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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Oct 07. 2019

평등에 대하여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나오는 의미심장한 구절이다. 평등(平等) 의 사전적 의미는, "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을 뜻한다. 이처럼 평등의 개념에 잠시 비추어 생각해 본다면, 이 구절은 생각없이 넘기기엔 무언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그래서 의미심장하다는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위 대목이 시사하는 바는, 결국 '모든 인간은, 현실적으로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나를 이끈다. 소설에서, 세력 혹은 집단의 헤게모니(주도권)를 장악한 특정 계층의 입에서 나온 말이란 점을 상기한다면, 이는 평등에 관한 환유가 아니라 소수의 특정 계층들이 현재 누리고 있거나 혹은 가진 특권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말임을 나름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조지 오웰은, 어쩌면 개별의 인간으로서는 생래적으로 평등할지는 모르나, 집단 혹은 사회적 계급에 소속된 사회 정치적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평등할 수 밖에 없다는 사회적 인간의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는 생래적인 불평등, 즉 태어나면서부터 신체적, 정신적 능력, 환경 등의 차이에 따른 불평등, 그리고 사회적인 차원의 불평등, 즉 상호 합의와 계약에 따른 사회적(도덕적) 불평등을 이미 논한 바 있다.


이처럼 평등을 말하고는 있지만, 말하는 주체가 어떤 입장, 가치관, 관점, 혹은 이해관계에서 말하고 있느냐에 따라 원래의 단어가 가진 개념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는 적극적으로 곰곰히 생각하지 않으면, 원래의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을 좀처럼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 예컨대 독재자가 강조하는 자유 혹은 정의, 부자가 말하는 평등 또는 자유, 혹세무민하는 이단 사이비 종교인이 부르짖는 사랑, 기타 등등은 보통의 사람들이 흔히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는 자유, 정의, 평등, 사랑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는 말이다.


과거 독재정권의 하수인들과 잔당들 그리고 지난 국정농단 부역자들이, 흔히 민주주의 또는 경제 앞에 유독 "자유"를 그토록 강조하며 특정 개념 또는 단체명 앞에 무차별적으로 갖다 붙이는 이유도 그렇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소위 반공, 북한의 일당 독재 공산주의 사회와의 차별에 그 뜻을 두고 있다고 자칭 의미 부여를 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현재 누리는 기득권을, 누구의 간섭도 심지어 법의 간섭도 받고지 않고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말하기 때문이다. 마치 무소불위의 지난 독재정권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난 독재자들이, 그 독재자들의 마름들이, 하수인들이, 부역자들이 더 나아가 과거 친일매국노 반민족행위자들이, 또 현재 토착왜구로 지목받고 있거나 스스로 커밍아웃 한 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개념의 정확한 이해는 인간 상호간의 바른 소통과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 올바른 변별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건이다. 흔히 양식이 있는 멀쩡한 사람들이 사기꾼들에게 사기를 당하는 주요 원인은, 대부분 소통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착각이나 일방적인 자기 해석과 자기 기대에 따른 어처구니 없는 오해에 기인한다. 인간관계에서 흔히 발생하는 오해로 인한 갈등과 충돌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대부분 소통의 결여, 소통의 부재의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어느 쪽이건 간에 개념의 무지 또는 개념의 결여로부터 기인한다는 말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사투리에 관한 오래된 유머다. 한 경상도 시골 청년이 군대에 갔다. 최전방에 배치받아 야간경계 초소에 배치되었다. 처음으로 야간 경계임무를 부여받았다. 찰흙같이 어두운 밤에 교대를 하려고 초소에 접근하자,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갑자기 "정지!"하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잔뜩 긴장한 청년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서 순간적으로 당황한 순간, 뒤이어 "암호"를 묻는다. 청년은 얼결에 "사분"하고 크게 외쳤다. 그러자 청년을 향해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그날 암구호는 '비누' 였다. '사분'은 '비누'의 경상도 사투리다. 토종 경상도 분이라면 웬간하면 익히 아는 말이다.


누군가가 내게 나무에 대해 말하면, 굳이 복잡한 문해나 연상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듣는 즉시 나무로 이해하는 이유는, 나무에 관한 보편적인 개념이 이미 내 사고의 틀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普遍)은 '일반적으로 널리 그리고 두루 통함'을 뜻한다. 따라서 어떤 사물 혹은 현상의 보편적 개념이 자기의 사고 속에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이해 불능, 소통 불능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애당초 '보편' 혹은 '개념'이란 단어의 뜻을 모르면 '보편적 개념'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울러 말하는 바가 정확하게 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말하는 이의 경우, 대상을 기만할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원래 개념을 호도· 왜곡하는 행위는 당연히 여기서 제외된다.


