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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Oct 16. 2018

사실과 진실

"자기 자식이라고 부모가 다 알진 못해요."-영화 '서치(Searching, 2018)'-

행복한 가정에서 엄마를 병으로 여의고, 아빠와 단둘이 살던 소녀가 있다. 소녀는 어느 날 갑자기 실종한다.  아빠는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해 딸의 주변 친구들을 수소문한다. 그러나 그는 딸의 친구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심지어 아는 연락처도 전혀 없다. 아는 사실이라곤 딸의 학교, 그리고 딸이 등록한 피아노 레슨실의 전화번호가 고작이다. 비로소 아빠는, 딸에 대해서 아는 사실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딸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도록 말이다. 담당 여형사는, 마치 무언가를 암시하듯이, 그를 공감하고 위로한다. "자기 자식이라고 부모가 다 알진 못해요." 담당 형사에게는 실종된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자식이 있다. 최근에 본 영화 서치(Searching 2018)에 나오는 내용이다.

감독이 1991년생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만든 영화다. 이 영화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실인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사실이나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처럼 보이지만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진실처럼 보이지만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한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면서도, 아빠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신의 딸을 모르듯이 소통도 마찬가지다. 소통이란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나와 너 사이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소통일지라도, 그 중간에 인터넷이나 SNS와 같은 중간 매개체를 소통의 주요 수단으로 삼고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영화의 극적인 반전은 인터넷 환경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지극히 현실적 상황을 소재로 하고 있다.

어느 블로그에서, 한 여자아이가 일베와 같은 남성 전용 인터넷 커뮤니티에 남성의 계정으로 가입하여, 게시판의 글질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나름의 소통과 공감, 그리고 정서적 위로를 받는 내용의 짧은 웹툰을 본 적이 있다. 경험한 바로는, 한참 바이럴 마케터들이 블로그에서 기승을 부릴 때, 네이버에서도 성별 구분이 모호한 정체불명의 블로거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포스팅한 글의 문체나 말투는 영락없는 남성이다. 그런데 프로필에 걸린 인물 사진은 여성이다. 그것도 십중팔구 인터넷 어딘가에서 떠도는 국적불명의 성형 여성의 사진이다.

비슷한 여담으로, 내 개인 블로그의 예전 닉네임은 '파르헤시아'다. 꽤 오래  사용했다. 이 용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자칫 여성의 느낌을 가질 수 있는 닉이다. 실제로 이 때문에 나를 여성으로 오해하신 분들이 몇  있었다. 심지어 여성분도 있었다. 최소한 블로그 대문의 프로필이나 내 신변잡기의 글들을 한 번이라도 관심을 갖고 훑어보았더라면, 황당한 착각이나 오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분들의 관심은 내 글보다는 무언가 다른 데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쪽지와  비밀댓글들에서 무언가 오해가 있음을 확인하고, 내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는 사실을 알리자, 여지없이 그분들은 이웃을 끊고 발길 또한  끊었다. 무안함을 느낄 정도의 온갖 찬사를 이구동성으로 늘어놓던 이들이다.  '파르헤시아'라는 닉네임을 다른 걸로 변경한 것은  올해 오월 경이다

언젠가 지하철의 옆자리에서 통화를 하는 어떤 청년을 본 적이 있다. 추측건대 그는 연인과 문자로 심각한 내용을 주고받는 듯하였다. 그런데 문자를 하는 내내 그의 눈과 다른 한 손은 휴대폰의 웹툰을 부지런히 넘기거나 뒤적이며 보고 있었다. 심지어 가끔은 키득거리고 웃고 있었다. 옆자리의 나는, 감정 따로 눈 따로 손 따로 마음 따로, 소위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을 하는 청년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여하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보느라 달을 잊는다'(爲忘月而見指), 또는  '사슴을 쫓느라 산은 보지 못한다(逐鹿而不見山 ) '는 옛말은, 현실 상황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흔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서두가 다소 길어졌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실에서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영화 서치(Searching)가 한동안 미적거리던 내게 글을 쓰는 동기부여를 한 셈이다. 최근 유튜브나 SNS 등에서 가짜 뉴스, 허위정보가 기승을 부린다. 특히 기술의 발전으로 영상조작이나 이미지 조작, 심지어 음성 조작까지 그 조작의 기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교하다. 사람을 포함하여 온갖 방식으로 조작되고 꾸민 이미지와 허위 정보가 가득 찬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또는 확인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과연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실인가? 또 무엇이 거짓이고 허구인가?  다시 말해, 안다고 생각하는 사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사실을 해석하는 방식에 있다.

