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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Sep 25. 2018

교양(敎養)에 대하여

최근 사전을 뒤지다가 내가 아는 상식과는 다른, 의외의 표준어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거시기',   '딴지', '꼽사리',  '나부랭이', '허접쓰레기', '씨불거리다'... 기타 등등 이외에도 많이 있다. 대부분 2000년도 이후에 표준어로 인정되어 국어 대사전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내친김에 표준어의 정의를 찾아보니 '한글 표준어 사정  원칙' 제1항에,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고 나온다. 뒤이어 이 구절을 해설하기를, "이렇게  정함으로써 앞으로는 표준어를 못하면 교양 없는 사람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중략) 표준어는 교양의 수준을 넘어  국민이 갖추어야 할 의무 요건(義務要件)이라 하겠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인 생각에, 표준어 제정의 목적, 특히 "앞으로는 표준어를 못하면 교양 없는 사람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부분에서 도대체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교양의 개념부터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교양은 영어 'culture'를 일본식으로 번역한 한자라고 한다. 그래서 일본어 사전에 'culture'를  찾아 보니, 과연 '교양, 문화(文化)'로 나와 있다. 그런데 영어사전에서 문화(文化)는 'culture', 교양은 'refinement'로 나온다. 다만 교양과 비슷한 의미로 번역되는 형용사로 'cultured'(세련된, 교양있는)가 있다. 영영사전에, 'culured'는 '일상생활에서 매너가 좋고, 아울러 교육을 받았으며, 예술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음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한다. 참고로 교양과목으로 번역되는 영어는 'liberal   arts'다.  


인터넷 웹스터 사전에서 설명하는 'culture'는, "인종, 종교, 사회 집단의 관습적인 믿음, 또는 사회적 형태 및 물질적 특성, 아울러 장소나 시간 속에서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상생활 (삶의 방식)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질."이다. 표준 국어대사전은 문화(文化)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ㆍ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설명이 좀 어렵다. 내용을 정리하자면, 지역, 인종, 집단, 종교 등 사회 공동체가 공유하는 삶의 양식과 사고방식이, 다른 공동체와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개인과 전체에 걸쳐 두루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질이 '문화'라 하겠다. 개인으로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나 개체와 구별되는 고유의 특성을 뜻하는 '개성'(個性)과  비슷한 의미로 이해해도 되겠다. 


교양(敎養)의  사전적 설명은,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다. 우리 선조들의  옛글에서 간혹 발견되는 한자어 교양(敎養)은 수양에 관련하여 문자적 의미 그대로 '가르치고 기르는 것'을 뜻한다. 수양(修養)은, '몸과 마음을 갈고닦아 품성이나 지식, 도덕 따위를 높은 경지로 끌어올림'을 말한다. 즉 우리 옛글의 교양이란, 배움의 과정을 통해 바르게 읽고 쓰고 분별하고 생각하는 재능을 기르고 그를 통해 덕(德)을 성취하는 것을  뜻한다. 


두산백과사전에 교양은, "'(요약) 인간의 정신능력을 일정한 문화 이상(文化理想)에 입각, 개발하여 원만한 인격을  배양해 가는 노력과 그  성과'; 교양을 뜻하는 영어 'culture'의 원뜻은 '경작(耕作)'이고, 독일어의 'Bildung'은  '형성'이라는 뜻임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여기에는 인간 정신을 개발하여 풍부한 것으로 만들고 완전한 인격을 형성해 간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양의 내용은 시대 또는 민족에 따라 달라진다.(두산백과)"라고 설명한다. 두산 백과사전에서 'culture'를 교양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용어의 기원이 일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사에 대한 시도(現代史への試み) 1963』라는 책에서 저자인 가라키 준조(唐木順三)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는 ‘교양’이라는 용어가 없었으며, 유교의 ‘수양(修養)’이라는 용어를 대체해서 등장하였다"고 한다. 여러 관련 서적에 따르면, 일본에서 교양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학자는 가토 토츠도(加藤咄堂)다. 가토 토츠도는 그의 저서 『수양론,1909년』에서 말하길, “수양의 어의는 다양하고 복잡하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지 않기에, 잠시 그 일반적 의미를 해석하면 영어의 컬쳐(culture)라는 경작(耕作)의 뜻이 된다. 이는 곧 마음의 밭(心田)을 일구어 그 수확을 얻는다는 뜻이고, 독어의  빌둥(Bildung)이라는 뜻이 되어, 인물을 만들고 품성을 모조하는 뜻으로 해석된다”라고 말했다.  이로써 두산백과에 나오는 교양의 설명은, 바로 카토 토츠도의 수양 개념을 그대로 따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토 토츠도의  뒤를 이어 오늘 날과 같은 교양의 개념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사람은 니토베 이나조(新渡戸 稲造)로 대표된다. 그는 ‘수양’을 ‘수신(修身)’과 ‘양신(養神, 마음을 수양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특히 지식인들은 양신(養神)을 취함으로써 더욱 고상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양신의 구체적인 방법이 문학·예술·철학·도덕·윤리·종교·역사 등의 인문 지식을 쌓는 것이다. 참고로  기독교인인 니토베 이나조(新渡戸  稲造)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일본의 교육자로, '무사도'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인물이다.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제국주의의 야욕과 침략의 기세를 한참 드높이던 시기에, 그는 1899년 미국 펜실바니아  주에서  『Bushido, The Soul of  Japan(무사도, 일본의 정신)』'이란 책을 발간하였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의 일본 역사 그 어디에도 '무사도'와 같은 일본 고유의 정신에 관한 담론이나 이야기가 기록된 사료나 문헌들이 전혀 없다. 다시 말해 무사도는 이나베가 만든 허구다. 그것도 허술하기 그지없는 허구다. 지금껏 알려진 무사도의 정신을 강조하는 모든 담론들은, 니토베  이나조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1899년 이후에 더욱 공교하게 만들어진 허구라 봐도 무방하다. 