예컨대, 만일 나무를 말하는데 꽃으로 인지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정상적인 사고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인지력이나 사고력에 분명 문제가 있음을 쉽게 알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또 만약 누가 사슴을 말이라고 황당한 주장을 한다고 가정하자. 만일 정상적인 사고력 가진 사람이 그 주장대로 사슴을 말이라고 인정하고 심지어 적극 옹호· 동조까지 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 경우 이 사람은 사슴 혹은 말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거나, 아니면 어떤 이해관계에 얽혀서 자기를 기만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전자는 주로 맹목적인 신뢰에 바탕을 둔 것이고, 후자는 주로 이익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나름 생각한다. 다시 말해 후자의 경우, 아니오라고 부정하는 것보다 양심을 억누르고 자기를 기만하는 쪽이 어떤 형태의 훨씬 더 큰 이익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평등에 관련한 한 일화 (逸話)를 살펴보자. "한 포도원의 주인이 하루 동안 일꾼들을 모집하였다. 오전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을 할만한 사람들을 찾아 일당 10만원의 임금을 제시하였다. 일군모집은 끝이 났고, 해가 지자 주인은 일을 마친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였다. 그런데 오전 6시에 온 사람이나, 오후 3시에 온 사람 가리지 않고 모두 똑같이 10만원의 임금을 받았다. 이에 오전부터 참가한 일꾼들이 불평하였다. 자기들은 일을 더 많이 하였는데, 왜 늦게 온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느냐고 주인에게 따졌다. 그런데 주인이 오히려 불평하는 일꾼을 꾸짖었다. 나는 네게 잘못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 너와 10만원의 임금을 약속하고 나는 그 약속을 그대로 지켰다. 그러니 나중 온 사람에게 신경쓰지 말고 네 몫을 챙기고 네 갈길이나 가라.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똑같은 임금을 주는 것은 내 뜻이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데 네가 왜 불만이냐? 내가 네 기대와 생각과 다르게 선하게 행동했다고 해서, 네가 나를 어찌 불공정하고 악한 사람으로 여기는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일꾼들이 불만을 제기한 불평등, 불공정의 근거가 되는 개념이 바로 공평이다. 공평의 뜻은 사전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바름(공정함)’이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평등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일꾼들과의 약속에 따라 전혀 치우치지 않고 공정했다. 따라서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불공평과 불공정은, 과정과 결과에 상관없이, 오롯이 일꾼들의 관점과 기대에서 전적으로 일꾼들 개인의 감정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포도원 일군들의 사례에서 불평· 불만을 제기하는 일군들의 입장은, 현실의 경험으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공평한 대우를 받기 원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특별한 이유나 사정이 개입하지 않는 한, 내가 노력한 만큼, 내가 일한 만큼에 어울리는 정당한 댓가 혹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자꾸 다른 이들의 밥그릇의 형평에 눈이 간다. 비록 평등일지라도 평등하기 때문에 오히려 결과적으로 불평등과 불공정을 느끼게 되는 게 사회적 인간이 처한 모순의 한 단면이다. 이렇듯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회적 갈등과 충돌은,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평등의 문제보다는, 주로 과정 혹은 결과로써 드러나는 공평과 공정에 관련하여 벌어진다.


공평의 개념과 혼동하여 사용하는 개념이, 바로 '공정(公正)'이다. ‘공정(公正)’은 사전에, ‘공평하고 올바름’으로, 공평(公平)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름' 으로 정의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전적으로는 결국 같은 의미인 듯하다. 정(正)은 '바를 정', 평(平)은 '평평할 평'이다. 문자가 다르고 뜻 또한 다르면 말이 달라야 하고, 사용하는 용례 또한 달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야말로 논리적 악순환이 따로 없다. 우리 말 성경에도 역시 '공평', '공정'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정의(Justice)'로 번역되야 할 구절들이 대부분이다. 이 역시 공평과 공정이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는 하나의 반증이기도 하다.


