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허튼소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르헤시아 Jul 11. 2019

인문학 자격시험

"학문을 함에 있어서 책 속에서만 진리를 구하려는 태도는 예전보다 더한층 심해져서, 때로는 영국, 때로는 프랑스, 때로는 독일, 때로는 러시아로 시끌벅적하게 뛰어다니지만, 대개 좀 똑똑하다는 자라 할지라도 몇몇 서양학자들의 말과 학설만을 표준으로 삼아 어떻다느니 무엇이라느니 하고 만다. 이것은 무릇 그들의 말과 학설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지 자신의 실재하는 본심(實心)에 비추어 보아 합당한지를 헤아린 것은 아니니, 오늘날의 이러한 모습을 예전과 비교한들 과연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을 떼어놓고 말하면 누구나 자기 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볼 것이며, 그 사람에게 물어본다 해도 그들의 말과 학설을 표준으로 합당함의 여부를 세밀히 살필지언정 자신의 마음을 표준으로 합당함의 여부를 그윽히 살펴본 적이 없음은 자인(自認) 할 줄로 안다. "-정인보('양명학연론', 1933년)


최근 경향신문의 오피니언(2019. 7. 7일 자)을 훑다가 기막힌 기사를 하나 보게 되었다. "당신의 인문학 점수는 몇 점일까요?" 읽어보니, '인문학 지식에 등급을 매기고 자격시험을 통해 인문학 지도사 자격증을 준다'라는 내용이다. 이런 황당한 기사가 나온 배경을 더듬어 보니 헤럴드 경제신문이다. 불현듯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옛말이 떠오른다. 여담이다. 쉽게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무당 일을 가르치는 전문 학원도 있다. 심지어 수백만 원을 들여 최면술을 배우는 무속인· 종교인들도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인문학이란, '인간다움의 실현', 즉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 진정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 실현의 방향을 제시하고 모색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의 의미를 생각하자면, 단순히, 문학예술· 음악· 종교· 학문 등에 지식 혹은 교양이 깊다고 해서, 인문학의 본래 의미에 걸맞은 자격을 갖춘 '사람다운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난센스다. 


나름 이해하는 인문학의 주안점은 철학처럼 생각의 문제, 통찰의 문제가 아니다. 문학 음악 예술처럼 재능 또는 지식과 같은 교양의 문제도 아니다. 철학, 음악예술, 문학, 역사, 언어, 신학(종교) 등 이 모두를 포함하는 인문학은 바로 '사람답게 제대로 사는' 실천의 문제에 주목한다. 인문학 명함을 내걸고 책을 내는 상업 작가들과 글쟁이들은, 자기 양심에 손을 얹고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재능과 인격은 별개다. 지식과 인격 또한 마찬가지다. 또는 희망하거나 생각하거나 통찰하는 것과 실천은 실제 현실의 삶에서 이율배반적일 수도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내 개인적인 삶의 부끄럽고도 뼈아픈 경험으로 아는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거짓 군자, 가짜 도학으로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훔친 자들도 없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학문이 그렇겠지만, 인문학 공부의 기본은 무엇보다 겸손과 성찰의 자세를 바탕으로 한다. 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여태껏 살아오면서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또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이 생긴다. 타인의 눈에 티끌을 보던 눈이 비로소 자기 눈 속의 대들보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성찰의 지점에서 필연코 참회와 반성이 뒤따라 나온다. 이러한 반성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자 하는 의지와 태도의 변화 그리고 행동의 실천 여부로써 그 진위를 검증할 수 있다. 


올바른 방향으로의 변화 혹은 개선은 오직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단어다.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도 공히 마찬가지다. 문제를 직시하여 각성하고 반성하고 잘못을 바로잡아 나가고자 하는 행동의 실천 과정을 통해 내적 갈등과 스트레스가 해소되기도 한다. 글을 쓰는 행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비록 제아무리 훌륭하고 고상하게 인문학을 논할지라도, 그 속에 자기 성찰과 자기 반성이 생략된 모든 논의는 마치 아름답게 색칠된 화려한 종이우산이 비가 내리면 일순에 추한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듯이 허울만 좋은 껍데기요, 죽은 담론에 불과하다.


