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조국 사태를 보면, 루쉰의 소설 아큐정전이 오버랩된다. "사람들은 모두 아큐가 나쁘다고 말했다. 그가 총살당한 것은 그가 나쁘다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았다면 왜 총살당했느냐는 것이다."
소설 아큐정전에 등장하는 이 대목은 논리오류로 전형적인 '순환논증 오류'에 해당한다. 즉 '참'임이 검증되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내린 결론을 '참'이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그 근거로 삼은 전제부터 '참'임을 증명해야 한다. 이 점에서 '선결문제 해결 요구의 오류'라고도 한다. 다시 말해 근거로 삼은 전제가 '참'이 라는 것을 검증하지 못하면 결론은 '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각설하고 아큐는 자신이 대체 무슨 죄목으로 재판받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일자무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잡초 취급을 받는 허접한,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이다. 다만 이런 부당한 취급에 아랑곳 하지 않고 애써 허세를 부리고 허풍을 떠는 허당끼 다분한 인물이기도 하다. 속된 표현으로 비유하자면, 주변으로부터 사람취급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남을 해코지할만한 깜냥조차도 더욱 안되지만, 그래도 나대는 소위 시시껄렁하고도 허접한 '놈팡이' 부류다.
이런 아큐가 어느 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죄질이 극악무도한 폭도 및 강도 사건의 피의자로 내몰리게 된다. 결국 법의 판결대로 대중앞에서 공개 총살형을 당한다. 아큐는 자신이 왜 재판을 받으며 무슨 죄값으로 왜 처형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 모른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따라 가는 제 3자인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안타깝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누군가가 아큐의 손에 붓을 쥐여주었다. 아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붓을 쥐어 본 게 난생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살다 보면 처형을 당하는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큐는 그의 사형집행서에 그 내용도 모른 채 사인을 한다. 동그라미에, 그리고 그 아랫부분에 점하나를 찍었다. 영락없이 'Q'다. 그게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써 본 이름이 되버린 'Q'다.
최근 틈나는대로 SNS를 자주 살펴본다. 꽤 오랫동안 눈여겨 보았던 한겨레·경향·오마이 그리고 미디어 오늘의 변질을 의심하다가,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한 것은 지난 대선 무렵부터다. 물론 이들 언필칭 진보언론에 기생하여 기사를 소설처럼 쓰고, 받아쓰고, 베끼고, 짜깁고, 프레임을 짜고, 기득 권력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충성하는 일부 해바라기형 기레기들의 구역질 날 정도로 헌신적인 기여 덕분이라 생각한다. 그중에서 특히 '미디어 오늘'은 은근슬쩍 조중동의 기사를 소개하며 간접적으로 그 논조를 지지하는 듯한 모호한 태도를 보인지는 꽤 오래 되었다. 금번 조국사태와 엊그제 촛불집회를 계기로 불신의 명확한 근거가 하나 둘씩 더 늘어가고 있다. 그런데 블로그나 기성의 언론매체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사실적 근거에 입각한 정론직필의 지식인 글들을 SNS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겨우 인식했다.
그중에서 가끔 소위 제법 화려한 학벌로 프로필이 장식된, 자청타청 지성인 혹은 도덕군자 혹은 전문가, 학자연 하는 몇 몇 인사들의 글을, 그들이 내세우는 사회적 명함때문에 본의아니게 접하게 된다. 현 조국사태와 관련하여 이들이 몇 줄로 내뱉은, 도덕과 정의감에 활활 불타는 글들을 읽으면서 문득 의문이 든다. 공통적으로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를 요약하면, '조국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 천하에 나쁜 죄인이다. 그것도 죄질이 아주 나쁜 악질적인 위선자에다 거짓말쟁이 사기꾼이기때문이다'.
루쉰의 말을 잠시 차용 및 표절하여 논리를 적용해 보면, "조국은, 검찰에 의해 가족은 물론이고 사돈의 팔촌까지 샅샅이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그가 죄를 지은 나쁜 놈이라는 증거다. 만약 조국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나쁜 놈이 아니라면, 그의 가족 전체가 불의하고 부도덕하지 않다면, 왜 범죄자를 잡는 검찰이 저토록 엄정하게 온 가족 전체에 대하여 수사를 하고 있겠는가? 그것도 2달여 동안 수백명의 검사를 동원하여 이잡듯이 표적 수사, 강제수사를 왜 하고 있겠는가? 검찰 수사에 근거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마치 양파까듯이 그의 죄목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보다 조국이 나쁜 놈이라는 명백한 중거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자를 어찌 장관 자리에 그대로 놔둘 수 있는가?"
이렇듯 조국 법무장관의 처지가, 영락없이 아큐와 다름없다는 생각을 불현듯 해 본다. 다만 아큐와는 다르게, 태생이 금수저요, 사회적 엘리트 코스의 직행 관문이라할 수 있는 서울대 출신에 법학 전문 학자요, 심지어 서울대 교수로 이른바 엘리트 중에서도 상 엘리트라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게다가 민정수석이라는 정부 권력의 핵심요직까지 역임한 그야말로 다이야몬드 수저급 엘리트다. 단지 조국은 자기 자기 감독하에 있는 검사들에 의해, 언론에 의해, 자한당 정치인들에 의해, 자신을 물론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의 가족 전체가 무자비한 인격살인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차이뿐이다.