공평(公平)의 한자말에서 공(公)의 뜻은, '공평한'의 의미다. 공평할 공(公)은 '나누다' 라는 의미의 팔(八)과 사람의 입 모양을 형상화 한 '사사로울 사(私)'의 원형인 '사'(厶)가 합쳐진 형태다. 즉 음식이나 재물을 개인이 아닌 여러 다른 사람들과 '고루 나누어 먹는다'는 의미를 문자로 형상화한 것이 곧 공(公)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허신(許愼)은, 공평의 뜻을 평분(平分) 즉 '치우침이 없이 고루 나누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한비자(韓非子)』에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것을 사(私)라 하고, 이와 반대되는 것을 공(公)(自環者謂之厶, 背厶謂之公)"이라 하여 공과 사를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분명하게 구별짓고 있다. 다시 말해 공(公)의 의미에는 개인의 뜻이 완전히 배제되고 다수의 뜻이 오롯이 포함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공공(公共), 공유(公有) 등이 그 대표적인 용례다.

▲정전제(井田制)


혹자는 공평할 공(公)자가 지닌 의미의 유래를 정전제(井田制)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정전제(井田制)는 중국의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에 실시되었다고 하는 토지제도다. 사방 일 리(一理)의 토지를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아홉 등분하여 중앙의 한 구역은 공전(公田)으로 하고, 주위의 여덟 구역은 여덟 농가에 각각 개인 소유의 사전(私田)으로 할당하였다. 개인 소유의 8개 사전(私田)에서 나오는 수확은 각 개인의 것으로 하고, 가운데 공전(公田)은 여덟 농가가 공동경작하여 그 수확을 국가에 바치도록 하였다. 이를 정전제(井田制)라고 한다.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구분한 정전제로부터 '공평하다'라는 뜻이 생겼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공평(公平)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개인의 사사로움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사람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공평의 원래 의미대로라면 여기에 개인의 불만이나 불평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왜냐하면 서로간에 합의나 약속에 의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개인의 사사로움을 완전히 배제시킨 상태에서 형평에 맞게 나누는 것'을 '공평'이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평등은, 조건, 약속, 합의 등에 상관없이 어떠한 차별이나 조건없이 말그대로 칼로 자르듯 자로 재듯이 똑같이 대하는 상태다. 여기엔 앞서 포도원 일군의 사례처럼, 옳고 그름, 공평, 공정과 상관없이, 개인적인 역량· 처지· 욕구· 관점· 가치관 등등의 차이 때문에 자칫하면 개인의 불만 불평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다시 정리하면, 평등은 예나 지금이나 차별없이 똑같이 대하는 것이고, 공평은 다수의 약속 혹은 합의에 따라 개개인의 형편 처지 능력에 맞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나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 동생과 대학생인 형에게 똑같이 일주일치 용돈을 준다고 했을 때, 나이 처지 형편 상관없이 똑같이 만원을 주는 것은 평등이다. 반면에 대학생인 형에게 걸맞는 합당한 용돈을 주고, 초등학생인 동생에게도 걸맞도록 합당하게 용돈을 준다면, 이는 공평이다. 세금을 부자에게 더 많이, 가난한 자에게 더 적게 부여하도록 세법 규칙으로 정한 것, 이 또한 공평이다.


우리 말 공평에 걸맞게 번역되는 영어는 'equity' 다. 흔히 공평으로 번역되는 영어 'fairness' 은 공정이 더 어울리는 단어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fairness' 는, '양쪽 혹은 어느 한 쪽을 향한 편애(favor, 호의)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다. 저울추로 비유하면 완벽하게 평형을 이룬 상태다. 현대 카톨릭 사전에, 'fairness'은, "올바르고 의로운 것에 대한 명확한 규정들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옳고 바르게 실천되고 있는 바로 그러한 형태의 정의(justice)다." 따라서 나름 이해하는 공정은 공평이 행해지는 실천의 과정에서, 감시· 감독의 의미로써의, 사회· 도덕적 정의가 더해진 개념이다.


아래 이미지는 영어 평등(equality), 공평(equity)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정리하면, 공평은 다수의 합의와 약속에 따라 다수에 대하여 치우침이 없이 개개의 형평에 맞게 고르게 분배하는 규칙 또는 절차와 관련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평이 '생래적인 불평등'을 완하하고, 사회적(도덕적) 불평등을 보완하는 개념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 공정은, 결과적으로 공평이 절차와 과정에 맞게 바르게 제대로 지켜졌는가를 가늠하는 실천적 정의적 개념과 관련이 있다. 즉 공평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편법이나 반칙 혹은 불법 등이 개입되지 않도록 바르게 지키는 것과 관련된 개념이 공정(公正)이라 하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9월, 당시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비록 아직은 여전히 희망사항이지만, 이 문장은 평등, 공평, 공정의 정확한 개념을 말하고 있다. 