'진실은 진실이 아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변호인인 루디 줄리아니의 말이다. 이는 하나의 사실에 대해 두 사람이 상반된 사실을 들어 서로 자기 말이 진실이라고 주장할 경우, 둘 다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된 사실을 가지고 상대의 말을 거짓으로 본다는 전제에서 나온 말이다. 트럼프의 백악관 선임 고문인 콘웨이가 말한 거짓말의 수사학적 표현인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맥락(context)이란, 쉽게 말해, 내용(text)의 연관성 또는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진술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배경, 상황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비록 꾸며서 하는 거짓말일지라도 상대를 속이려는 의도가 없다면, 사실을 말하는 진실한 행위에 속한다. 그러나 고의성의 유무는 오직 자신과 신만이 알 수 있는 진실이다. 한비자의 기록에 어떤 화가가 말하길, 가장 쉽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은 형체가 없는귀신이나 도깨비(鬼魅最易)라고 하였다. 어느 누구도 그 실체를 직접 본 사람이 없고 또 확인할 방법 또한 전혀 없는 까닭에 화가의 상상력만 동원하면 되기 때문이다.

결국 트럼프 측근의 말들은, 주관적으로 해석된 관점에서 말하는 사실이라면 '거짓도 사실이요, 진실이다. 다만 관점이 다를 뿐'이라는 궤변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실제 현실에서 관점에 따라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또는 어떤 개인적인 사정으로, 비록 명백한 거짓일지라도 액면 그대로 진실로 믿는 사람도 많이 있다. 이러한 현실이, 참 혹은 진실의 여부를 떠나서 궤변의 논리적 근거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야말로 거짓말쟁이들의 거짓말을 합리화 정당화하는 거짓의 바이블로 삼을만 하다 하겠다.

"진실은 항상 거짓이라는 경호원을 동반한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주도적 공헌을 한 영국 수상 처칠의 말이다.  이는 사실을 해석하는 데에 누구나 자칫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어느 누구도 모든 사실을 전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울러 실수하지 않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다. 세상사(世上事)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만일 모든 것을 다 알 뿐만 아니라 완벽하여 한점의 실수조차 없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한 거짓말쟁이 아니면 정신질환자다.


거짓말은 누구나, 우연히 혹은 실수로,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는 미묘하다. 실수로 한 거짓말과 고의로 한 거짓말을 구분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스스로 고백하거나 제풀에 드러내지 않은 한 아무리 심리 전문가일지라도 그 차이를 쉽게 분별할 수 없다. 다만, 만일 자신의 거짓말을 증거에 입각하여 스스로 잘못을 수정하고 사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이 추가된다면, 그가 말한 거짓은 실수일 확률이 높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실을 바탕으로 꾸며낸 고의적인 거짓이거나 신념일 확률이 크다. 문제는 고의로 하는 거짓에 있다. 따라서 처칠의 말에서 암시 하듯이, 진실의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이 거짓인가를 가려내는 데에 있다.  물론 가장 단순한 방법은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검증하는 일이다.

사실과 진실의 구분

사실이란 객관적으로 입증 가능한 것을 말한다. 사실의 근거는, 그 내용이 현실적인 사실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것, 관찰이나 경험 등을 통해 참이나 믿을만한 것으로 공유된 사실, 또는 보편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다만, 사실은 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예외적으로 관찰이나 경험을 통해 입증된 사실의 경우에는 변한다.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다면 사실의 자격을 잃게 된다. 예를 들어 천동설과 지동설, 우주에 관한 뉴턴의 고전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 등등이 그렇다. 분명한 것은 오직 사실 속에서만이 진실이 존재한다. 따라서 거짓이나 허구에서 진실을 찾는다는 것은 마치 허공에 손을 휘저어 무언가를 찾는 행위와 같다.

