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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Jan 16. 2020

가짜뉴스, 진짜같은 가짜 가려내기

"기레기란,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서 기자들을 비하하는 한국어 신조어다. 편향된 기사, 선동 기사, 검증이 되지 않은 자료를 사용한 기사 등 질 낮은 기사를 쓰는 기자들에게 주로 사용한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가 2019년 6월 13일 공개한 ‘디지털뉴스 리포트 2019’에서 한국인들의 뉴스 신뢰도가 22%로 38개국 가운데 맨 꼴찌를 기록했다. 언론의 자유, 즉 언론의 권리는 대폭 회복된 반면 언론 그 자체의 수준은 여전히 처참하기 때문에 기레기라는 단어도 매우 보편화된 상황." -나무위키('기레기')


저널리즘 용어로 '객관보도'라는 개념이 있다. 객관보도란, '사실을 정확하고,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떤 사실을 보도할 때 기자 자신의 의견을 개입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 이게 '객관보도'다. 객관보도는 현대 저널리즘의 기본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기자가 취재한 사실을 전할 때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주관적 의견'을 구분하여 전하는 것이 언론 보도의 기본이라는 말이다.


참고로, " '사실'은 경험한 것이나 조사한 것, 실험한 결과 등을 있는 그대로를 나타낸 것이고, '의견'은 사실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 판단을 나타낸 것"이다. '사실'이란 그 실재함을 객관적으로 누구나 검증할 수 있는 확고부동의 내용이다. 반면에 '의견'은 주관적인 것으로 각 개인에 따라 다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의견은 논리적인 설득력의 여부 또는 결론의 옳고 그름 혹은 좋고 나쁨의 여부에 우선하여, 오직 근거의 사실적 타당성, 진실성 여부부터 먼저 가려야 할 필요가 있다.


신문윤리실천요강 제3조 보도준칙 '①보도 기사의 사실과 의견 구분'에 이런 조항이 나온다. “기자는 '사실과 의견'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보도기사를 작성해야 한다. 또한 기자는 편견이나 이기적 동기로 보도기사를 고르거나 작성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보도원칙을 바탕으로 언론 보도 기사는 사실 기사와 의견 기사로 구분된다. 사실 기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것이다. 사실 기사는 사실 확인의 취재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반면에 의견 기사는 확인된 사실을 근거로 자기의 주관적 의견을 밝히거나 주장하는 기사다. 칼럼, 사설, 해설, 논평 기사 등이 의견 기사에 해당한다.


언론 보도의 원칙에서 헤아려 보건대, 현재 우리나라의 언론 보도기사의 실상은 참담하다. '한국 언론 사망'이라는 말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을 정도로 '사실 기사', 즉 객관보도는 찾기가 아주 힘들다. 사실과 의견, 심지어 사실과 거짓, 사실과 허위 조작 정보가 뒤죽박죽 뒤섞인 기사가 보도기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기자 개인의 정치적 이념이나 취향· 선입견·편견·이해관계 등등의 여러 이유로, 또는 클릭 수를 노리고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사실을 침소봉대하거나, 사실관계를 교묘하게 조작하여 자극적 선정적으로 왜곡하는 보도를 예사로 한다. 아예 대놓고 SNS 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떠도는 특정 개인 혹은 이해관계자의 주관적 의견이나 생각을 채집하여 마치 사실처럼 보도하는 기사도 숱하게 많다. 여기엔 기성의 보수언론, 자칭 타칭 언필칭 진보언론의 구분이 없다. 세월호 참사 보도를 시발로 하여 최근의 조국 사태와 이른바 '검란(검찰 쿠데타)' 정국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 사실이다.


