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건을 두고 그것을 관찰·경험하는 주체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인식하고 해석하는 경우를 가리켜 '라쇼몽 효과(Rashomon Effect)'라고 한다. 전문가들 혹은 연구자들이 동일한 사안을 두고 각기 다른 해석을 내림으로써 의견의 불일치를 보이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흔히 이를 '인식의 주관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인식(認識)의 사전적 정의는 인지(認知)와 같은 말로, "①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 ②<심리>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일련의 정신 과정. ③<철학>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물에 대하여 가지는, 그것이 진(眞)이라고 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개념. 또는 그것을 얻는 과정."이라고 나와 있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인식의 주관성이라는 개념은, 관찰·경험의 주체가 하나의 사실에서 각자의 관점으로 재구성하여 해석한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을 때에만 성립이 된다. 따라서 인식의 주관성이 사실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거짓말은 인식의 주관성에 해당되지 않는다. 거짓말은 상대방을 속이려는 분명한 의도에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서 하는 말"이기때문이다.
이를테면, 남의 집 닭을 몰래 잡아먹고는 그 사실이 드러나 추궁당하자, 단지 자기 집 오리를 잡아먹었을 뿐이라고 오리발을 증거로 내미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가 비록 남의 집 닭을 자기 집 오리로 인식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일 것이라 판단하고 믿어줄 사람은 없다. 그것이 의도적으로 꾸며낸 사실, 즉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근거나 그릇된 기억 또는 느낌이나 추측을 가지고 해석한 사실을 진실이라 믿는 것 또한 인식의 주관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는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이거나 혹은 착각에 불과할 따름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언가 의도하는 바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환상이나 허구를 진실이라 믿는 조현병에 해당하는 정신질환자나, 사실을 자신의 감정에 따라 왜곡되게 해석하며 감정의 기복이 극단적이고 변덕스러움이 특징인 경계선 인격장애 또는 일상에서 상습적으로 거짓말과 거짓 행동을 반복하는 리플리 증후군에 속하는 인격장애자들은 여기에서 제외된다. 이들의 거짓말은 정신질환 혹은 정신장애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우선적인 치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과 해악의 도덕적 정의적 판단은 그다음의 일이다. 다만, 이들로부터 원치 않는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각별한 분별이 요구된다.
그런데 '라쇼몽 효과'의 출전이 되는, 영화' 라쇼몽(1950)'은 인간의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다. 온갖 거짓말이 마치 진실처럼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 거짓말의 이면에 자리 잡은 인간의 추악하고 이기적인 민낯과 그에 대한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에서, 살인 사건에 관계된 당사자들은 모두 자신의 무죄함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살인범이라는 불리한 주장을 편다. 심지어 살인과 관련되어 증언하는 내용이 제각각 다르다. 나중에 등장하는 목격자의 진술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자신의 진술이 진실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제각각 나름의 동기를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진실이라 증언하는 내용이 증언자마다 판이하게 다른 것은, 곧 진실을 자신들의 관점으로 제각각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 꾸며진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각각의 서로 다른 증언들이 나름의 논리와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분명한 사실은, 여인이 강간당한 것과 그녀의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뿐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 눈치챌 수 있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도, 결국은 절망을 암시하고 있다고 여겨질 정도다. 마음을 선한 방향으로 돌이키고 그저 희망하는 것만으로는 거짓말의 이면에 자리 잡은 인간의 이기적이고 추악한 민낯을 전부 다 가릴 수는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식의 주관성'이란, 내가 영화 '라쇼몽'을 나름의 의견으로 간추려 비평하듯이, 자기 나름의 관점으로 느끼고 분별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는, 생각이나 의견이 생각의 주체에 따라 각각 다를 수도 있는 것을 의미한다. 거듭 말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며서 말하는 거짓말과 허구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정신장애자가 아니라면, 거짓말이나 허구를 두고 단지 사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 혹은 관점의 차이라고 판단하거나 해석해서는 안 된다. 상습적인 거짓말은 그 사람의 본질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학과 예술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여담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자신의 몸에서 배어나는 담배의 악취를 스스로 맡지 못한다. 특히 비 오는 날 흡연자들로 꽉 찬 엘리베이터를 타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끔찍할 정도의 고역이다.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나간, 공용의 칸막이 화장실 안도 마찬가지다. 