이제 일본 지식인들이 유교 전통의 수양과 접목하여 교양 개념의 바탕으로 삼은, 독일어 '빌둥'(Bildung)에 대해 살펴보자. '빌둥'(Bildung)은, 그림 혹은 조각과 관련하여 '형성, 생성, 조성, 구성, 형태, 형상, 복사, 모조, 모방'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쓰임은 주로 도공이나  금세공 같은 수공업 분야의 작업과 관련하여 사용된다고 한다. '빌둥'(Bildung)을 종교적 차원에서 인간됨의 함양을 추구하는 교양의 의미로 도입한 사람은 중세 독일의 신학자·철학자인 마이스터 에카르트(1260~1328)다. 에카르트는 '빌둥'(Bildung)을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라 할 수 있는 잃어버린 낙원으로 복귀하기 위한 인간의 형성(formatio)과 변형(transformatio)”라고 개념화하였다.


종교적 의미의 빌둥을 근대 인문의 개념으로 자리잡게 한  학자는 독일의 사상가로 문예비평· 역사·철학·신학·시인 등 다방면에 정통한  학자인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1744~1803)다.  헤르더는  'Bildungzum Menschen'(인간다움의 형성)이라는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였다. 헤르더에 따르면, 교양은  형성의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한다라기 보다는 그 실천과 형성의 과정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의미하며, 그 주체가 되는  인간을 보다 성숙하고 온전한 정신적인 존재로 만들어나가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이는 유교전통의 수양과 비슷한 맥락을 가진다.


독일 고전주의 교양의 개념을 문화라는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 파악하여 개개의 인간을 문화와 연관지은 인물은 영국의 문학 평론가·작가인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 1822~1888)다. 그는 교양을 통해 형성되는 인간됨의 완전성과 선한 아름다움의  이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인간됨의 발전 또한 개인이 속한 문화의 특성으로 드러나는 보편적인 발전이 되어야만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매슈 아널드에 따르면, 개인이 고립된 채 존재하는 한 인간됨의  어떠한 완성도 불가능하다..


어째튼 교양을 논하는 다양한 관련 저술들을 참고하면, 교양은 주로 인문·문화 차원의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지식들이 개인의  가치관 이나 태도와 인격의 향상에 영향력을 끼치며, 또 그 결과가 현실의 삶에 반영된다는 점에서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그 바탕에는 다양한 지식이 인간의 정신활동과 어우러져 형성되는 지성(知性)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지성(知性)은  철학적인  의미에서 인식, 사고, 이해, 판단, 분별하는 능력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한편으로 매슈 아널드의 의견을 바탕으로  하여 문화의  개념을 개인으로 확장시킨 것이 곧 교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따라서 문화 'culture'의 기능적 의미인 '경작, 재배, 사육'에 초점을 두고 나름 정리하자면, 교양이란 "인문에 관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이 정신적인 능력과 어우러져서 개인의 지성(知性)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마치 창고에 다양한 물건을 많이 채우는 것처럼 예술·문학·철학·도덕·역사 등의 인문지식을 단순하게 축적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결과로써 사람과 사물과  세상을  바르게 인식하고 이해하게 해주며, 동시에 성숙한 인격의 품위 있는 인간으로 성장·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이해해  본다.

