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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Sep 03. 2018

글쓰기 오류

한 유력한 정치가가 기자들을 대동하고 교도소를 방문했다. 그 교도소는 남녀 무론하고 죄질이 악한 흉악범들을 가두는 악명이 높은 곳이다. 교도소장은 정치가에게 재소자들에 도움이 되는 좋은 말씀을 해 줄 것을 부탁했다. 정치가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윽고 정치가의 연설을 듣기 위해 교도소의 강당에 남녀 재소자들로 가득 찼다.  정치가는 단상에 올라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존경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하고 연설을 시작했다.


내가 쓰는 글은 대부분 잡문(雜文)이다. 그래도 글을 쓸 때 항상 염두에 두는 사항이 있다. 가급적이면 검증할 수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직접 체험한 것,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중에서 비문(非文), 논리적 오류, 비논리 이 세 가지는 특히 신경을 쓴다. 그래서 비록 개인적인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그 근거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자료들을 뒤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항상 이 세 가지에 자주 걸린다.


비문(非文)은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말한다. 사용된 각각의 단어들이나 어휘들은 문제가 없지만 문장의 앞뒤 연결이 올바르지 않은 경우도 해당된다. 논리적 오류는, '논리적으로는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사해 보면 옳지 않은 것으로 증명되는 논증의 유형'을 가리킨다. 쉽게 말해 말은 분명히 맞는 것 같은데, 실제를 따져보면 참이 아닌 경우다.


논리적 오류는, 주장하는 결론이 참(眞)임을 증명하는, 논증의 근거가 부족하거나 혹은 잘못 적용할 경우 발생한다. 비논리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비논리는 논리적 오류와는 달리, 문장과 문장, 말과 말 사이의 인과관계가 아예 성립되지 않는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비논리는 '무논리', 혹은 '억지'등과 비슷한 의미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로, '말도 안 돼!'에 해당되는, 소위 얼토당토않은 말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이해해도 되겠다. 비논리는 무언가를 종교적인 신앙처럼 맹신· 맹종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논리적 오류는, 최근의 막장 언론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SNS나 인터넷 게시판, 유튜브 등의 가짜 뉴스를 베껴서 보도를 하는 언론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가짜 뉴스의 허위정보를 가지고 정부를 비판하는, 마치 혼수상태에 빠진 듯한 정치인, 언론인, 정치 자영업자들이 허다하다. 이렇듯 논리적 오류나 비논리는 사실의 본질을 훼손하고 진실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내용을 전달하는 사람의 진정성과 식견의 수준을 의심케 하는 불신의 요인이 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드러내는 글쓰기에서 논리적 오류는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말이나 글에서 잘못된 것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능력은, 문해력과 관련이 있다. 문해력이란, 글을 읽고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문해력은 '문식력'이라고도 한다. 이는 비판적 사고의 핵심이 된다. 비판적 사고란, 주어진 정보를 분석하고 검증 평가하여 참을 가려내는 일련의 정신적 사고 과정을 말한다. 직관과는 관련이 없다. 직관은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에서 영향을 받은 느낌이나 감정 등이 무의식 상태로 존재하다가 현재의 상황에서 논리, 지각, 감정을 거치지 않고 자동적 사고로 발동되는 인식 작용이기 때문이다. 지각이나 감각 작용을 통해서 쉽게 인지할 수 있는 사물이나 대상과는 다르게 언어로 표현되는 말과 글은, 길든 짧든 끝까지 듣거나 읽어 봐야 비로소 그 내용이 가리키는 바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섣부른 직관에 휘둘리기 쉽다.


서두에 인용한 문장은 논리적 오류 때문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웃음 짓게 하는 유머다. 아래 인용문은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의 독백이다. 문장 안에 비논리와 논리적 오류가 함께 숨어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여인의 혼란스런 심리상태를 더욱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만약 인용문에서 비논리와 논리적 오류를 찾을 수 없다면, 자신의 문해력을 잠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인 여담을 덧붙이자면, 만일 아래의 독백이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면, 자신의 사고능력 혹은 정신상태를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나는 치유를 위해 바흐의 평균율 곡을 모조리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모두 다 친다면 아침에 나는 다시 처녀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앤절라 카터('푸른 수염')


글쓰기에서  비문과 비논리, 그리고 논리적 오류는 누구나 범할 수 있다. 물론 글쓰기라 함은 모든 형태의 글쓰기를 의미한다. 다만 비논리의  경우에 국한하여 논리, 실재, 추상, 정서 등을 가리지 않고 모든 창의적인 상상력이 허용되는 소설이나 시 등등과 같은 문학적  글쓰기는 제외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글은, 소위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는 에세이류에 해당하는 산문, 즉 논리적 글쓰기와 신변잡기의 생활 글쓰기에 해당하는 좁은 의미의 산문이다.


