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견폐일(蜀犬吠日)'이란 고사 성어가 있다. '촉나라 개는 해를 보고도 짖는다'라는 뜻이다. 옛 중국 촉(蜀) 나라 땅은 험하고 높은 산악 지형이 대부분으로, 하늘에 운무(雲霧)가 항상 짙게 덮여 좀처럼 해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모처럼 해가 나타나면, 온 동네의 개가 이를 신기하게 여겨 짖었다고 하여 나온 말이다.
촉견폐일은, "견문이 좁고 일천하여 모든 것이 신기해 보인다거나, 또는 식견이 좁은 사람이 견문과 식견이 넓은 사람을 비난하고 의심한다"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이 고사 성어는, 일반 대중으로부터 초딩의 별명을 얻은 어느 정치인이 한때 인용한 것으로 기억한다. 맥락과 상관없이 초딩이라는 별명에 딱 어울리는 고사 성어다. 어쨌든 현실에서 개들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짖기도 한다. 조용한 시골 동네에서 한 집 개가 짖으면 다른 집 개들도 덩달아 짖어대는 것은 일상의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언론인 강기석 선생은 현 우리 사회의 실태에 빗대어 이렇게 풍자하였다. "떼창하는 동네 개들에게도 /사연은 있다/ 허깨비를 보고 짖는 개/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 짖는 개/제 달그림자에 놀라 짖는 개 /사나운 개/ 미친개/ 비루먹은 개(강기석 페이스북, '떼창의 사연')".
그뿐만 아니다. 공자와 같은 성인(聖人)을 보고도 사납게 짖어대는 개도 있다. 악한 도적 떼의 잔악한 두목인 도척이 키우는 개가 그렇다. 어느 칼럼에서 '도척의 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밥을 주는 자에게 무작정 굴종하며, 맹종 맹동(盲從盲動)을 일삼는 사람을 가리켜 이르는 말이 도척지견(盜跖之犬), ‘도척의 개’다".
우리 옛 선현 중에서 송암 권호문 선생은, "대개 짐승의 몸을 하고서도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도 있고,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도 짐승 같은 마음을 가진 자도 있으니 세상 사람들 중에서 쥐와 같은 자가 많다"('축묘설'/ 송암집)라고 통찰하였다. 조선 후기의 여항시인(閭巷詩人) 임광택 선생은 이런 글을 남겼다. "얼굴만 보면 누구나 사람 같은 데, 마음을 살펴보면 간혹 짐승인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사람답고 어떤 사람은 사람답지 않다. 그런즉 얼굴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쌍백당유고雙栢堂遺稿')". 역설적으로 보통의 사람들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 심지어 쥐와 같은 사람들,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로부터 느닷없이 '개 돼지' 취급을 받는 것은,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최근 진위 파악이 안되는 온갖 추측성 의혹, 흑색선전, 유언비어, 가짜 뉴스, 왜곡 조작 정보, 허위정보가 난무한다. 그것도 기성 언론, 공중파 방송 가리지 않고 나온다.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소위 '탈진실의 시대'에 매스 미디어의 보도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사실에 진위 파악이 힘든 허구, 추측, 의견을 논리적으로 교묘하게 뒤섞거나 누군가의 일방 주장을 그대로 받아쓰기하여 보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히 도덕적 사회적 정의감을 자극하고 굉장한 관심이 절로 끌리는 내용일 경우, 반드시 적시된 사실들에 대해서 의견과 사실, 추측과 사실, 허구와 사실을 일일이 구분하고, 비판적인 사고로 진위 확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탈진실의 시대'에 '언론 독해법'(미디어 리터러시)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사슴을 말이라고 믿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에 빠지기 쉽다. 문제는 언론의 받아쓰기와 왜곡보도를 곧이곧대로 믿는 듯한 보통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데에 있다.
전 세계와 우리 사회의 의식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의 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사회의 불의한 이익과 권위에 일단 매몰되고 학습된 사람들은 아무리 반대되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 설득은커녕 소통조차 가능치 않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오늘 21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결과를 잠시 눈여겨보며,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느꼈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부화뇌동하여 맹종· 맹동하든, 마치 손바닥 뒤집둣이 마음을 조변석개하든, 해를 보고 놀란 촉나라의 개처럼 짖어대든, 제 양심에 제 그림자에 놀라서 짖어대든, 번지수를 잘못 찾은 도덕적 정의감에 분노하여 따라 짖어대든, 영문을 모른 채 덩달아 짖어대든, 행여 제 밥그릇 뺏길까 봐 죽기 살기로 짖어대든, 이는 모두 철저히 개인의 삶이요, 개인의 품격이요, 또 개인의 자유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중국 유학의 이단아로 불리는 명(明)의 사상가 이탁오는 그의 저술 ' 속 분서(續焚書)'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분서(焚書)는 '불태워 버려야 할 책'이란 뜻이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어오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오호라! 나는 오늘에서야 우리 공자를 이해했고 더 이상 예전처럼 따라 짖지는 않게 되었다. 예전의 난쟁이가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다.”
부끄러움은 양심의 한 속성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옛 글에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으면 하늘조차 무섭지 않고(시경, 소아편), 부끄러움이 없으면 못할 짓이 없으며(성리대전, 학구편), 청나라의 학자· 사상가인 고염무(顧炎武)는 '염치(廉恥)'라는 글에서 “청렴하지 않으면 받지 않는 것이 없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하지 못할 짓이 없다”라고 했다. 이탁오 선생은 그야말로 부끄러움이 뭔지 아는 용기 있는 학자요, 사상가라 하겠다.
비록 이탁오 선생처럼 자신의 부끄러운 허물을 인정하고 또 고백할 용기는 없을지라도, 뻔한 불의를 보고도 차마 분노하며 저항하지는 못할지라도, 설령 불의에 침묵으로 동조하며 또 여전히 동참하고 있을지라도, 또 사슴을 말이라 믿으며 부화뇌동할지라도, 최소한 사람이라면 따라 짖어 대는 개보다는 마땅히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스스로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러해야 마땅치 않겠는가?
촉나라의 개가 세상을 밝게 비추는 해를 보고 놀라서 짖어대는 것처럼, 자발적으로 불의하고 부패한 정치권력과 왜구의 마름 내지는 도구가 되어, 적폐 청산과 변화와 개혁에 스스로 철벽의 가림막이 된 사람들, 그 당당한 태도가, 강철보다 딱딱한 그 양심이 나는 그저 부럽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 공자님의 말씀이다. (2020. 4.15)
※작년 조국 사태 때 쓴 글의 일부를 떼어내어 여전한 현 상황에 빗대어 다시 고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