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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Oct 16. 2019

침묵의 나선 이론

침묵의 나선 이론(The spiral of silence theory)은 정치에 관련한 매스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다. 1970년 독일의 사회과학자 엘리자베스 노엘레-노이만(Elisabeth Noelle-Neumann)이 발표하였다.


일반 대중들은, 자신의 의견이 다수의 지배적 의견 혹은 여론과 일치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자기 확신을 강화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한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이 소수 의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소수 의견의 움직임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가라앉고 묻힌다. 침묵하는 이유는, 주류 여론에서 일탈함으로써 직면하게 될 사회적 고립, 배척 등과 같은 사회적 소외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때문이다. 반면에 다수의 지배적 의견은 더욱 크게 확산되고, 더욱 큰 영향력을 가진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마치 나선형의 깔때기 형상을 띄기 때문에, 이를 '침묵의 나선 이론'이라 한다. 


특정 이슈가 발생할 경우,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관점이 다수의 관점인지 항상 확인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확인하는 주요 매개수단은 대중매체다. 이 때문에 대중매체는 사회 여론의 형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동시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다. 노엘레-노이만은 대중매체가 일반 대중에게 다수의 지배적 의견을 알려주는 ‘정보원’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진시황이 급사하자, 진시황의 시중을 들던 환관(내시) 조고가 진의 승상 이사와 모의하여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하였다. 조작된 거짓 유서로 후계자인 태자 부소를 제거하고, 막내인 어린 호해를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고는 실권 진입에 성공한다. 실권을 쥐게 된 조고는, 꼭두각시 황제의 눈과 귀와 입을 가리고, 황제를 대리하여 자신을 무시했거나 반대한 역전의 공신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심지어 자신과 공모한 승상 이사까지 제거하고 스스로 승상의 자리에 오른다.  조고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아예 중국 전체, 즉 진나라 전체를 차지하고 싶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방탕하고 어리석은 2세 황제를 제거하고 자신의 새로운 아바타를 황제로 옹립하는 것이었다.


난의 실행에 앞서 조고는 조정 대신들과 귀족들이 과연 자신을 지지해줄지 궁금했다. 조고는 조정의 신하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런 다음 2세 황제에게 선물로 말(馬)을 바쳤다. 황제와 신하들이 보니, 그것은 말이 아니라 사슴이었다. 이에 황제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指鹿爲馬)고 하다니?”라며 황당해하였다. 그래서 주위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 그대들은 어떤가? 저게 사슴인가? 말인가?" 몇몇 대신들을 제외하고 신하들 대부분이 이구동성으로 “말 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조고는 자기의 말을 부정하고, 보이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했던 몇몇 이들을 기억해 놓고, 나중에 죄를 씌워 전부 죽여 버렸다. 이후 다시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게 503 정권 당시인 2014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사자성어,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다.  


이후의 역사는 이렇게 기록한다. 희대의 망국 악신 조고는 2세황제 제거에 성공하고 자신이 꿈꾸던 야망에 한발 다가갔지만, 자신이 옹립하고자 했던 새로운 황제에 의해 오히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한다. 사필귀정이다. 이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강력한 제국 진나라가 멸망한 것은 진시황 사후 불과 4년만이었고, 진 승상 이사의 사후 1년만이었다. 그 중심에는, 주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사슴을 보고 말이라 말하게 만들었던, 희대의 악신, 환관 조고가 있었다. 

▲중국 대하사극 '초한지' 조고 장면 캡처

침묵의 나선 이론과 관련하여 지록위마의 고사를 떠올려 봤다. 한 가지 생각해 볼 게 있었기 때문이다.  다수의 여론에 동조하거나 혹은 침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백한 거짓 앞에서 태도를 바꾸어 진실을 부정하고 거짓에 동조하는 이유가 단지 두려움 때문만은 분명 아닐 것이라는 의문 때문이다. 옛 글에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는 말이 있다. 또 풀색과 녹색은 같은 색, 즉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라는 옛 속담도 있다


나처럼, 소수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침묵하는 이유에 대해서 일련의 의문을 가진 연구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침묵하는 이유가 오직 사회적 고립, 배척 등의 사회적 소외의 두려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아관여도, 자기효능감, 쟁점에 대한 지식, 의견에 대한 확신등 개인차에 따른 다양한 변인이 개입한다.(박승관·김예리, ‘침묵의 나선’과 ‘정보의 나선’- 다수의 의견표명과 소수의 정보추구, 2003). 여기에서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인류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고, 인류의 진보를 가능케 한 것은 사회적 배척과 고립에 연연치 않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을 부르짖은 소수의 의견으로부터, 스스럼없이 진실을 말하는 용기있는 몇 몇 소수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역사는 말한다. 