그런데 과연 조국이 실정법과 관련하여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대체 무슨 비위를 저질렀기에, 대체 무슨 불법을 저질렀기에, 또 도덕적으로 무슨 파렴치한 비리를 저질렀기에, 저들은 왜 저리도 분노하며 조국을 저토록 혐오하고 증오하는가? 주로 검찰, 자한당, 언론이 제공한 온갖 추측과 의혹에 사실과 감정을 애매 모호하게 뒤섞어 조국의 죄목이, 자신의 생각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확신하는 감정 논리, 추측논리가 대다수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가 논리적으로 순환논증의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정작 자신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현재 처하고 있는 도덕적· 정의적 실존과 관련하여, 자신의 감정이 표출되는 방식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거나 혹은 외면함으로써 자기를 기만하는,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노와 혐오와 증오가 향하는 주체와 대상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검찰이 그토록 요란스럽게 탈탈 털어도 뚜렷한 범죄사실이나 비리가 여지껏 찾아지지 않는 조국 말고도, 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명명백백하게 죄질이 나쁘고, 가히 반사회적 인격장애라 판단될 정도로, 부도덕할뿐만 아니라 부패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우리 사회에는 비일비재하다. 온갖 탈법과 편법과 불법과 비리에 능수능란한 부패한 사회 지도층, 정치인, 언론인, 교육자, 종교인 심지어 검·판사들까지 부지기수다. 심지어 이들은 하나같이 일제의 식민지 강점을 정당화하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을 적극 옹호 내지는 주장하며, 반민족의 매국행위 다시 말해, 일본극우와 아베의 혐한과 도발과 망언과 그 어처구니없이 황당무개한 논리적 근거에 정략적 명분에 적극 동조하는 토착왜구 짓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처럼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주체들이, 청산되고 개혁되어야 마땅한 부패의 당사자들이, 지난 국정농단의 책임있는 주체들과 부역자들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애국, 정의, 자유수호, 공정, 도덕, 운운하며 분노하고 혐오와 증오를 주도적으로 조장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의 모순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작 불평등엔 침묵하거나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불공평을 불공정하다고 분노하며, 사회정의, 양심 운운하는 이들의 도덕적· 정의적 이율배반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조국사태를 계기로 뜻하지 않게 우리들 모두가 떠안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모순들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드러난 모순들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대처하고 해결해야 할까를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자기 감정, 자기 연민, 자기 기만에 어쩔 수 없이 외부로 투사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하고도 불합리한 인간이라할지라도, 과연 분노와 혐오와 증오의 화살이 어디로 향하는 게 정상적인 감정이고 이성적인 올바른 사고인가?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진실로 스스로 교양있는 지성인이라 자처한다면 냉정히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현재의 조국 사태에 임하는 검찰의 엄정한 원칙과 절차에 입각한 현미경식 표적 수사는, 지난 503과 최순실의 국정농단, 그리고 장자연과 과거 정권의 검찰출신 법무차관이라는 피의 주체가 뚜렷한 성 스캔들 사건, 버닝썬 게이트 사건은 비교할만한 깜냥이 전혀 되지 않을 정도 어마하고도 살벌하다. 오죽하면, 대통령 고유의 인사권에 공공연히 대놓고 반기를 드는 것으로 착각될 정도로 법과 상식과 원칙을 벗어난 '미친 짓거리' 라고 하겠는가? 그럼에도 검찰이 엄격한 법원칙과 엄정한 법 절차를 외치며, 정작 조국 본인은 제쳐두고, 거의 모든 언론 및 자한당(Japan당)과 한 통속이 되어 두달여 동안, 그 주변을 전대미문의 압수수색을 강행하고 마치 이잡듯이 샅샅이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조국 장관에게 직접적으로 뭔가 책임을 물을 만한 마땅한 범법 사실 혹은 죄목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추측과 의혹만 난무할 뿐이다. 그럼에도 적폐청산의 대상이 오히려 개혁의 구심점이 되는 인물을, 공권력을 집행하는 부패한 하부 조직이 그 조직을 혁신하려는 수장을, 가족을 포함하여 전방위적으로 비토하고 법으로 정죄하려는 이상한 상황, 이게 작금의 현실이다.
양태는 비록 다르지만, 수 천년 전 소크라테스의 경우도 의미적 맥락에 있어서 만큼은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의 결과로 사약을 마시는 사형선고를 받고 생을 마감한다. 소크라테스 당시 그리스를 대표하는 보수 지식인들이 만장일치의 협의체로 소크라테스에게 내린 사형판결의 죄목은 세 가지다. 첫째. 소크라테스는 국가 공직의 추첨제를 비판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국가제도를 경시하게 만든 죄. 둘째, 병에 걸리거나 소송을 당할 때 아버지나 친척은 도움이 안 되며, 의사나 법에 밝은 자가 보다 더 유용하다고 하여 부모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게 만든 죄. 셋째, 호메로스의 시구를 악용하여 젊은이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그릇된 길로 이끈 죄.