그렇다면 진실이란 무엇인가?  위키백과에, "진실(眞實) 또는 참은 사실, 거짓이 아닌, 왜곡이나 은폐나 착오를 모두 배제했을 때에 밝혀지는 바를 말한다."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사실은 진실의 한 부분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한 부분이라 함은 사실 검증의 여부에 따라, 해석되는 진실의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진실의 일부가 진실 그 자체일 수는 없다.

비록 99%의 사실일지라도, 우연한 실수든 고의든 간에, 만일 거기에 1%의 거짓이나 허구가 포함된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의 여부는, 전체를 구성하는 사실 속에서 사실이 아닌 것, 즉 거짓이나 하구 또는 오해나 착각 들을 가려내는 과정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진실의 근거에 접근하는 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에 관련된 여러 조각들과 정보를 추가하고 다양한 주장과 사실 증거를 교환하여 전체적인 사실에서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영화 서치는 딸에 대해서는 비록 아는 바가 없지만, 딸의 실종의 진실을 추적하는 아빠의 절실하고도 끈질긴 노력의 과정을 통해, 거짓과 조작과 허구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어떻게 진실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사실성의 망(the web of facticity)

참고로 저널리즘 용어로 "사실성의 망(the web of facticity)"이란 개념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이론적으로는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현실의 차원에서 검증할 수 없는 사실, 또는 미처 팩트 확인이 안된 사실을 따옴표(", ') 등의 인용부호를 사용하여 마치 사실처럼 적시하는 것을 말한다. 핵심은, 비록 거짓일지라도 취재원이 그렇게 말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검증된 사실이라는데에 있다. 여기가 바로 거짓이 사실로 뒤바뀌는 지점이다. 독자들의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비록 나중에 취재원의 정보가 허위정보요, 거짓으로 밝혀지더라도 적어도 언론의 책임만은 피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사실과 저널리즘에서 말하는 사실은 그 접근 방식과 해석의 차원이 다르다.

예를 들면, 오늘 자(2018.10.15) 뉴스 1의 기사에서,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은 15일 "청와대의 업무추진비 사용이 부적절했다는 자신의 지적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이 거짓으로 드러났다"라고 주장했다.」" 앞서 말한 따옴표가 기사의 전체를 뒤덮고 있다. 이 보도기사에서 유일하게 분명한 사실은, 취재원인 심의원이 한 말이다. 그런데 제목이나 기사의 내용은 청와대의 해명이 거짓으로 드러난 것이 마치 명백한 사실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사실 검증의 노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거짓과 사실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온통 취재원의 의견과 주장으로 도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위 '받아쓰기', '베껴 쓰기', '카더라' 통신의 전형이다. 심지어 이런 류의 기사를 바탕으로 다양한 의견을 펼치고 단정적인 주장을 하기도 한다.이에 해당하는 한자성어로 '견강부회'(牽强附會)'와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있다. 견강부회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전인수는 '자기에게만 이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이다.

'사실성의 망' 속에 숨어 대중을 기만하거나 호도하는 보도기사는 조선, 중앙, 동아, 한겨레, 경향, 오마이, 미디어 오늘 등등 진보수 구분 없이 각 언론사들의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흔하게 발견된다. 저널리즘 언어의 기술적인 책임회피와 합리화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성의 망'에 근거한다. 이에 따르면 '거짓을 생산한 자의 말을 가감 없이 인용함으로써 거짓도 사실 보도가 된다'. 트럼프의 측근 입들이 하는 말들과 비슷하지 않는가? 착각이나 오해는 독자의 몫이다. 진실의 여부를 가리는 것 또한 오직 독자의 몫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사회의 언론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하나의 반증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유홍준 교수의 말이다.