나는, 비록 잡문일지라도, 실제 체험이나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나름 신경을 기울여 글을 쓴다. 그럼에도 다 써놓고 다시 찬찬히 읽어 보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떠나서, 어김없이 비문과 논리적 오류가 글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따금 비논리도 발견된다. 그래서 상당한 시차를 두고 거듭 반복해서 읽어보지 않으면, 비문과 논리적 오류로 가득 차  있는 졸렬한  문장을 구분해낼 방법이 나에겐 딱히 없다. 이런 점에서 글쓰기에서 고쳐쓰기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비록 고쳐쓰기를 한다고 할지라도 비문이 어떤 것이며, 비논리나 논리적 오류의 개념과 이해가 분명하게 파악이 안 된 상태라면, 자칫하면 벌거벗은 임금님의 처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가끔 내가 느끼는 딜레마다. 여기엔 나름의  무지와 게으름도 한몫을 톡톡히 한다.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인 구양수(歐陽脩, 1007~1072)는 제대로 된 글을 쓰는데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행위를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 '간다(看多)' 많이 관찰하고, '고다(做多)' 많이 쓰고 ,'상량다(商量多)' 많이 토의해야 한다." 이를 구양수의 '삼다'(三多)라고 한다. 상량(商量)은 '토의하다, 논의하다, 회의하다' 등의 뜻이다. 이는 곰곰히 생각하고 두루 헤아려 검토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상량(商量)은, 자신이 생각의 주체로서 헤아리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의견을 듣고 나누고 필요하다면 질문하는, 토론을 통한 배움과 익힘의 행위 전체를 포함한다.
 

이는 북송의 시인인 진사도(陳師道 1052~1102)가 저술한 문학비평서인 『후산시화(後山詩話)』가  출전(出典)이다. 진사도(陳師道)는 자신이 강조하는 시(詩) 문학론의 중심인 '부단한 자기 연마와 반복 학습'의 논거로 '구양수의 삼다(三多)'를 인용했다. 그런데 구양수의 저술에서 삼다(三多)의 출전이라 확인할만한 글이, 짧은 내 능력으로는 찾아지지 않는다. 개인적인 추측으로, 진사도가 구양수의 여러 저술에서 글쓰기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를 간추린 것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여하튼 이 말의 의미는, 첫째 많이 읽고 보아야 하며, 둘째 많이 써야 하며, 셋째, 첫째와 둘째를 바탕으로 혹은 그와 더불어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는 의미가 되겠다.   '구양수의 삼다(三多)'는 글쓰기에서 비문과 비논리 그리고 논리적 오류를 구별하고 극복하는 훌륭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논리적 오류나 비논리에 곧잘 빠지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는 척하는 경우,  내가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할 경우, 내가 진실로 믿지 않는 것을 믿는 척하는 경우, 내가 실천하지 않는 것을 마땅히 행하는 것처럼 또는 체험하지 못한 것을 체험한 것처럼 말이나 글로 표현할 경우, 다시 말해 기대 ·가정 ·허구 등을 사실처럼 말할 경우, 이런 경우들에 어김없이 비논리 또는 논리적 오류에 빠지고 만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혹은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문제로 인정치 않는 태도에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문제를 바르게 개선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구양수의 삼다(三多)는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언어·인지 심리학자인 작가 스티븐 핑커는 말하기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낼 만큼 똑똑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뉴턴은(결코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1675년에 동료 과학자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좀 더 멀리 보는 것은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탔기 때문입니다.”라고 시인했다."(『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 클래식 2014)라고 말한다.  이는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는 또 다른 글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글쓰기의 충고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이 아니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이다."(스티븐 핑커, 'The Source of Bad Writing')

허물이나 실수가 없는 인간은 없다. 몰라서 저지른 실수나 허물은 제대로 알고자 하는 배움의 노력으로 바르게 고치면 된다. 모르는 것은 배우면 그 옳고 그름을 알게 된다. 문제는 모르면서 알기 위해 바른 것을 배우지 않는 데 있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바르게 고치려 하지 않는 데에 있다. 배움은 아무리 평생을 추구할지라도 그 끝이 없고, 정도(正道) 또한 없다.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1832~1893) 선생의 글로 마무리한다. " 내게 허물이 없는데 남이 나를 나무라는 것은 실로 내게 해(害)가 될 것이 없다. 내게 허물이 있는데 남이 나를 나무라지 않는 것, 정작 이것이 두려운 것이다. 허물이 작은데 나무람이 심한 것은 실로 유익하다. 허물이 큰데도 불구하고 나무람이 가벼운 것, 이것이 실로 부끄러운 것이다.( 省齋集/'燕居謾識')".  글을 다시 고쳐 쓰며 가만 생각해 보니, 나야말로 부끄러운 것이 참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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