우리 헌법 제 제11조에, 평등이 뜻하는 바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③훈장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이렇듯 평등은 헌법에 명시하고 있듯이, 모든 차별, 모든 특권, 모든 특혜가 배제된, 차별없이 고루 동등한 상태다. 평등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거기에 어떤 형태· 어떤 양상으로든 차별이 존재한다거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거나, 사적이든 공적이든 간에 특혜나 특권이 개입되어 있다면, 이는 말 그대로 평등이 아닌 상태, 즉 불평등이다. 불평등은 가히 모든 사회 도덕적 불공평과 불공정의 뿌리, 그리고 공적 제도와 사회 부패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늑대는 양이 느끼는 공포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The wolf cannot speak of the fear of the sheep.) -줄리언 패트릭 반스(Julian Patrick Barnes), 「The Noise of Time」 (시대의 소음), 2016)」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이런 식의 평등을 확신하며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평등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나이가 많든 어리든 간에, 많이 배웠던 적게 배웠던 간에, 많이 가졌던 적게 가졌던 간에, 평등, 공평, 공정을 결코 외쳐서는 안되는 부적격하고 불공정한 자들이 우리 사회에 꽤 많이 존재한다. 최근 조국사태로 더욱 선명해졌다. 


명백하게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오히려 악하다고 단죄하는, 불합리하고도 부조리한 현실을 자주 목도한다. 가진 자가 더 가지지 못했다고, 현재 어떤 방식으로든 특혜와 특권을 누리고 있는 자가 더 좋고 더 나은 기회를 누군가에게 빼앗겼다고, 불공평과 불공정을 외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종종 본다. 불의한 자가 정의를 논하고, 이른바 토착왜구로 지목받거나 스스로 커밍아웃 한 자들이 애국과 정의와 자유와 진실을 부르짖는 것은 말할 가치 조차 없다. 


표현의 자유 좋다. 사상의 자유 또한 좋다. 자기 생각, 자기 의견을 표현할 자유는 민주 시민의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비록 그러할지라도,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비록 양심선언을 할 용기는 없다할지라도, 자신의 도덕적 양심에 꺼리는 것,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는 것이 정리(正理)가 아니겠는가? 자기 양심을 외면하고 불의에 동조하며 목청껏 자신을 기만하는 비루함보다는, 침묵하는 게 차라리 더 낫지 않겠는가?


깨진 독에 아무리 물을 부어봣자 부질없는 일이란 것은 어린아이들도 안다. 제도적 구조적으로 불공평하고도 불공정한 사회 시스템과 규칙은 이제 고쳐야 한다. 이와 관련된 책임있는 인적 자원은 적격한 새로운 사람들로 전격 교체해야 한다. 이게 진정 개혁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잘못된 제도와 구조에서 비롯된 불평등을 불공평을 불공정을 특정 개인에게 비난과 책임의 화살을 돌린다고 해서 문제의 본질이 바로 잡힐리는 없다. 비난과 혐오의 삿대질을 태풍에 깃발 나부끼듯 타인에게 투사한다고 해서 얼룩진 마음이 때로 움찔거리는 양심이 과연 편안해질까?


옛 글에 '사람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사람이 아닌 사람이 있다(看面人皆人 察心人或獸)'고 했다. 사람의 말을 하지만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 있고, 소통이 아예 불가능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 나이· 학력· 지식· 지위· 성별에 상관 없이 말이다. 나는 비록 말로도 글로도 소통 가능한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있지만, 공평과 공정에 대해서 만큼은 그렇지 못하다. 그 개념을 이제 겨우 조금 이해한 이상, 아무리 궁리를 해도 '나는 공평한 사람이라고, 더욱이 공정하다' 고 그렇게 말할 자신은 도무지 없다. 더욱이 내가 도덕적이다거나 혹은 정직하다거나 혹 정의롭다고 말할 자신은 커녕 그렇게 뻔뻔스러울 용기조차 나에겐 없다. 이게 졸(拙)한 내 실존이다. 그대는 어떠신가? (2019.10.6 쓰고 10.7 정리하고 고쳐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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