침묵의 나선 이론은,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 제3자 효과 이론(the third-person effect hypothesis), 사실성의 망(the web of facticity), 각종 여론조사, 통계의 취사선택, 대결 프레임 짜기, 댓글 조작, 확대 과장, 축소 보도, 자의적 해석, 의도적인 주요 맥락 생략, 왜곡 및 호도, 양비론, 물타기, 등등과 함께 언론에 의한 여론조작의 주요 이론적 근거와 심리적 도구로 이용된다.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란, ‘실제로는 다수의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특정한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개인에게는 이 이슈가 소수의 입장일 것이라고 잘못 인지되는 것’을 말한다. 즉 '소수의 의견을 다수의 의견으로 잘못 인식하거나 아니면 다수의 의견을 소수의 의견으로 잘못 파악하는 경향이나 현상'을 지칭하는 사회심리학적 개념이다. 


제3자 효과란, 설득적 메시지에 반복적 노출된 사람들은 자신보다는 남들이 더 그 메시지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즉 타인들이 받는 영향은 과대평가하고, 자신이 받는 영향은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말한다. 명백한 왜곡보도나 가짜 뉴스의 메시지에 영향을 받아 설득당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자신보다는 타인들이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이론에 따르면, 미디어의 메시지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가 제3자 효과의 유무를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 


'사실성의 망'이란,  언론의 사실 보도에서, 주장하는 바에 대한 사실 입증이 어려울 때 별도의 검증작업 없이 주장한 그대로 인용 처리하여 보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 주장이 사실인지 거짓인지의 여부는 상관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유일한 사실은, 실제로 누군가가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뿐이다. 즉 검증을 못하는 허무맹랑한 내용일지라도, 그 주장을 인용 보도로 처리함으로써 마치 사실 보도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보도 행태를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세월호 참사 및 최근 조국 사태로 확인된 것은, 허위 조작 정보 그리고 사실이 검증되지 않은 가짜 뉴스가, 기성 언론과 공중파를 포함하여, 다양한 채널의 대중매체에 의해서 공공연하게 확대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기성 언론, 공중파 방송에서 일베와 같은 특정 소셜 커뮤니티, SNS 등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들, 유튜브의 허위정보, 검찰발 추측 정보 그리고 자일당을 비롯하여 일부 관종형 정치인들과 일본 극우의 망언들을 취재원으로 삼아, 사실 확인의 절차를 생략한 채 마치 그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심지어 일반의 여론인 것처럼 호도하기도 한다.  


현재의 언론 현실은 세월호 당시보다, 고 노무현 대통령 당시보다 더 심각한 듯하다. 과거와 달리 정상적인 사고의 깨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약간의 관심을 기울이면 그 정보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는 현실에서도, 아주 노골적으로 본질을 왜곡, 호도하기 때문이다. 조중동이나 종편 그리고 각종 경제지의 경우, 아예 대놓고 한 꼭지의 사실에 각색을 하여 거짓 보도를 하기도 한다. 일부 국가 기간통신사와 공영방송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조국 사태로 그 실상과 실태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참고로 경제지는 특정 기업의 이익 대변지로 무늬만 언론일 뿐, 공익을 대변하는 언론은 결코 아니다. 


거짓말도 세 사람 이상이 거듭 반복해서 말하면 사실로 믿기 쉽다. 하물며  검증할 수 없는 거짓을, 허구를, 추측을, 서슬퍼런 권력의 힘으로 권위로 '사실'이라고 밀어붙인다면 오죽하겠는가. 정치적 목적으로 대중을 설득할 요량으로 프레임을 짜고 진실로 위장한 허구를 지속적으로 반복 주입할 때, 생각을 바꾸어 '사슴을 말이라 해도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이 존재한다'라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명백한 거짓앞에서 침묵 혹은 동조의 이유가 두려움 때문인지 이익때문인지 나름의 야심때문인지, 그 속내를 나는 모른다. 나도 허구를, 의견을 자칫하면 마치 사실로 착각하고 믿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만 그 이유는 오직 본인만이 알 것이라는 추측을 감히 할 뿐이다. 그게 인성의 문제건, 가치관의 문제건, 도덕성의 문제건, 양심의 문제건, 인격장애나 정신질환의 문제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지록위마의 이야기는 먼 나라의 이야기, 까마득한 옛 역사의 캐캐묵은 이야기만은 아닌 듯하다. 침묵의 나선 이론 또한 마찬가지다. 굳이 사회심리학의 여러 연구 결과를 근거로 제시하지 않아도, 생소한 개념을  굳이 논하지 않아도, 우리 사회의 실상이 이를 증명한다. 검찰개혁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언론개혁 또한 시급한 이유다.  


뜬금없이 백무산 시인의 시 한 대목이 떠오른다. "주인 나오면 극성으로 짖어대고/ 주인이 말리면 더 큰 용맹 발휘하여/ 물려고 덤벼드는 저 개는/ 지가 개가 아닌 줄 아는 모양이다/ 개에게는 저 짓이 생존의 방식이라지만/ 개는 자신이 개임을 부정해야 개밥 먹을 수 있다지만/ 이런 인간들이 도처에서 콩당콩당 뛰고 있다/ 주인 나왔겠다 충직하게" (백무산 시, '뒤에서 바람부니' 부분) - (2019. 10.15일 쓰고, 16일 다시 고쳐쓰고 정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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