설명한다. 실례로 갓 결혼한 신혼부부를 예로 든다. 신혼부부들은 상대방의 필요와 흥미에 자신을 적응시키고자 노력한다. 서로의 차이로 인한 충돌과 갈등을 완화하고 예방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모색한다. 그리고 합의를 통해 공동의 목표를 추구해 간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적률적 적응'이 진행되는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이러한 모습은 익숙한 것으로 결혼 초기에 경험하는 것이다. 비록 시간이 지나면 그러한 의지의 노력들이 점차 희미해지고 퇴색될지라도 말이다.
결국 리치가 강조하는 '적률적 적응'은, 자율성이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건강하고 바람직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궁극적으로는 타인과의 조화와 화합이다. 그것은 존중과 배려, 대화와 이해, 양보와 타협이라는 인격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와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겠다.
그래서 거웨인의 선택 이야기에 담긴 인간적인 교훈은, 바쓰댁 기사이야기 덕분에 더욱 빛이 나는 듯하다. 바쓰댁 이야기를 살피고 헤아리면서, 나 역시도 '오율'을 '자율'로 착각하는 '오율'적인 인간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다만,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도덕적 흠결이 가득한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로 스스로 위로한다. 인간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노예도 아니며, 누군가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도 아니며, 기술자의 프로그래밍대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은 더욱더 아니다. 자유는 소중한 것이다. 더욱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율적으로 스스로 선택하는 자기 주도적인 삶의 소중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자신의 이익이나 욕구 충족을 위하여, 타인을 수단이나 도구적인 가치로 대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함부로 조종하려는 태도는, 도덕적 차원을 넘어서 범죄에 가까운 것이라는 개인적인 소견에는 변함이 없다.
바쓰댁은 이렇게 기도한다. "그리스도여, 우리에게 유순하고 젊고, 잠자리에서는 우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남편을 주시고, 그리고 그를 휘어잡을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리고 아내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남편들의 수명을 짧게 줄여 주옵소서! 늙고, 화만 내고, 돈을 아내 몰래 꽁쳐두는 깍쟁이 구두쇠 같은 녀석들은 염병을 내리시어 일찍 죽게 하여 주옵소서! " (2016.1.20 쓰고 2018. 11.25 다시 고쳐쓰다)
http://academic.brooklyn.cuny.edu/webcore/murphy/canterbury/2genpro.pdf
http://www.b-g.k12.ky.us/userfiles/1049/The-Wife-of-Bath-s-Tale%20text.pdf
※참조: 자율성, 오율성, 적률성의 개념은, "교육목적으로서의 자율성과 정서성의 통합에 대한 정당화"(안경수, 2012년 경북대 박사학위 논문) 그리고 "도덕적 자율성의 교육적 의미: 주자와 Kant를 중심으로"(고대혁, 1992년 한양대 박사학위 논문)을 참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