정리하면,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는 전통적인 사회 시스템의 뿌리를 뒤흔드는 위험한 철학적 사고를 청년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신들이 정한 국가의 존립 기반에 의문을 갖게 하여 결과적으로 신성모독을 하였고, 그로써 미래세대의 주역인 청년들을 타락하게 만든 죄였다. 여기서 작금의 현실에 빗대어 신들을 '기득권'으로 신성모독을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대체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그는 자신이 확신한다고 생각하는 의견이 어쩌면 무지에 기인한 의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철학자다. 그래서 그는 자신 스스로 질문하였을 때, 자신이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끝없이 질문했다. 의심하고 질문함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깨쳐 나가는 사고의 과정, 이러한 변증과 검토의 과정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사실을 검토· 검증함으로써 진리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앙드레 지드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믿되, 진리를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을 의심하라"(「So Be It : The Chips Are Down」, 1952)고 말했다. 하물며 검증되지 않은 의혹에, 추측에 자기 내면의 그림자 또는 자기 감정을 이입하고 투사하여, 그것으로 진실이라 확신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과연 합당한 일일까?
나와 같은 아둔한 필부는, 조국, 그가 평소 신념처럼 부르짖었던 사회정의, 법정의가 참으로 옳고 정당한 말이라고 이성적으로 수긍을 한다. 또 그의 의견과 개혁의지에 진심으로 지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이념과 자신이 처한 현실의 삶이 다소 괴리가 있는 부유한 금수저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소위 '강남좌파'의 요건에 부합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서 만큼은 다소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즉 그가 말하는 정의롭고 도리에 합당한 신념의 내용에 대해서 만큼은 진심으로 공감하고 또 이성적으로 지지를 할 뿐, 막상 그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큰 기대를 가지거나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는다. 뚜껑을 열어봐야 속 내용물을 알 수 있고, 길고 짧은 것은 직접 대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옛 속담에 나름의 희망을 기댈 뿐이다.
심지어 나는 타인에게 자신의 삶이 아닌 자신의 신념을 주입하여 가르치고 계몽하려 드는 이른바 '입진보'들과 계급적 지적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하는 소위 '오만한 싸가지 없는 진보'들을 진심으로 싫어한다. 이렇듯 자신의 신념에 맞게 자기가 현재 누리는 기득권을 포기하거나 희생할 생각이 전혀 없는 부유한 엘리트 강남좌파들이 대부분 여기에 포함되는 것으로 인지하고 있다. 내가 가진 몇 안되는 편견과 선입견 중에서 입버릇 처럼 공공연히 싫어한다고 표명하는, 속과 겉이 전혀 다른 인간 부류들인 향원에, 나는 이들을 주저없이 포함시킨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현실의 경험에 따른 것이다. 숱한 타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들을 수단과 발판으로 삼아 사회적 계급적으로 기득권 진입에 성공한, 이른바 과거 사회 운동가 이력의 성공한 정치인, 고위 관료, 학자, 언론인들의 속과 겉이 다른 현실적인 민낯의 실태는 나의반면교사다. 그래서 옳고 바른 것에는 마땅히 지지는 하지만, 기득권을 포기 못하는 그들의 개인적 명예나 영달의 수단이나 도구로 사용되거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들러리가 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 각별히 애쓸 뿐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평소 소크라테스가 애용했던 말이라고 한다.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 수 천년전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남겼다.
죄목도 모르고 심지어 자신의 사형집행서에 왜 사인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채 총살형을 당한 아큐의 어처구니 없는 삶은, 자칫하면 내가 당면하는 현실이 될 수도 있는 불확실하고도 불투명한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다. 게다가 사회 구조적으로 기회 뿐만 아니라, 절차와 과정, 심지어 결과에서 조차 결정적으로 불공평하고도 불공정한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조국 사태는 이를 분명하게 입증하는 서글픈 반면교사다. 마치 '미친 개' 처럼 날뛰는 검찰이 조직적으로 남용하는 안하무인, 무소불위한 권력 남용의 조폭질은 결코 강건너 불구경 하둣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당면한 나의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내 가족의 비극적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무지의 함정에 스스로 빠져들지 않도록 각자도생의 심정으로 공부해야할 이유, 깨어 있어야 할 이유, 검찰개혁의 촛불을 함께 들어야 할 이유, 나아가 과거 역사의 치욕스런 전례를 기억하고 일제불매운동에 지속적으로 동참해야 할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성경의 계시록은 종말의 시대와 관련하여 이렇게 가르친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도록 내버려두고, 더러운 자는 그냥 더러운 채로 내버려두어라. 올바른 사람은 그대로 올바른 일을 계속하게 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여라."(요한계시록 22:11).(2019.9.30쓰고 10.4 정리하고 다시 고쳐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