사회를 권력(문화,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언론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권위와 명성 등등)을 가진 소수 엘리트와 가지지 못한 일반 대중으로 구별하는 시각. 이러한 가치관과 관점을 '엘리트주의'라고 한다. 엘리트주의자들은, 일반 대중은 자신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판단을 그저 '조용히 수용해야만 한다'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일반 대중은 이들에겐 그저 계몽의 대상, 즉 무지 몽매한 이들로써 가르침의 대상이나 그들이 지향하는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이들이 일반 대중을 사람이 아닌 가축 취급을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다르다. 굳이 구체적인 사례를 들지 않아도,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학· 예술· 종교· 학문· 교육· 언론· 정치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엘리트들, 지식인들, 그리고 심지어 기레기들까지 나서서 자기 본업을 망각하고 문화와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대중을 가르치려 시도하는 자들이 있다. 자기 전공· 전문분야가 아니면서도 자칭 타칭 선생이라 불리며, 전문가 행세를 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그중에는 그들의 재능· 학식· 지적 능력과는 별개로, 인격장애자, 극단적인 이기주의자, 심지어 반사회적 성향의 인물들이 의외로 많다. 이는 알만한 사람들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이렇듯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히 막장이라 할 정도로,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간에 올바른 가치관이 훼손되거나 실종된 증표는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저들은 비록 부끄러움을 못 느낀다 할지라도, 제 삼자로서 보는 내가 괜스레 부끄러울 정도다. 문화 권력, 경제 권력, 정치권력의 맛에 톡톡히 길들여진 국적불명, 정체성 불명의 이른바 '기레기' 언론은, 막장에 더하여 아예 난장판의 극단을 보인다. 인문학 자격시험은 그 수많은 결과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사람답게 제대로 사는 일'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누군가 주입시킨 것, 혹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을 그대로 따라서 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모 혹은 남이 주입시킨 가치관, 신념 등을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따라서 하는 것, 이를 심리학 용어로 '내사(introjection)'라고 한다. 다시 말해 자기 주관이나 의지 없이 단순히 다른 사람의 생각, 행동 방식, 잣대, 태도 등을 기준으로 삼아 정신적으로 의존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신경증 기제(Perls, 1976)로서, 내적 외적 갈등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 투사, 투사적 동일시, 인지부조화, 인지왜곡, 인지 편향, 중독(의존)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 의지와 주체성을 상실한 노예 상태나 자아가 없는 자동인형을 상상해 보라. 비록 생각하는 수고를 면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사는 일이 결코 '사람답게 제대로 사는 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답게 제대로 사는 일'은 생각하는 주체인 자기의 문제를 제쳐두고 결코 외부나 타인의 서푼어치 지식이나 교양, 가치관의 잣대로 함부로 재단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그들이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를 찾도록 돕는 것이다."라고 통찰한 바 있다. 갈릴레이의 이러한 통찰은 바로 인문학이 지향하는 바라 하겠다.


기막힌 심정에 사족으로 단다고 시작한 글이 어쩌다가 길어졌다. 어쨌든 50문항의 시험으로 등급을 매겨 인문학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을 주고, 심지어 특급의 경우, 인문학 지도자 인증까지 해주겠다고 하니 지나가는 소가 다 웃을 일이다. 


옛 한시에 이런 글귀가 있다. "겉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은 사람이 아닌 짐승도 있다(看面人皆人 察心人或獸)". 인문(人文)은 한자말로 '사람의 무늬'라는 뜻이다. 이와 반대되는 말을 굳이 찾으라면, 반 인문(反人文)이다. 그 뜻은 '사람의 무늬가 아닌 것'에 해당한다. 시험을 치러 인문학 등급을 매기고 인문학을 지도할 자격까지 주겠다는 생각은, 사람의 가치를 마치 물건처럼 상품 가치로 취급하여 등급을 매기는 소위 '물신주의'의 전형에 다름없다. 이는 인문학의 본질을 무색게 하고, 그 존재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그야말로 인문학의 탈을 쓴 엘리트주의의 전형적인 반지성, 몰지성, 그리고 이에 편승한 상업성의 증거라 하겠다. 인문학 자격시험이라는 이런 기막힌 발상을 한 사람, 언론 집단, 그리고 거기에 집필자로 혹은 기획자로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반인문에 해당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인문학 자격시험 운운하는 자들에 대하여 보통 사람에 불과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무엇보다 우선하여 그들이 '사람의 무늬'를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바로 '사람됨'의 확인 작업이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無羞惡之心 非人也)'. 맹자의 말이다.(2019.7.9 쓰고 7. 11 정리하고 다시 쓰다 / 또 7.12 다시 고쳐 쓰고 정리하다)


※ P.S: 2019. 7.9 포스팅한 경향신문의 칼럼, '당신의 인문학 점수는 몇 점일까요?에 사족으로 달았던 글이다. 오늘(7.12) 다시 읽어보니 너무 장황하고 중언부언한 게 역력하길래, 생략해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에 지장이 없는 예시와 인용문 대부분을 다 덜어내고 다시 고쳐 썼다.  '글은 자기의 뜻을 드러낼 뿐이다'.  다시 고쳐쓰기 이전의 글은 어찌 보면 내가 비판한 이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자기 뜻은 묻어버리고 남의 뜻만 살리는 쓰레기 글이란 바로 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거다. 선무당이나 바담풍 선생이 따로 없다.  내가 딱 그꼴이다. 고쳐쓰기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한다. 참고로 인용문들은 블로그 기존 포스팅에 원본으로 게시한 내용들이다.(2019.7.12)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배심원들'(201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