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허튼소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르헤시아 Jun 02. 2019

사람의 무늬(人文)

"해와 달과 별(日月星辰)은 하늘의 무늬(天之文)이고, 산천ㆍ초목(山川草木)은 땅의 무늬(地之文)이며, 시서ㆍ예악(詩書禮樂)은 사람의 무늬(人之文)다.  하늘의 무늬는 기(氣)로써 이루어지고,  땅의 무늬는 형상(形)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람의 무늬는 오직 도(道)로써 드러난다. 그래서 무늬가 있는 사람(文者)을 일컬어 ‘도(道)를 싣는 그릇이다(載道之器])’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인문(人文)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도(道)를 얻게 되면, 시서ㆍ예악의 가르침이 천하에 밝아서 해(日) ㆍ 달(月) ㆍ 별(星)이 섭리와 질서에 따라 운행하고, 이에 더불어 만물이 두루 조화를 이루어 고르게 다스려진다. 문(文)의 극치는 바로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진다 하겠다."(정도전, '도은문집서')


위의 글은 삼봉 정도전 선생이 인문 즉 '사람의 무늬(人文)'에 대해 말씀하신 글이다. 알다시피 무늬는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다. 표범이나 얼룩말의 무늬를 인위적으로 지운다고 될 일은 아니다. 우스갯소리로 '호박에 줄 긋는다' 해서 호박이 수박이 될 리는 만무하다. 과거 미국의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 유세 중에 "돼지 입에 립스틱을 발라도 돼지는 여전히 돼지다. 잡은 지 오래된 생선을 종이에 싸고는 '변화'라고 해봤자 고약한 냄새가 나기는 마찬가지다"라고 한 말도 같은 맥락에 있다.  태생으로 타고난 본질 혹은 본색은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다. 그럼에도 줄 그은 호박을 수박으로 확신하는 이도 있고, 심지어 사슴을 말이라 해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있으니,  어리석고 둔한 나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사람의 무늬는 어떠한가?  "사람의 무늬(人文)는 오직 도(道)로써 드러난다". 정도전 선생의 글을 바탕으로 나름 이해하자면, 사람의 무늬는 외부의 물질적인 것이나 외면의 껍데기에 인위적으로 그려진 것으로 특정할 수 없고,  반드시 마음에 쌓은 것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시서예악(詩· 書· 禮· 樂)으로 발현한다.  다시 말해 속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혹은 그 질적 수준의 정도에 따라 드러나는 사람의 무늬가 추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의 무늬를 선명하게 드러나게 해주는 '도(道)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면, 노자의 도덕경을 포함하여 여러 관련 문헌에서 논하는 도(道)의 개념은 어리석고 둔한 나에게는 딱히 실감되지 않는, 여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막연할 뿐이다. 공자의 말씀에서 찾아보니, 공자는 제자들에게 도(道)를 집안의 출입문으로 비유하여 제자들에게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 '누가 문을 통과하지 않고 방을 나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왜 이 도를 따르는 사람이 없는가?' '선비는 도에 뜻에 두어야 한다.'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는 더불어 도(道)를 이야기할 수가 없다.' '아침에 도를 알게 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등등. 또 후대에 공맹의 사상을 학문으로 재정립한 성리학을, 처음엔 도학(道學)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학에서 도(道)를 중요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공자는 도(道)를 이토록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면서도 단 한 번도 명쾌하게 도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정의 내리지 않았다. 다만 여러 강조한 말씀들로 미루어 도(道)라는 것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어떤 길'이라는 것을 추측할 따름이다. 도의 개념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 이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다. "하늘이 명령한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道)’를 익혀 아랫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도(道)라는 것은 잠시도 벗어날 수 없으니, 벗어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이 때문에 군자는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여 삼가며, 남들이 듣지 않는 곳에서도 염려하고 두려워한다(是故 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나름 정리하면 도(道)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실현하는 삶(인간다움의 실현)'이다. 이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따르고 실천해야 할 것으로 공자가 강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내용은 공자가 가르친 시서예악(詩· 書· 禮· 樂)으로 그 안에 도(道)의 요체가 담겨 있다. 공자가 '배움(學)'과 '익힘(習)' 더불어 '실천(實踐)'과 '가르침(敎)'을 중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뚜렷해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이비 이단종교를 제외한 역사성과 정통성을 갖춘 여러 종교에서도 하늘이 부여한 천성(天性)에 따라 '사람답게 사는 일' 혹은 '인간다움의 실현' 은 공히 핵심 되는 주제 중의 하나다. 사람의 본색은 외면 혹은 외형을 치장한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양상으로든 드러나게 마련이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던 곰팡이가 습한 방 안에서 순식간에 피어나듯이, 상황과 조건이 맞춰지면 어김없이 그 본색이 드러난다. 


예수는,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옛 글에도 '마음에 쌓인 것이 밖으로 표현된다'라고 하였다. 경험에 따르면, 평소 언행과 태도 그리고 일상의 자세 및 표정에서 그 사람의 본색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단지 눈여겨보지 않아서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특히 말과 글의 경우,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게 훌륭하게 고상하게 치장할지라도, 그 사람의 내면에 쌓여 있는 것은 비록 스스로 애써 감추거나 의도치 않아도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다. 


