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허튼소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르헤시아 Oct 10. 2019

문해력에 대하여

유머다. 중학생과 대학생인 의좋은 자매가 생전 처음으로 외국여행을 나갔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가까이 오자, 여행 가이드가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라고 신고서를 나눠 준다. 항목이 온통 영어로 된 신고서다. 자매는 동시에 신고서의 한 대목에 막혀서 한참 망설였다. 언니가 고심 끝에 옆자리에 동행한, 세련된 자태의 젊은 아줌마의 신고서를 슬쩍 컨닝했다. 동생은 언니 것을 참고하여 신고서 작성을 끝냈다. 가이드가 입국신고서를 확인하다가 자매의 것을 보고는 크게 웃으면서 다시 작성하라고 한다. 옆 자리의 아줌마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신고서는 이랬다. 

당황한 자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즈막한 소리로 가이드의 귀에 대고 물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알게 된 자매는 박장대소 하면서 신고서를 고쳐썼다. 근데 옆자리의 세련된 젊은 아줌마는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없이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내 신고서 작성을 끝냈다. 입국심사대에서 출입국 관리 직원이 세련된 아줌마의 신고서를 받아 들고는, 의아한 얼굴로 아줌마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다시 수정된 아줌마의 신고서는 이랬다. 

오늘이 한글날이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님 덕분에, 오늘 날, 우리 나라의 문맹율은 대략 1% 정도라고 한다. 문맹 (文盲)이란, '배우지 못하여 글을 읽거나 쓸 줄을 모름. 또는 그런 사람.'이라고 사전에 정의하고 있다. 유의어로는 '까막눈, 까막눈이, 무학' 이다.


어느 교육칼럼에서, 우리 사회에 문맹은 거의 찾아 보기 힘들지만,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 즉 '문해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걱정하는 글을 읽었다. 문해력의 결여는 학력 나이 지위 연령에 상관없이 고루 분포하고 있다 한다. 예컨대 '고지식'을 '지식이 높다'고 이해하거나, '대관절'을 '큰 관절'로 인지하거나, '을씨년스럽다'를 욕으로 받아들인다거나, '지양하다'와 '지향하다'의 의미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 이는 글을 읽고 쓸 줄은 알지만, 애당초 글에 나오는 단어나 어휘의 개념을 모를 뿐만 아니라. 맥락을 파악하고 내용을 이해하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개념 부재나 어휘력의 부족은,  문해력 부족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언어로 표현하여 전달하는 소통행위를 '의사소통'이라고 한다. 소통(疏通)은, 

"1.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2.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의사소통은 사회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로써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만일 일상생활에서 글이나 말로 표현된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면, 당연히 일상의 삶에 많은 장애 또는 갈등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현명한 사람들은, 소귀에 경읽기처럼 말귀를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거나 혹은 자기 말만하고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의당 "그러려니" 하고 무시를 한다. 그 때문에, 정작 본인은 자신의 문해력에, 의사소통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생활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해력의 부족은 인지에 관한 질병인 난독증과 다르다. 단어나 글자 자체를 인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뇌의 질병이 난독증이다. 이와 달리, 내용을 읽어도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해력에 문제가 있다. 만약 한 문장을 계속 읽고 있어도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무슨 내용인지 선듯 이해할 수 없다든지, 또는 문장의 전체 맥락이 아닌 특정 단어 자체의 의미에 집착하고 더 이상 이해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면, 혹은 글의 내용에 상관없이 일정 분량의 길이 이상을 넘어가는 장문의 글을 도무지 읽어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자신의 문해력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나도 가끔 나의 문해력을 의심할 때도 있다. 다행히 나는 나 자신이 아둔하며 변변찮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안다. 때문에 지금도 늘 사전을 가까이 한다. 혹 모르겠거나 혹 이해가 안되거나, 행여 의심이 되거나 하면 여지없이 각자도생의 심정으로 여러 관련 자료를 뒤져서 부족한 이해를 보충하고, 나름 제대로 알고 바르게 배우려 애쓴다. 


1956년부터 유네스코는 문해력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글을 읽고 쓰는 기초 능력인 ‘최소 문해력’. 그리고 글을 이해하고 의사소통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기능적 문해력’.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아는 독해력, 즉 단순히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글을 읽고 자기 생각,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 할 수 있는 힘이 곧 문해력임을 이해할 수 있다. 문해력의 부족은 독서량의 많고 적음, 학력, 연령, 지위, 교양 등과 아무 상관없다. 그 주 원인은 자기 생각없이, 즉 아무런 비판 의식없이 소극적으로 책을 읽는 독서 습관, 혹은 독서와 아예 거리가 먼 생활 습관에 있다. 만일 방금 언급한 '비판'이란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자동 인지되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그 사람은 문해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단정지어도 된다.


최근에 블로그나 브런치에 개방한 내 잡글에 뜬금없는 댓글이 달린다. 내 잡글들은 대부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담은 고루한 내용의 장문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는 이들은 정말 드물다. 그런 가운데 비록 내 개인의 생각이지만, 진중한 피드백을 담은 댓글을 만나면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비록 나 개인의 허튼 소리일지라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피드백임을 알기 때문이다.


글을 읽는다는 점에서, 블로그보다 진성 독자들이 훨씬 많은 브런치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여튼 블로그든 브런치든 내 잡글에 댓글이 달리는 일은 정말 드물다. 특히 블로그는 불손한 의도의 댓글은 대부분 키워드 차단에 의해 자동 삭제된다. 댓글의 내용에 따라 계정을 확인한 후에 유령계정의 의심이 들면, 가차없이 차단시킨다. 때문에 내 블로그는 매일 수백 수천의 방문자가 들락거려도 조용하다. 때문에 비록 허튼소리일지라도 마음이 동할때면 주저치 않고 나오는대로 속편하게 쓴다. 때론 마치 토하듯 내뱉은 까닭에, 중구난방으로 흐트러진 생각을 다시 정리하여, 보다 뜻이 분명해지도록 수시로 고쳐쓰기도 마음 편하게 한다.


여하튼 최근 댓글 중에, 정말 이 사람은 내 글을 제대로 읽었는지 또는 글의 내용을 이해하고 댓글을 다는 것인지? 궁금한 댓글들이 간혹 보인다. 왜냐하면 글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그러한 댓글이 도무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의 의미는,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쓴 잡글들도 마찬가지다.  어째튼 글을 읽지 않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나,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오로지 자기 말만 하는 사람들을, 심리를 굳이 애써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할만큼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상대할 가치 또한 전혀 느끼지 못한다.


며칠 전, '평등에 대하여' 글을 썼다. 그 글 중에 지극히 개인적인 내 경험에 입각하여, "사람의 말을 하지만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 있고, 소통이 아예 불가능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 나이· 학력· 지식· 지위· 성별에 상관 없이 말이다. "라고 썼다. 이는 내 편견의 한 자리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오늘 거듭 확인한다. 나는 이미 글로써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많이 토하였기에,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만을 덧붙일 뿐이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문자를 알지 못하는, 글에 어두운 수많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한다. 내가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백성들이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고 글로 소통하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한다." 세종대왕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오늘은 한글날이다. '나마스테' 라는 외국의 인삿말을 나는 참 좋아한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이 말을 함부로 사용하진 않는다.(2019. 10.9)

매거진의 이전글 왜 그토록 분노하고 증오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