특히 조국 사태는 개인 이기주의뿐만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 혹은 조직 이기주의에의 병적인 집착에는 좌우 진보 보수의 구분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해 주었다. 현재 진행 중인 가히 '검찰 쿠데타'라 평가할 수 있는 검찰개혁 정국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은밀하게 기득권에서 기생(寄生) 하며 갑 또는 을의 관계로 공생(共生)을 누리던 사람들이 너도 나도 자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하고 있다. 꽤 오랜 세월 진보를 명함처럼 내세웠던 지식인들이 그렇다. 이들이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는 방식은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선택적 명분을 들어 모호한 언어로 동조하거나, 아예 침묵하거나, 이 세 가지다. 굳이 침묵을 커밍아웃의 한 방식으로 거론한 이유는, 평소 SNS 혹은 대중매체에서 사회적 인문학적 담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사람이 특정 사안에 대해서 만큼은 굳게 입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폭풍우 속 아수라장이 된 배 안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는 돼지 흉내 내기를 선택했던 현자 필론처럼 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들이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간에 다양한 방식으로 커밍아웃하는 이유는, 현 상황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추측되는 누군가 혹은 세력에게 자기를 확실하게 알리는 일종의 눈 도장 찍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의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은 조국 사태 덕분이다. 과거 고위 공무원들이 기자들 앞에서 국민을 가리켜 개돼지 운운한 것이나 보란듯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것이나, 조국의 소신과 맞물린 한일경제전쟁에서 소위, 친일 토착 왜구들이 일제히 커밍아웃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다시 말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 노동 전반에 걸쳐서 어떤 형태로든 다양하게 형성된 기득권의 수호 의지 그리고 권력의 우산 아래 진입하여 안주하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에는 좌·우·진보·보수·중도의 구분이 없다는 말이다. 이는 부패하고 불의한 권력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씁쓸한 방증(傍證)이다.


옛 글에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는 말이 있다. 다만 저들의 이중적인 처세가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생계형 소인배에다 졸(拙)한 나로선 딱히 뭐라 비판할 자격은 없다. 나나 저들이나 속을 까놓고 보면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도 생계형 소인의 지경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까닭이기도 하다. 때로는 저렇게 처세하며 사는 것이 능력이라 생각되어 아주 가끔은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단지 이들을 반면교사로 삼고 사람을 상대함에 각별한 분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인식할 뿐이다.


사실 보도기사뿐만 아니라 칼럼, 사설, 해설, 논평 등의 의견 기사도 마찬가지다. 언론 실천윤리와 보도원칙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다. 주관적 의견 기사마저도 허위 사실 혹은 지라시 수준의 확인되지 않은 추측, 그릇된 근거, 취사선택된 불충분한 근거, 심지어 조작 왜곡된 정보를 근거로 하여 작성된 글들이 마치 사실인 양 진실인 양 대중과 여론을 일방적으로 호도한다. 어쨌든 인터넷에서 관련 사안에 대한 심층적인 검색을 해 본다거나 해당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과 자료들을 살피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다면, 누구라도 그 진· 위 여부와 호도· 조작의 여부까지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예 대놓고 추측성 거짓을 사실처럼 보도하거나 명백한 오보를 하고도 일말의 부끄러움도 반성조차도 없다는 게 한국 언론의 참담한 실상이다. 


미국 세튼 홀 대학(Seton Hall University)의 도서관 관장인 존 부시먼 (John Buschman)은 2019년 1월 학술지(Journal of Documentation)에 발표한 논문 "Good news, bad news, and fake news"(2019)에서 가짜 뉴스를 이렇게 정의했다. 


●일부 사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뒤섞여 착각하게 만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정보.

●두려움, 분노, 좌절 등과 같은 편견과 감정에 호소하는 정보.

●호도하거나 속이기 위해 취사선택하여 일부 상황을 숨기거나 데이터를 왜곡 또는 조작한 정보.

●근거의 실체가 모호하거나 애매하거나 명확하지 않은 정보.

●현실을 불신하게 만드는 정보.


개인적으로 덧붙이자면, 존 부시먼이 통찰한 가짜 뉴스의 정의는 대부분 논리학에서 말하는 ☞'비형식적 논리 오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비형식적 논리 오류는, 논증에서 제시된 근거와 결론이 서로 논리적인 관련이 없거나 결함이 있거나 애매하거나 모호한 언어를 사용하는 데서 오는 오류를 뜻한다. 다시 말해 말은 그럴듯한데 따지고 보면 무언가 결점이 있거나 내용이 참이 아니다. 논리 오류는 주의하지 않고 얼핏 봐서는 타당한 것으로 대부분 속아 넘어간다. 실제로 기성 언론에서 사용되는 가짜 뉴스는 거의 모든 비형식적 논리 오류를 마구잡이로 쓰고 있다. 전제, 가정, 근거가 대부분 허위 또는 거짓인 까닭에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끔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존 부시먼이 특정한 가짜 뉴스의 정의는 마치 우리나라 언론의 보도기사를 정확하게 콕 집어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미 대통령 트럼프의 등장 이래로 가짜 뉴스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주류 언론에까지 확장됨으로써 심각한 정치·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국 유수 대학, 연구소 등에서 그 해악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사회학, 언론학, 언어학, 커뮤니케이션학, 정치과학, 심리학 등 여러 관련 학자들의 연구의 주요 주제로 채택하고 있다. 기성 언론에까지 영향력을 끼친 가짜 뉴스의 폭발적인 확장에 대해, 미국 시러큐스 대학과 애리조나 주립 대학 공동연구팀은 가짜뉴스의 해악에 대해 "민주주의, 정의(正義), 대중의 신뢰를 훼손하는 것(eroding democracy, justice, and public trust)")이라고 진단했다(Zhou, et al. 'Fake News', 2019). 이러한 진단은 가짜 뉴스가 현시대에서 민주주의의 본질과 정의(正義)의 가치를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좀먹음으로써 공공의 불신을 초래하는 최악의 정치 사회적 병폐로 관련 연구자들과 지식인들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먹고살기에 바쁜 현실에서, 가짜 뉴스, 허위정보, 조작된 정보, 악의적 정보를 가려내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이에 반발하여 그동안 언론에 가려져 있던 다양한 분야의 양식 있는 재야의 진짜 전문가들이 SNS나 유튜브 등의 대안 미디어에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며 속속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집단지성' 이다. 