가짜뉴스 혹은 조작된 허위정보

“허위 정보를 유사 언론만 유포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언론이 없는 사건을 만든 게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기성 언론이라도)   검증하지 않고 쓰면 그게 바로 가짜 뉴스다”(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한겨레 기사 재인용)

최근 한겨레에서 가짜 뉴스와 허위 조작 정보에 관련한 기획 연재기사를 싣고 있다. 그동안의 관행을 보자면, 비록 누워서 침 뱉는 형상이라 할지라도, 참으로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럼에도 최근 언론의 보도기사는 여전히, 검증된 사실 정보보다는 '사실성의 망'에 속하는 베껴 쓰기 또는 받아쓰기한 사실 보도, 아니면 이를 짜깁기한 의견 정보가 압도적으로 많다. 의견을 사실처럼 확대 재생산하여 소설 쓰듯이 가공하고, 그것을 마치 진실인 양 주장하는 현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상업 적폐 언론의 최근 민낯이다.

요즘은 현직 기자들이 글쓰기 책을 쓰고, 글쓰기 강좌를 주도할 뿐만 아니라. 인문·사회, 심지어 역사학의 전문가 행세는 물론 완장찬 선생질까지 예사로 하는 추세다. 소위 문화권력이라 일컫는 언론을 배경으로 이미 깔아논 멍석이 워낙 좋은 탓도 있겠지만, 전문 학자들 혹은 참된 선생들이 이들의 뒷전으로 밀려난 듯한 현실은, 우리 사회의 문화·학문·교육풍토가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하나의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기자  글선생들이 강조하는 것을 정리하면, 간결성, 정확성, 진실성, 진정성이다. 무엇보다 사실과 의견의 구분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들이 몸담고 있는 언론 기사의 실상을 보면, 공히 정확성에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의견 또는 추측인지를 쉽게 구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이다. 진실은 고사하고 사실의 여부 마저 독자가 각자도생의 자세로 직접  확인해야만 하는 판국이다. '조선일보의 적은 과거의 조선일보'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한겨레의 적 또한 과거의  한겨레'다.  한 입으로 두말하듯이, 동일한 사안을 두고 지난 과거 정권에서 말한 의견과 현재 정권에서 하는 의견이 서로 상반될  뿐만 아니라  아주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지극히 정당하고 합리적인 일이라 쓰고, 오늘은 지극히 잘못되고 악한 일이라 쓴다. 아무리 조직의 이익과 생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할지라도, 과연 이들이 말하는 진정성은 어디에 기반하는 것인가?

엄밀하게 따지자면 언론은 가짜 뉴스의 공동정범(共同正犯)이 되는 셈이다.  공동 정범 이란, '범죄 구성 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를 공동으로 실행한 사람. 또는 그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언론이 그동안 한결같이 가짜뉴스에 대해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속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겨레의 가짜 뉴스 기획연재는 공익을 위해서 분명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의견은 사실이 아니다

언론은 브런치와 같은 글쓰기 플랫폼이 아니다. 사실과 의견의 구분은 언론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다.  의견은 사실이 아니다. '의견'(意見)이란, 개인의 생각이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의견'은 사실에 대한 생각, 느낌, 판단을 나타낸 것이다. 사실(事實)은, 사람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없다. 반면에 하나의 사실을 놓고도 그에 관한 의견은 달라질 수 있다. 그 이유는, 사물을 보는 태도나 이해 능력, 관심 분야, 경험 등이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견은 주관적이다. 주관적이라 함은, 개인의 가치관, 감정, 정서, 취향, 이념, 태도, 지성 등을 바탕으로 하는 개인의 관점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인의 생각을 의미하는 의견은 주관적인 까닭에, 가치 판단의 대상이 될 뿐, 진실과 거짓의 판별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직 사실만이 진실과 거짓의 판별 대상이 된다. 따라서 사실에 대한 잘못된 추측이나 가정(假定)에서 비롯된 의견은, 잘못된 의견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하물며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의견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기성  언론뿐만이 아니라 유튜브나 SNS, 인터넷 등에서 떠도는 글 정보나 뉴스도 마찬가지다. 특히 진보와 보수 혹은 좌우로 갈린  양극단의 특정 정치적 세력들, 그리고 특정 정치인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정보나 주장 중 상당수는, 사실보다는 의견을 마치 진실처럼 포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떤 특정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허위정보로 의심해도 되겠다.  가짜 뉴스의 유형으로는 크게 오보(Misinformation)와 허위정보(Disinformation)가 있다. 오보는 거짓 정보를 유포하는 주체가 사실이라고 믿고 유포하는 정보다. 반면에 허위정보는 유포자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유포하는 정보다. 따라서 팩트의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생산된 언론의 오보는, 의도적인 것으로 악성의 가짜뉴스에 해당된다.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가짜뉴스 또는 허위 조작 정보가 나쁜 것이며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은, 사실 누구나 한다. 문제는 가짜 뉴스나 허위로  조작된 정보를 액면 그대로 사실로 믿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데에 있다. 사실과 진실 그리고 사실과 의견을 분별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사람들의 심리적 경향성이다. 경험한 바로는 흔히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정보를 다루는 뉴스나 기사를 모두 가짜 뉴스라고 단정 짓는다. 가짜뉴스의 문제를 정치의 장에서 전 세계적인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확산시킨 장본인은 미국 대통령 트럼프다.