"똥을 푸는 자는 그 악취를 싫어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익을 도모하기 때문에 참는 것이며,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는 자는 그 교만을 싫어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익을 바라기 때문에 감수하는 것이다. 지금 신분이 높은 자에게 아첨하는 것을 보고 치욕스러워하지 않는 것을 비루하게 여긴다면, 이는 똥을 푸는 자를 보고 악취를 모르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는 것과 같다.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후한 모습과 깊은 정은 비록 진심에서 나온 것 같아도 그 속마음은 알 수 없다. 저 얼굴빛은 근엄하지만 마음이 나약한 자는 늘 이익에 유혹되기 때문에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의심하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은 믿는다. 이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니,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둑에 비유한 성인의 말씀이 어찌 나를 속인 것이겠는가."(윤기, '利設')


여담이다. 바른 이성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사슴이 말로 보일 리는 없다. 더욱이 늑대를 양으로 볼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기록에는 이런 상식 밖의 일들, 이성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일들이 버젓이 존재한다. 최근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안동 유림 단체의 대표들이 자유한국당 대표와 간담회 중에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100년에 한번 나오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면서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다"라는 뉴스 보도(2019.5.13일자)를 본 적이 있다. 그야말로 과거 언론 기레기들이 503에게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라고 극찬하였던 것과 버금갈 만하다. 일반화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유학자, 한학자, 동양학자, 인문 작가, 등등 그중에서 소수에 불과한 몇몇 인사를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이들의 견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회적으로 꽤 이름이 알려진 자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개인적으로 이해하는 공자의 사상, 동양 사상, 유학사상의 정수와, 그리고 저들이 입버릇처럼 논하는 말과 글들과, 그리고 저들이 삶의 실제에서 보여주는 것들과 극명하게 서로 모순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위에 인용한 무명자 윤기 선생은 이러한 모순의 근원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중국 유학의 이단아로 취급받는 양명학자 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요리조리 뒤집는 짓이나 반복하여 세상을 속이고 이익을 차지하니 명색은 처사인데 그 마음은 장사치나 다름이 없고, 입으로는 도덕을 외치지만 뜻은 개구멍을 파는 도둑질에 있다. 명색은 산림처사라지만 마음이 장사치나 진배없으니, 이 얼마나 비천한 꼬락서니인가?" (이지, '又與焦弱侯')


영재 이건창 선생은 말하기를, "만약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나를 앞세우는 태도가 있을 경우에는, 비록 그가 읽는 책이 성현의 책이고, 입는 옷이 성현의 옷이며, 행실이 성현의 행실을 따르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은 오히려 천하의 용렬한 사람들과 끝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 용렬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도학(道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면, 이는 안될 말이다. 더욱이 천하의 용렬한 사람들을 끌어다가 자기 도학(道學)의 당을 만들어 당세에 호령하며 남들이 감히 자기 잘못을 거론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옛 성현들과 비교하여 어떠하겠는가? 자기는 나날이 높아지고, 나를 앞세우는 태도는 나날이 커지며, 사사로움은 나날이 굳어지고, 이익은 나날이 쌓여간다. 그 누가 이런 도학(道學)을 하고 싶어 하지 않으랴! 그리하여 경쟁하고 빼앗는 형국이 만들어지고 화란(禍亂)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건창, '原論')라고 한탄하였다.


여하튼 지금껏 살아오면서 경험한 바로는, 사회적으로 알려진 이들 중에서 분명 형색은 사람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멋지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거나 순수하거나 고상하거나 지적이거나 고결한 껍데기만 휘황찬란할 뿐, 정작 사람의 무늬가 잘 보이지 않는 이들이 간혹 보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는 어느 시인의 글귀가 뜬금없이 새롭다. 자세히 볼수록 예쁜 게 아니라 오히려 추하고, 오래도록 볼수록 알면 알수록 사랑스러운 게 아니라 오히려 미워지니 더욱더 그렇다. 애매모호하여 그 실체를 분간키 어려운 것은 가짜 혹은 사이비일 가능성이 높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현실의 뼈저린 경험이다. 눈에 보이는 아름답고 훌륭한 외형에 의지하여 기대가 클수록 실망은 더 큰 법이다. 사람에 대한 실망이 커질수록 분노와 혐오와 적개심 또한 여지없이 마음에 비집고 들어오니 때론 난감한 일이다.


형암 이덕무 선생의 글, '이목구심서'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기이하고 빼어난 기운이 없어지면 어떤 물건이고 모두 평범하게 된다. 산(山)은 이 기운이 없으면 깨어진 기왓장에 불과하고, 물(水)은 이 기운이 없으면 썩은 오줌과 다름없다. 학문을 하는 사람(學士)이 이 기운이 없으면 마른 풀을 묶어 놓은 것과 다름없고,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하여 마음이 열려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方外)이 이 기운이 없으면 진흙을 뭉쳐 만든 인형과 다름없다. 무부(武夫)가 이 기운이 없으면 그저 밥통일 뿐이요, 문인(文人)에게 이 기운이 없으면 그저 때 주머니에 불과할 뿐이다." 


한때 동물원에서 철창 우리에 갇힌 침팬지를 본 적이 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지금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저를 구경하는지, 저가 나를 관찰하는지, 아니면 무심히 쳐다보고 있는지, 내가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으니 도무지 모를 일이다. 만일 저와 나를 극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의 무늬가 내게 있다면 과연 저 침팬지의 눈엔 어떻게 보일까? 어항에 갇힌 아름다운 관상어를 내가 구경할지라도 그 심사는 피차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나 스스로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심히 지나쳤을 뿐이다. 하물며 살면서 오다가다 알게 모르게 스친 인연들은 오죽하랴. 이제 옛 선현들의 글에 나를 가만히 비춰보니, 내가 남 말 할 처지는 아닌 듯하다. 사람의 무늬는 고사하고, 여전히 내 속에 왜 이리 때 주머니가 덕지덕지 많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2019.6.1)

매거진의 이전글 껍데기는 가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