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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Jun 29. 2019

영화 '배심원들'(2019)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래." "제가 그래서 다시 생각해 봤는데요. 저도 이제 모르겠어요."...."모르겠지 당연히. 당신 형사도 아니고 뭣도 아니잖아. 어떻게 알겠어. 목격자가 제대로 봤는지 못밨는지 재판부가 다 판단을 합니다. 재판부가. 그게 사법 시스템이고 여기 있는 판사, 검사, 변호사 전부 다 엘리트예요. 그 사람들이 계획 살인이라잖아. 그냥 모르겠으면 그 사람들 생각대로 따라가면 되는 거예요." "그럼 아저씨 생각은 뭔데요?" "뭐야?"  "판사, 검사, 변호사 말고 아저씨 생각이요." "지금 여기서 내 생각이 왜 중요합니까? 다 위에서 생각하는데..."


위의 대화는 오늘 본 한국 영화 '배심원들(2019)'에 나오는 대사다. 좋은 영화다. 얼마 전에 본 한국 영화 '증인' (2019) 못지않게 남다른 울림과 여운을 내게 주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뭔가 극적이거나 과장이 적어 억지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은 아주 무거운 주제를 지극히 상식적인 방식으로 설득력있게 풀어가는데서 나온다. 영화의 주안점은 판사, 검사, 변호사 등 소위 엘리트와 전문가 등 나름 사회적 권위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무언가 '특별한' 사람들의 관점에 있지 않다. 대한민국 재판 사상 최초로 국민 참여 배심원으로 선정된 보통 사람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에 기초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 무엇보다 소위 위세등등한  '갑'들의 무소불위한 권위적 판단보다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을' 들의 '합리적인 의심'에 초점을 맞춘다. 


참고로 '합리적 의심'이란, 대법원의 판례(2011.01.27)는 이렇게 정의한다.  "합리적 의심이라 함은 모든 의문, 불신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경험칙에 기하여 요증 사실과 양립할 수 없는 사실의 개연성에 대한 합리성 있는 의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관념적인 의심이나 추상적인 가능성에 기초한 의심은 합리적 의심에 포함된다고 할 수 없다." 


말이 좀 어렵다. 이를 쉽게 풀이하면, '검사가 주장하는 증거 및 사실과는 달리, 피고인이 주장하는 사실이 상식적이고 개연성이 있어서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의심'이 곧 '합리적 의심'이다. 이러한 경우, " ‘의심스러운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을 따른다’는 원칙에 따라, 판사는 유죄를 선고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다"라고 한다. 물론 '합리적 의심'에 따른 이러한 불문률은 오직 판사의 재량권, 즉 판사의 '바른 양심'에 의해 좌우된다. 


생각이 없는 사람들 혹은 생각할 여력을 잃은 사람들은, 비록 상식에 어긋나는 일일지라도 그것에 대해 의심할 하등의 이유조차 갖지 못한다. 그저 사회적으로 권위를 가진 엘리트들의 판단에 따라서, 전문가들의 진단에 따라서,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그들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 심지어 그게 사실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미리 정해진 결론에 따라 만들어진 판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애당초 하지 못한다. "그냥 모르겠으면 그 사람들 생각대로 따라가면 되는 거예요."  


루쉰의 단편 '아큐정전'(1922년)에서 대중들은, 주인공 아큐가 사형당한 것은, 재판부가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릴 만큼, 그가 무언가 극악무도한 나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여기엔 결과에 따른 근거만 존재할 뿐, '왜?'라는 근본 원인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아예 생략되어 있다. "참으로 애닯지 않은가? 나는 나일 뿐인데, 누가 그것을 옳다고 해야만 옳다고 말할 것인가?" 담원 정인보 선생의 한탄이다. 사회적 권위를 가진 기득권 엘리트 집단들이 보통 사람들을 도구나 수단 취급, 좀 더 가혹하게 말하자면 '가축 취급'하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여담으로, 권위있는 누군가의 판단 혹은 이론 또는 생각에 전적으로 의존할 뿐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사용할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들은, 잠시 칸트의 말을 빌리면, '계몽되지 못한 미성숙한 상태'의 사람들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리면, 이들은 자기 주체성이 상실된 사람들로 주위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에 똑같은 생각을 하는  '자동인형'에 다름 없다. 계몽의 뜻은,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어 있거나 의식이 덜깬 사람들을 가르쳐서 깨우쳐 줌'이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1784년) 글에서 ‘계몽’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 “계몽이란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의 상태(Unmundigkeit)’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미성숙의 상태'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 이다. 이러한 상태에 스스로 책임이 있다함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이성 자체의 결핍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가 없기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결단과 용기는 미성숙의 상태에서 깨어나기를 진정으로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모르는 한 어떠한 통찰도, 결단도, 용기도, 한갓 신기루와 같은 부질없는 일이 될 뿐이다. 


현실적으로, 오랫동안 타성에 젖고 관행에 익숙한 한 개인이 스스로 미성숙 상태임을 깨닫는 일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스스로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여하튼 아닌 것을 아니라고 혹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또는 모른다거나 내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여러 이해관계가 뒤엉킨 사회적 삶에서 의외로 쉽지 않다는 사실은 일상의 흔한 경험이다. 모두가 '예' 라고 하는 상황에서 홀로 '아니오'라고 말하기는 남다른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모두가 다 '안다'고 하는데, 유독 나 혼자만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실토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삶에서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내 자유 의사로 산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 생각을 나 아닌 다른 사람 또는 사회· 문화· 관습 등 외부의 권위나 기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거나 혹은 잠재우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째튼 잠자던 생각이 깨어나는 일은 웬간해선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영화는, 평범한 사람들이 좌충우돌 엮어가는 특별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늘 놓치고 살아 왔던 무언가를 일깨워 준다.  "제가 그래서 다시 생각해 봤는데요. 저도 이제 모르겠어요." 내가 그것에 대해,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시점으로부터 의문이 생기고, 의문이 생김으로써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생각이 깨어나기 시작하고, 생각이 깨어 나면 비로소 평소 생각할 하등의 이유조차 갖지 못했던 실체적 진실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아저씨 생각은 뭔데요? 판사, 검사, 변호사 말고 아저씨 생각이요." 


(2019.6.24 쓰고, 6.29 고쳐쓰고 정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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