트럼프는 자기 생각과 다르거나, 자신의 치부를 폭로하거나, 자기를 비판하는 뉴스 등등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뉴스를 모조리 가짜뉴스라 공언한다. 이는 자신의 실책 혹은 허물을 덮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기 위한 공격적인 정치적 언어표현으로, 일종의 심리적 방어기제의 역할을 한다. 트럼프 측근들의 궤변은, 이러한 트럼프의 왜곡된 가치관과 언행을 논리적으로 합리화·정당화하는 일종의 논리적 도구다. 따라서 가짜뉴스의 개념 자체를 본질과 다르게 왜곡시킨 원조는, 트럼프라고 단정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역설적으로 트럼프라는 초강대국 대통령의 권위는 올바른 가치관 특히 진실의 가치를 크게 혼란시킬뿐만 아니라, 보통사람에게 가짜뉴스에 대한 그릇된 인식를 정당화하고 권위에 의존하는 좋은 근거가 된다.

확증편향의 강화: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effect)와 필터 버블(filter  bubble)

이러한 심리적 경향성은 '확증편향'으로 설명된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이 믿는 것만 믿고 보는 심리적  경향'이다. 이러한 경향성을 더욱 증폭시키고 강화시키는 현상을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effect)', 혹은 '필터 버블(filter  bubble)'이라고 한다.

반향실(Echo chamber)이란, 소리가 벽 너머로 나가지  않고 되돌아오도록 만든 폐쇄된 방이다. 즉 반향실에서는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메아리가 되어 방안에서만 돌아다닌다. '필터  버블(filter bubble)은 인터넷 검색의 주관 사업체가, 사용자 위치, 연령, 과거의 클릭 동작, 검색 이력 등과 같은 사용자의 정보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 패턴의 특성을 분석하여, 검색 시 개인의 취향, 관심, 연령에 적합한 개인 맞춤형 정보를  개인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그 결과 사용자들이 자신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정보로부터 분리하게 만들고, 효율적으로 자신만의  문화적, 이념적 거품에 가두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인터넷의 특성상, 뉴스  매체나 소셜네트워크 안에서, 같은 정보와 아이디어가 계속 돌고 돌며 믿음을 증폭시키거나 계속 강화된다. 이러한 현상들 때문에  알고 있는 것만을,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확증편향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은 소망 편향으로 더욱 강화된다. 일종의  세뇌다.

반향실 효과와 필터 버블은 개념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소셜네트워크 이용자들은 직접 팩트를 확인할 위치나 상황이 못되기 때문에, 마치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처럼 자신이 반향실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다. 아울러 인터넷 포털의 정보검색과 빅데이터 알고리즘에 의해 개인 특성들이 파악되어 개인 맞춤형의 믿고 싶은 정보만 선별되어 자신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더구나 굳이 애쓰지  않아도 민감한 사안의 뉴스나 정보를 자신의 손안에서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사실이 단 몇 % 라도 있다면, 비록 허위정보일지라도 검증된 사실을 말하는 주류 통신보다는 소위 `카더라 통신'을 더 신뢰하게 된다.