집단지성이란, "여러 개인들의 상호작용으로 그들의 지식이 연결되고 공유되며, 이렇게 공유된 지식은 또 다른 새로운 지식과 연결이 되고, 연결된 지식은 또다시 새로운 지식이 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다수가 서로 협력하여 새롭고 거대한 지식을 창출해내는 과정이자 그 결과물(김다원, '한국지역 지리학회지' 2013)"이다. 다양한 이들의 지식과 정보와 경험과 의견을 통하여 기성 언론이 대중에게 감추거나 덮어 둔 사실과 진실이 가감 없이 드러나기도 한다. 집단지성의 힘이다. 


그렇다고 해서 집단지성에 습관적으로 권위를 부여하여,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것 또한 위험하다. 가짜와 진짜가 뒤섞여 있고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들이 진짜를 압도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생각은 내 생각 혹은 의견이 과연 올바른 가를 판단하는 시금석으로 삼을 뿐이다. 가령 내 스스로 생각하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그저 외부에서 입력해 주는 대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에 다름없을 터인데, 집단지성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생각의 주체가 되어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일이다. 회의론적 사고 또한 필요할 것이다. 즉 무작정 믿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잠시 보류하고 한 번쯤은 멈추어 의심하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일상에서 어떤 것이든 정말 관심이 가는 것이 있다면 누구든 촉각 청각 시각을 곤두세워 집중하며 공들여 관찰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사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관심으로 이끄는 중요한 정보가 있다면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제공한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등등 자세하게 관찰하는 것이 마땅치 않겠는가. 


비판(批判)의 사전적 뜻은, '현상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판적 사고 없이는 논리적 오류를 쉽사리 간파해 낼 수 없다. 논리적 오류를 식별할 만한 지적 사고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올바른 분별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더욱이 개인적인 지적 취향과 호불호 그리고 그저 익숙해서 마음이 편히 가는 것들의 경계선을 스스로 넘어서지 못하는 한 비판적인 사고는 커녕 올바른 분별력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다. 하물며 나와 생각이 다른 타인의 의견이나 생각을 존중하고 경청하며 들어 줄 귀가 없다면 말할 필요조차 없다.


내가 꽤 장시간 생각을 정리하며 장황하게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올바른 분별력을 갖고자 하는 강렬한 자기 반성에 있다. 나찌 정권에 저항한 독일의 극작가이며 시인인 브레히트는 그의 시(詩)에서, '칠쟁이의 연설에 분노하고, 오직 분노만이 자기로 하여금 당장에 펜을 잡게 한다'고 노래하였다. 브레이트의 심정을 절절하게 공감한다. 여하튼 깨인 사람들의 다양한 전문적인 지식, 정보, 의견, 생각, 경험의 교집합으로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집단지성은 기성의 쓰레기 언론의 가짜 뉴스를 식별하는 훌륭한 분별 도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존 부시먼의 가짜 뉴스의 정의 또한 기레기 언론의 언어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데에 좋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아울러 좋은 글, 좋은 책을 가리는 기준도 가짜뉴스와 기레기 언어를 분별하는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올바른 사실적 정보와 그에 기반한 올바른 의견을 다양하게 듣고 보고 배음으로써, 내가 모르는 것을 혹은 몰랐던 것을 새롭게 배우고, 행여 있다면 내 잘못, 내 착오를 인정하고, 왜곡되었거나 그릇된 것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나아갈 때, 비로소 시시비비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건강한 비판적 사고의 능력도 향상되리라 생각한다. (20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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