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에겐 두 가지 종류의 도덕이 나란히 존재한다. 하나는 입으로 외치며 실천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하지만 좀처럼 외치지 않는 것이다"-버트란트 러셀('결혼과 도덕').
n번 방 사건 보도기사나 의견 기사를 접할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가만 생각해 보면, 김학의 사건이나 장지연 사건을 접할 때도 비슷한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이번의 분노는 확연하게 다르다. 지난 세월호 참사, 그리고 영화 '한공주'를 보고 나서 느꼈던 바로 그 분노의 감정이다. 몸이 절로 긴장할 정도다.
나는 그리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부도덕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솔직히 말해, 지금도 예쁘거나 자태가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절로 눈이 돌아간다. 다만 사람들 앞에서 만큼은 냉담한 척, 신경 쓰지 않은 척할 뿐이다. 설령 만에 하나라도 내게서 불현듯 성적 충동이 일어난다고 해서 결코 의지적으로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다. 스스로 통제할 줄 알기 때문이다. 욕구의 충동을 스스로 어떻게 절제하고, 또 어떻게 적절히 통제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는 도덕적 척도가 된다.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으며 사회생활을 해 본 나이 든 성인 남성이라면, 우리 사회에서 상품화된 성의 적나라한 실태를 잘 알 것이다. 그 소비자는 남녀 구분이 없고, 교양 혹은 사회· 경제적 지위, 학벌, 도덕성이나 신앙, 눈으로 보여지는 개인의 인격 등 과는 무관하다. 돈으로 무엇이든 다 팔고 살 수 있는 세상이다. 다만 모르는 척, 자신은 안 그런 척할 뿐이다. 때로 나는 마광수 선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성에 자유로워지고 솔직해지라고 강변하는 선생의 일침에, 개인적으로 은근 양심이 찔려서 부끄러운 마음을 갖기도 한다.
아무리 고고한 척 고상한 척 해봤자, 남자든 여자든, 나처럼 썩은 나무 막대기 같은 사람이든 간에, 성 본능 혹은 성 충동이 발동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성은 인간의 삶과 인간의 생존에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다만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성적 본능 혹은 성적 욕구를 아무 데서나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나름의 방법으로 욕구를 해소하거나 상황과 때에 맞게 적절하게 통제하거나, 절제할 뿐이다. 풍광이 멋진 호수에서 흰색 고니(백조)가 한가로이 물 위를 헤엄치는 광경을 볼 때, 감성적인 사람이라면 너도 나도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에 감탄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수면 아래서 바삐 움직이는 고니의 치열한 발 짓에는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정신 분석학자인 빌헬름 라이히는 그의 저서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자연스러운 성에 대한 도덕적 금지는 각 개인을 막연한 공포감에 시달리게 하면서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목적 복종심을 길러준다"라고 통찰하였다. 마광수 선생은, '성 또는 성의 대리 배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인간은 가학 본능을 직접적인 방법으로 충족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살이나 타살, 또는 파시즘적 폭력을 바라는 집단적 소망 등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서술한 바 있다. 어쨌든 성은 인간의 본능이다. 나는, 성적 취향, 성 욕구, 성관계 등 개인의 성 문제를 도덕과 결부시키는 것을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개인의 성 문제를 단순한 도덕적 잣대로 정죄하거나 강제하거나 압박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라 생각한다. 내적 본능을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성에 관한 한 여느 사람들과 별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엔간하면 성문제와 도덕을 결부시키려 하지 않는다. 성(性, sex)은 그야말로 소중한 것으로, 결코 부끄러운 것이거나 무턱대고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도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천사의 흉내를 내려고 하면 짐승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유형에는 두 부류의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 다른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파스칼, '팡세').