그 결과 자발적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는 가짜 뉴스(fake news)와 허위 조작 정보를 확산시키는 통로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모종의 이익을 창출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또한 스스로 혐오와 차별을 더욱 부추기는 이념적인 극단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사회 여론의 양극화 현상을 유발하는 악역의 한자리를 맡게 되는 것이다.

무한한 정보의 바다라고 일컫는 인터넷 공간에서, 의도치 않게 쉽게 빠질 수밖에 없는 반향실 효과와 필터 버블의 악순환은, 마치 동굴과 같고, 우물과 같으며, 다람쥐 쳇바퀴와 같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가장 우선적 조치는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를 통해 개인 맞춤형 정보를 얻는 행위를 스스로 차단하고 제거하는 일이다. 거품(bubble)은 훅 불면 꺼지기 마련이다. 메아리(echo)로 소리가 외부와 차단된 특정 공간에서 돌고 도는 방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갔듯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면 된다. 물속에 깊이 잠긴 사람이 물의 깊이를 잴 수는 없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과정은 그다음의 일이다.

인터넷에서 가짜뉴스 혹은 허위정보를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부화뇌동(附和雷同)이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이는 '천둥이 치면 온 천지가 함께 울린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도 않고, 아무 생각없이 무작정 동조하고  따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시골에서 한 집의 개가 짖으면 온 동네의 개가 영문도 모르고 따라 짖는 상황과 비슷하다. 오직 그 근거는 내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말'이다. 인터넷 공간의 수많은 정보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고, 가짜 뉴스와 허위정보를 판별하는 데에, 허버드 대학의 소렌스타인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퍼스트 드래프트 뉴스(First Draft News)의  크로스체크 가이드는 상당한 도움이 된다.

온라인상의  가짜 뉴스(허위 조작 정보)를, 개인이 판별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대략 네 가지로 압축된다. 정치 혹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고 여겨지는 자극적인 정보에서 반드시 확인해야만 할 것은, 첫째, 기사 혹은 정보의 출처가 있는가? 둘째로 정보를  생산한 취재원이 신뢰할 수 있는 검증된 집단 혹은 인물인가? 또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가? 셋째로 정보나 기사의 내용이 현재의 상황에 맞는 사실인가? 아니면 여기 저기의 사실을 짜깁기한 것인가? 혹은 필자의 의견인가?  넷째로 동일한 사안에 대해 보도하는, 검증된 기성 언론의 또 다른 기사가 있는가?  있다면 그 내용이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확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보를 전달하거나 중계하는 사람 혹은 집단에  대한 배경지식이다. 정리하면, 정보의 출처가 되는 취재원 그리고 제공된 수치와 통계, 이미지, 사실 등의 일부분이 검증할 수 없거나 실제와는 맞지 않는 허구라면, 그에 기반한 의견 역시 독자를 호도하려는 의도의  허위정보, 혹은 가짜 뉴스일 가능성이 짙다.

앞서 말했듯이 인터넷과 SNS의  필터 버블과 반향실 상황에서 빠져나오려는 의지와 노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곧 정신적 세뇌, 심리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첩경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소위 '카더라 통신', '지가 복음', '내가 복음'에 현혹되거나 호도당하거나 세뇌당하지 않으려면, 사실의 진위 여부와는 관계없이 무턱대고 남의 생각 느낌 감정 등에 쉽게 휘둘리는 정신적 노예 상태에서 빠지지 않으려면, 스스로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방법 외엔 달리 없는 듯하다. 돌이켜 생각건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킬 때, 나머지 세 손가락은 항상 나를 향하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그러하듯이 '내 코가 석자다(吾鼻三尺)'.

결론적으로, 사실에서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 진실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오해나 착각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마주하고, 눈에 보이는 왜곡과 거짓을 찾아서 하나씩 제거하는 일이다. 진정으로 진실을 알기 원한다면 말이다. 최근에 본 영화 서치(Searching)는 이런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는 영화다. (2018.10.16)

" 대체로 진실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기 전에 먼저 그 양면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이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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