이는 오직 비흡연자들만이 일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살아가면서 거짓말을 안 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진짜 거짓말쟁이임에 틀림없다. 파멜라 메이어는 그의 책 『거짓말 알아채기』에서 "인간은 하루에 10~200회 정도의 거짓말을 하며 누군가와 첫 대면을 하는 최초의 10분 동안 평균 3회의 거짓말을 한다"라고 주장한다. 다른 수많은 연구들에서 인간의 거짓말은 본능에 속한다고 한다. 2015년 캐나다 맥길 대학의 심리학자인 빅토리아 탈와(Victoria Talwar) 등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어린아이들이 세 살 무렵부터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며 여섯 살 무렵이면 95%의 아이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실제로 거짓말은 우리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무엇보다 옳고 그름의 도덕적인 차원에서 거짓말은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짓이며, 당연히 비난받아야 하는 짓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의도적으로 숨기고 왜곡하고 속이는 거짓말은, 다른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과 거짓의 관계를 단순히 도덕적 차원의 옳고 그름의 문제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타인을 배려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하는 소위 ‘하얀 거짓말’(white lie) 같은 '선의의 거짓말'도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경우도 있다는 점에서 선의의 거짓말은, 거짓말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현실적인 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문학과 예술도 마찬가지다. 문학과 예술이 가진 힘은, 옳고 그름과 사실의 여부를 떠나서 작가의 상상에 의해서 표현하는 것들을 통해서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고, 거기에서 참다운 아름다움, 또는 진실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짓말이 인간의 본능이며, 선의의 거짓말이 용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서,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악의의 거짓말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는 사실이라는 전제를 갖추고 있을 때 비로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전할 때 누구나 할 것 없이 흔히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어김없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솔직하다는 것은 숨김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고, 정직하다는 것은 꾸미거나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진술하는 이야기에서 사실과 의견, 의견과 인용, 사실과 허구, 사실과 가정, 사실과 상상 등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밝히는 것은, 곧 정직하고 솔직한 말하기와 글쓰기의 기본이라 하겠다. 이러할 때 그러한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삶 그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고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유튜브를 포함한 SNS와 블로그 그리고 인터넷에는 온갖 말과 글들이 난무한다. 온갖 매체를 통해 수많은 말과 글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또 유통되고 소비되고 있다. 특히 최근의 유튜브는 사실의 진위 여부와는 관계없이 사람의 이목을 끌고 감정적인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개인의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더욱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말과 글들이 기승을 부린다. 이른바 거짓말도 잘만 꾸미면 돈이 되는 시대다. 그래서 진실을 빙자하여 사실과 정보의 진위를 가리기 힘들 정도로 조작되고 왜곡된 것들과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문학도 예술도 아닌, 사실을 가장한 허구와 거짓된 감상(感想)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거짓말을 부정적인 것으로 그토록 완강하게 거부하고 혐오함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어느 누구도 거짓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의 현실은 그야말로 크나큰 역설이다. 뉴스를 잠시 봐도 과거에는 정치·사회적으로 당연한 사실로 믿었던 것들이, 현재는 공공연한 거짓말이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가히 거짓말의 전성시대라 할 만큼, 거짓말이 흔하고 또 거짓말이 쉽게 먹히는 세상이라 해도 무리한 이야기는 아닐 듯하다.
문학과 예술의 테두리가 아닌, 현실의 삶에서 허구나 거짓말을 매개로 하여 온전한 소통이나 신뢰할 수 있는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기대한다거나 어떤 감동이나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마치 깎아 만든 나무 지팡이에서 새싹이 트고 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여하튼 의도적으로 꾸며서 하는 말이나 거짓말은, 라쇼몽 효과가 의미하는 인식의 주관성, 쉽게 말하면 관점의 차이 혹은 의견이나 생각의 차이 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공식적으로 가짜 뉴스의 붐을 일으킨 트럼프 정부의 대변인 콘웨이처럼, 대안적 사실과 같은 뻔한 거짓말을 관점과 해석의 차이로 알아 달라고 강요하는 사람들, 심지어 사실이 아닌 허구를 사실처럼 믿고 맹종하는 사람들, 그리고 타인에게 보여주는 삶 자체가 아예 허구인 사람들의 그러한 사고 구조가,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기 전에, 거짓말하는 것에서 그리 떳떳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부끄러운 것이 많은 나로선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한 알 한 알 한 알
다섯 개 놓으면 끝인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인용한 글은 경남 밀양 산외 초등학교 4학년 이수빈 학생이 지은 '오목'이라는 제목의 시다.(2018.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