영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분석철학자이며 사회·역사비평가이도 한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책 '결혼과 도덕'에 이렇게 통찰하였다. "성관계(sexual relations 혹은 성 문제)에서의 도덕성은, 성(性)에 대한 미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본질적으로 상대를 서로 존중하는 것으로 구성되며, 각자의 욕구와는 상관없이 오직 자기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는 수단으로써 상대를 이용하지 않는 데에 있다"('결혼과 도덕'). 러셀의 통찰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개인의 성은 마땅히 존중받아야만 한다. 단지 자신의 성적 욕구 혹은 욕망을 충족하는 이기적 수단으로 상대를 이용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 행위요, 범죄 행위와 다름없다. 미국의 저명한 정신의학자인 M 스캇펙의 관점에 따르면, 이는 분명 '악'의 전형적인 형태다. 스캇펙은 악을 이렇게 정의한다. "악이란 자신의 병든 자아를 방어하고 보전하려는 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데 정치적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악은 정신적 성장을 피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정치적인 힘의 구사, 즉 공격적이거나 은폐적인 강함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러셀의 통찰을 되새기면서, n번방 사건에서 내게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이유를 가만 생각해 보았다. 의도적으로 일방적인 강압에 의해 한 사람의 인간성을 파괴하면서까지 자행하는 성착취는, 그야말로 살인에 버금가는 악한 행위다. 언론의 화면으로 나타난 주범 조주빈의 담담한 태도에서 나는 악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가 본능적으로 그토록 혐오하고 극구 회피하는 악은, 마치 나를 비웃듯이 마치 나를 조롱하듯이, 주범 조주빈의 모습을 통해 지극히 혐오스럽고 사악한 느낌으로 내게 전해졌다. 내 분노의 감정을 촉발시킨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내 안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살의까지 함께 올라올 정도로 '본능적 분노'는 강렬했다.
비슷한 사례로, 과거 김학의, 장지연 사건에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분노와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적으로 김학의 사건이나 장지연 사건은 경제 혹은 사회적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진 갑과 을이라는 권력의 속성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형 성범죄로 나름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사건에 느낀 나의 분노는 사회적 의미에서, 정상인이라면 누구라도 공히 가질법한, 도덕적인 '의로운 분노(義憤)'라고 할 수 있다. 권력형 성범죄는 여러 이해관계에 얽히고 설켜서 단지 성범죄로 인식하지 않을 뿐, 알게 모르게 지금도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마치 공기처럼, 너무 익숙해서 심각한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마치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와 같은, 악의 또 다른 형태다. 악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악을 혐오하는 건강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한다. 어느 순간 정치적으로 변질되어 버린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관심이 이번 n번 방 사건을 계기로 다시 "반드시 척결되어야만 할 '사회적 악의 문제' "로 강렬하게 재점화되어 이슈화되기를 기원한다.
어쨌든 n번 방 사건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자행된, 다중의 연쇄 살인에 버금가는, 인신매매와 인간 파괴형 성착취 범죄다. 그 핵심은 개인적으로 표출된 성적 욕망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악랄하게 악용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성적 취향이나 성적 욕구, 성적 욕망, 성적 충동, 성적 호기심 및 도덕성의 경계를 넘어선, 가장 악질적이고 사악한 성범죄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불의가 존재하는 한 나도 그 범죄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내 스스로 불의를 행하지 않았더라도 그 불의를 묵인하는 것 또한 범죄이다. 내가 불의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더라도 사회에 만연된 불의에 의해 간접적 이득을 누린다면 그것 또한 범죄이다. "- 유진 뎁스(1855~1926 노동운동가, 미국)
과거 불의한 독재 사회에서 함석헌 선생은 말하길,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불의에 동조하는 것"라고 외쳤다. 현재에도 여전히 불의가 횡행하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서지현 검사는, "함께 분노하면 바꿀 수 있다"라고 호소한다. 나는 그리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n번방 사건을 상기할 때마다, 지금도 여전히 화가 난다. 당신은 어떠신가? (2020.3.25쓰고, 4.2 문맥을 정리하고 고쳐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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