지성(知性)과  관련하여, 현대 사회에서 그 사회의 지성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  즉, 문해력(literacy, 문식성)에 주목한다. 문장의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맥락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곧  문해력이다. 맥락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사물 따위가 서로 이어져 있는 관계나 연관’을 의미한다. 상황이 구체적인 일의 상태를  가리킨다면, 맥락은 관련성이나 연계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즉 언어와 언어가 맺고 있는 ‘관계’, 언어와 상황이 맺고 있는 ‘관계’라고 파악해야  한다."(국립 국어연구원, 1999). 말과 글에서 맥락은, 언어로 표현한 내용으로 뜻을 파악할 수 있는 언어적 맥락과  표현된 내용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는 언어 외적 맥락으로 나눌 수 있다. 언어 외적 맥락이란, 말과 글이 나오게 된 배경, 상황, 개인의 성향, 직업, 나아가 문화, 사회 환경, 관련 지식 등을 모두 포함한다. 


아무튼 실질적인 '문맹'의 측정은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는가의 유무보다는, 문해력이 기준이 된다. 문해력은 일의 시시비비 또는 사실과 거짓(眞僞)을 가릴 수 있는 분별력과 판단력과 직결된다. 이는 경험 지식이든 배움을 통해 얻는  간접 지식이든 간에 다양한 형태의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과 사람과 사물을 바르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인지능력, 즉 지성(知性)이 그  바탕이 됨을 가늠할 수 있다. 만약에 비록 글자를 읽을 수는 있지만, 글의  내용 파악이 안 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는 '실질  문맹'에 해당한다. 문해력은 독서율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된다. 일상에서 학식이나 학력 또는 사회적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사람, 아예 말귀를 못 알아먹는 사람을 접해 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한국 직업능력개발원의  2012년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40~60대의 연령층에 한해서 문해력은 OECD 국가 중에  꼴찌로  조사되었다. 


언어와 관련하여, 경험과 관찰 등으로 얻는 직접 지식과는 달리 책이나 배움을 통해서 얻는 모든 간접 지식은, 누군가가 표현한 언어를 바탕으로 한다. 미국의 철학·교육·심리학자인 존 듀이는 "문화는 언어의 조건이며 동시에 그  산물이다."라고 통찰한 바 있다. 이는 언어가 한 개인이 몸담고 있는 사회·전통·관습·생활양식 등을 모두 포괄하는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정신의학자인 프란츠 파농은, "언어란 그  세계와 그 문화가 어우러져 집약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다."라고 통찰했다.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 선생은, "모국어는 우리 삶의  토양에서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품고 길러 정신의 꽃으로 피워 주는  씨앗이며,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 "이라고 말했다. 파농과 최명희 선생의 언어에 대한 이해는 그 맥락이 같다. 덧붙여  말하면, '한 개인이 자신의 모국어를 잃는다는 것은 그  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세계와 문화의 정체성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파농은 통찰했다. 그래서 그는, 이를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 비유하면서 식민지배하의 피지배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모국어 사용을 거부하는 것은 그 개인의 정체성을 포기한 결과로 나타나는 일종의 정신분열 현상으로 진단하였다. 이처럼 언어는 문화의  바탕이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한 요소이기도 하다.


18세기 프랑스의  철학·수학·자연과학자인 뷔퐁 백작은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고 규정한다. 이는 글에는 생각뿐만 아니라 감정도 함께 담기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말 또한 마찬가지다. 이는 또한 비록 훌륭하고 모범적인 말이나  글일지라도, 겉과 속이 다른 가식으로 아름답게 꾸민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의미를 함께 내포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통찰은, 문화를 좁은 의미의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도 그 맥락은 같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간에 그 특질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상의 삶의 양식에서 선명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수필가인 윌리엄  조지 조던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주어져 있다. 그것은 각자의 삶에 조용하고 무의식적이며, 보이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것은 단지 그 존재의 본질로부터 일관되게 반사되어 비치는 그림자일 뿐, 가식적으로 꾸며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통찰했다. 꾸미거나 모방한다고 해서 뱁새가 황새가 될 수 없듯이, 비록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 법이다. 

