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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Nov 09. 2019

다독이다

누구나 잘 아시다시피 '위로'라는 말의 사전적 뜻은,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이다. 위로에 해당하는 우리 말로는 '다독이다' 다. '위로하다'와 같은 맥락에서 '다독이다'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약한 점을 따뜻이 어루만져 감싸고 달래다."이다. '달래다'는,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흥분한 사람을 어르거나 타일러 기분을 가라앉히다"라는 뜻이다. '다독이다'라는 말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개인적으로, '위로'보다는 '다독이다'라는 우리 말이 정서적으로 더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흔히 심리 치유·상담의 현장에서 '스스로를 다독여라'라는 말의 의미를, '자기 합리화', 혹은 '자기 정당화'와 착각을 하거나 오해하여,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심지어 이를 권장하는 듯한, 의미가 미묘한, 유사 심리학에다 종교 혹은 문학의 탈을 쓴 이른 바 개똥철학도 있다. 온갖 심리학 이론, 철학의 지식, 문학적 수사, 논리, 종교적 믿음, 경험 등등을 총동원하여 자기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자칫하면 일종의 자기 기만에 빠지기 쉽다. 스스로 '다독인다'라는 말의 의미는 자기의 처지, 허물, 실수, 실책, 감정 등에 대하여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자기 정당화나 자기합리화는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고, 자기방어기제로써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그러나  '다독임'은 이와 다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온전히 수용한 상태에서 자기의 처지와 감정을 쓰다듬고 토닥이며 달래고 위로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때론 힘들어하는 누군가의 옆에 가만히 앉아 함께 하는 침묵의 행동만으로도, 자신이 언제나 그(그녀)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무언의 행위만으로도, 슬픔과 혼란에 빠진 누군가에게는 큰 정신적 '위로'가 될 수 있다. 경험 있는 성인(成人)이라면 누구든 어린아이를 효과적으로 달래는 것을 상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한 누군가가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좋은 말을 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 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훌륭한 조언이나 충고 등 좋은 말의 위로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아무런 판단 없이 아무런 질책 없이 아무런 비난 없이 그냥 그저 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온전한 의미의 '다독임'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의미의 '다독임'이 아주 어렵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을 신뢰할 수 없고, 자신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인정하고 수용하기는 더욱 어렵다. 하물며 타인에 대해서는 오죽하랴. '다독임'으로 위장한 자기 합리화나 자기 정당화는, 마치 중독 약물의 금단현상처럼 약 효과가 떨어지면 어김없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듯이, 마치 다이어트의 요요현상처럼, 비슷한 계기가 형성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악순환으로 이끌 뿐이다. 


아무리 자신의 정신력과 의지에 자신할지라도, 인간의 정신은 미처 의식하지도 생각지도 못한 가운데 의외로 쉽게 무너진다. 남이 알든 모르든,  드러내든 감추든, 자기 스스로 이해하든 못하든, 스스로 인정하든 못하든, 스스로 수용하든 안 하든 간에, 자기감정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자유'의 권리만큼이나 '자유'에 뒤따르는 개인의 자율적 책임이 중요하듯이, 심리 치료에서 '치유'와 함께 치유 이후의 지속적인 '자기 돌봄'이 더욱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담이다. 우스갯소리로, 남자는 '개' 아니면 '애'라는 말이 있다. 마냥 부정하기에는 거시기한 뼈 있는 말이다. 솔직하게 비유하자면, 졸(拙)한 나는 개보다는 애에 가깝다. 이 나이에도 여전히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인(自認)하기 때문이다. 굳이 '가깝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어느 쪽이건 간에 때론 치우치거나, 아주 가끔은 더 못한 처지에 거할 경우도 있다는 의미에서다. 벨기에의 시인·극작가 메이털링크(M. Marterlinck)의 동화 ' 파랑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꿈속에서 행복을 상징하는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뒤진다. 온갖 고생 끝에 마침내 파랑새를 찾을 수 있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되자, 아쉽게도 꿈에서 깨어난다. 꿈에서 깨어난 그들은 우연히 자기 집안의 작은 새장 속에서 파랑새를 발견한다. 결국 파랑새는 늘 자신들과 함께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마치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는 애처럼, 나를 다독인다. 나홀로 다독임의 이면에는 나를 따스하게 돌봐 줄 누군가를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런 판단 없이 그저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그저 아낌없이 내 말을 들어 줄 누군가를 하염없이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누군가에 바로 나 자신도 해당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끈을 나는 놓지 않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내 편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는 때때로, 마치 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토해내듯이, 마치 생리현상을 해결하듯이, 잡글을 배설하는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오늘도 어김없이 나는나를 다독인다.(2019.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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