이렇듯 평소에 사용하는 일상의 말을 통해 그 사람의  인격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은 경험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다만 그 척도는 그 사람이 표준어를 사용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 말 혹은 글에 담긴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의 여부라  하겠다.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가서, 과연 표준어 사용 여부로 한 개인의 교양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가? 교양에 관한 여러 논의들을 살펴 보건대, 그렇치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교양의 개념을 알든 모르든 간에, 문해력이 있든 없든 간에 상관없이, 표준어를 사용하는 천만 인구의 서울 시민들이 모두 품위와 지성을 겸비한 인격자일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준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교양이 없는 사람으로 명문화되어 있다고 해서, 자신이 표준어를 하지 못하는 이유로, 굳이 기죽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정작 기가 죽고 마땅히 부끄러워해야만 할 것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인격의 품위와 지성을 두루 갖춘 사람들과 비교되는, 일상에서 사람을 대하는 평소의 언행과 태도 그리고 사고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표준어의 사용여부로 교양의 있고 없음을 판단하는 근거로 내세운, 관련 국어학자들의 지성(知性)과 교양 수준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학문의 깊이와 인격이 바탕이 된 지성의 깊이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이렇듯 말은 사용하는 단어와 어휘뿐만 아니라 어투, 억양, 표정, 감정, 동작, 태도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나오는 까닭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말하는 사람의 교양이나  인격 수준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반면에 글은 말과 달리 직접적으로 감정, 태도 등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용하는 단어와 어휘의  통일성 있는 조합과 질서 있는 구성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글을 읽고 보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 일상으로 익숙한  사람이라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파악이 가능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의  생각, 느낌 그리고 감정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분명한 질서를 부여하고 거기에 통일성을 담아 문자로 표현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렇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다양하게 많이 그리고 폭넓게 아는 소위 박학다식한 지식은 백해무익한 것으로 단정 짓고, 이를 가리켜 머릿속에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장식용 지식으로 '비활성 지식'이라 정의 내린 바 있다. 마치 앵무새가 배운  말만을 유창하게 끊임없이 반복하듯이 학습과 축적 그 이상 진행되지 않는 지식이 그렇다. 성호 이익 선생은 이러한 지식을 가리켜  "마치 소경이 희고 검은  것을 말하면서도 그 희고 검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 말하는 바가 귀로 들어와서 입으로  나오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마치 배가 터지도록 먹고 도로 토해내면 신체(肌膚)에 이익됨이 없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이루려는 의지와  기개(志氣)마저도 오히려 도리에 맞지 않아 비뚤어지게 된다(유구 독서)."라고 비판하였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거나 많은 지식을  축적하거나 또는 많은 것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교양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물며 그것으로  사람의 됨됨이, 즉 인품을 가늠할 수는 더욱 없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굳이 교양을 들먹이지 않아도, '바른말, 고운   말'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당연히 문해력을 향상하여 주고, 지성 또는 교양의 바탕을 이루게 해주는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 내 생각과는 달리 이게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은 늘 간절하게 원하지만, 막상 현실 상황에 직면해서는 내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된다는 게 문제다.  문화의 특질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듯이, 내면에 쌓은 것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성숙한 교양이나 지성 또는 인간미는, 아무리 겉으로 꾸민다고 해서 가능해지는 일이 아니다. 말로는 바벨탑이든, 금자탑이든 무엇인들 못 세우랴.


글을 정리하다 보니,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외면이든 내면이든 간에 내가 교양 있는 사람은 못된다는 사실이다. 다만 행동이나 태도에서 교양 있는 척할 뿐, 실상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화이트헤드의 지적처럼, 여러 방면에서 늘 그 상태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그야말로 '비활성 지식'으로 가득 찬 '비활성  인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내가 비활성 인간에 불과할지라도 마음으로는 교양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여전하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만큼 나 또한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기를 원하는, 나를 위한 이기적인 마음에서 그렇다. 내가 때로 사전을 뒤지고, 간간이 글을 쓰고, 또 둔한 머리로 마치 고구마 줄기  뻗치듯 책 읽기를 쉬지 않는 것은 그러한  바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하튼 '내 코가 석자다'라는 옛말은 내 처지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한 시대의  병은 인간의 삶의 양식이 변화될 때 비로소 치유된다.(...) 인생이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상황이 변화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가장 효과적인 변화, 즉 자기 자신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에는 거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이다. 선각자들의 좋은 글에는 언제나, 실천보다 마음이 늘 앞서는, 비활성적인 내 가슴을 뜨끔 거리게  만드는 뼈아픈 일침이 숨어 있다.(2018.7.30 새벽에 쓰고 2018.9.25 다시 고쳐 쓰다)

※참고자료: 교양의 개념 부분은 이래 자료에서 대부분 인용 표절하여 나름의 글로 정리했다.


1. 김종철, 『인문적 상상력의 효용-매슈 아놀드의 교양개념에 대하여 』( 외국문학 1987년 봄호 제12호)

2. 허병식, 『한국 근대소설과 교양의 이념』 (2005년 동국대 국문학과 박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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