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하는 데 온 세상 사람이 좋아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그 글한다는 것을 슬프게 여기고, 사람됨이 온 세상 사람이 다 자기를 좋아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그 사람됨을 슬프게 여긴다." 《소창청기 小窓淸記, 허균/성소부부고/한정록》
글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또는 실속은 없고 겉만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을 한자말로 '문식'(文飾)이라고 한다. 실수나 잘못을 그럴듯하게 합리화 혹은 정당화하며 꾸미는 것도 이 단어의 정의 속에 포함된다. 논어 학이편에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이란 문장이 나온다. 교묘하고 능란한 말솜씨와 얼굴빛과 표정을 좋게 꾸미는 자 중에 어진 사람은 드물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생각건대, 지금의 우리 사회는 꾸미고 속이는 것이 능력이요 실력이 된 세태로 변한 듯하다. 그 대표적인 부류로 정치인과 학자 그리고 종교인을 포함하여, 자신의 말과 글을 상업화하여 먹고사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겉을 포장하고 꾸미는 그러한 재주나 재능이 곧 이들이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이다. 물론 남들 보다 뛰어난 재능과 남다른 노력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전부가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들 중에 사회적 지명도가 어느 정도 있는 자라면, 이들의 언행, 심지어 시정잡배들이나 사적인 술자리에서나 오고 갈만한 수준의 막말과 망언, 비난과 조롱까지도, 쓰레기 언론과 그에 기생하는 기더기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취재원이 되고, 뉴스의 소재가 되는 황당한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다.
조선말의 사상가 혜강 최한기 선생은 글과 말에 능란하면서, 겉과 속,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이러한 자들을 빗대어, '인간의 도리에 관한 학문은 대충 알고, 문장에만 아름다운 선비'라고 간파했다. 고려의 학자 목은 이색 선생은 백정의 집에서 부처에게 절하고, 창녀에게서 예절을 배우는 것에 비유하고, "겉에서 얼핏 보면 그럴듯하게 보일지 몰라도 막상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백정이요 창녀임이 분명하니, 어떻게 그 본색을 숨길 수 있겠는가?"라고 통찰했다. 모든 왜곡과 신화와 오해와 편견은, '꾸미고 포장된'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한다.
비록 이래저래 어쩔 수 없이 속고 속이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 할지라도 굳게 믿었던 사람에게 속는 것만큼 마음의 큰 상처로 남는 것은 드물다. 이런저런 이유로, 평소 나는 재능과 인격은 별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생각은 숱한 경험으로 입증된 지극히 개인적인 편견이기도 하다.
어쨌든 인격은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뜻한다. 품격은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인격이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라는 점에서, 인격(personality)은 기질(temperament)과 성격(character)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기질(temperament)은 태생적인, 즉 유전적으로 부여받는 자연스러운 특질로 이른바 천성(天性)이다. 성격(character)은 선천적으로 타고 난 기질과 후천적인 교육, 환경 등등 삶에서 얻은 경험 및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개인의 특성이다. 독일 태생의 영국 심리학자로, 행동요법의 권위자인 한스 아이젱크는 인격을 이렇게 정의했다. “인격은 유전자와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현재 혹은 잠재적으로 발현되는, 행동 패턴의 총합이다.”
사람의 품격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은 맹자다. 맹자는 사단, 즉 측은지심, 시비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이 네 가지로 인간 품격의 핵심 기준으로 삼았다. 맹자에 의하면, 이 네 가지 마음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한편 재능은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이다. 따라서 재능은 인격 즉 그의 사람됨을 정의하는 요소로 삼을 수는 없다. 올바른 가치관, 신념, 언행, 태도 등은 올바른 인격으로부터 나온다. 다시 말해, 인격은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가치관을 이루는 바탕으로 한 개인의 인간적인 삶의 질을 결정짓는다.
거듭 말하지만, 예술가, 문인, 작가, 학자, 종교인이라는 그럴듯한 사회적 명함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내세우는 사람들을 흔하게 본다. 설령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뛰어난 작품을 만들거나 혹은 좋은 작품의 형성과 전파에 성공적으로 기여하며, 또는 훌륭하거나 아름다운 멋진 글을 쓰고, 또 거룩하거나 좋은 말을 유창하게 논리적으로 잘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의 인격이나 가치관이 그들이 표현하는 것에 걸맞을 거라 생각하면 심각한 오해다.
국산품은 그 종류와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다. 그 질의 수준 또한 천차만별이다. 그중엔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다. 진짜가 많은 만큼 가짜 또한 많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짜가 많은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진짜의 참 가치를 인정하고 또 그만큼 선호하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는, 악마조차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에 그리 이상하게 여길게 못 된다(고후 11: 14)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호 이익(李翼) 선생은 당신의 제자 안정복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성인(聖人)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향원(鄕愿)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옳은 듯 하지만 옳지 않으며 그 의견 또한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공자가 유일하게 미워한다고 특정한 인간 부류가 있는데, 바로 향원(鄕原)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향원은 지역의 유력자다. 요새 말로 하자면, 영향력이 있는 지성인으로 오피니언 리더다. 그 특징으로는 자신의 이해관계(利解關係)에 따라 시류에 영합하며, 도덕과 의 그리고 인격의 측면에서 공히 모든 사람들이 '좋다'라고 인정할 만한 언행과 태도를 일상적으로 취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외형에 집착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부각하기에 힘쓰는 사람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올바른 식견이 없으면 보통 사람은 그가 위선자인지 참 인격자인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마치 밀에 있어 독보리와 같은 존재며, 벼에 있어 피와 같은 존재다. 이른바 사이비(似而非)다.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다. 때로 진짜를 뛰어넘기도 한다. 얼핏 보면 훌륭하고 멋지고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삶의 실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면, 진짜가 아닌 가짜로 금세 판명 난다. 공자는 향원을 '덕의 도적'이라고 단언하였다.
중국의 고대 병법서인 《육도》에서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사람의 부류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데, 그 특징이 향원 부류와 비슷하다. 이를테면, “겉모습은 어진 사람 같지만 속은 어질지 않은 자, 겉으로는 온화하고 착해 보이지만 실제는 도둑질하는 자, 겉으로는 공경하는 태도를 짓지만 천성적으로 교만한 자, 겉으로는 겸손하고 근신하는 체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 자, 겉으로는 중후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경박하고 성의가 없는 자' 등이 그렇다.
사람의 품격을 논함과 관련하여, 재능과 인격을 구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에 대해, 수 백 년 전 고려의 학자 이색 선생은 이렇게 남겼다. "겉에서 얼핏 보면 그럴듯하게 보일지 몰라도 막상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백정이요 창녀임이 분명하니, 어떻게 그 본색을 숨길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을 적에는, 그 사람이 당세에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더욱 따지면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조선 말의 사상가 최한기 선생은 사람을 살필 때, 외모보다는 심상(心相)을 먼저 살펴야 한다고 간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심상은 그의 삶에서 구체적인 행위(行事相)로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결국은 심상은 행사상(行事相)만 못하다고 통찰했다. 그래서 선생은, "그 사람의 행사를 살피지 않고 사람의 상을 살피는 것은 마무리하지 못한 글과 같다."라고 결론지었다.
살아오면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내 경험 또한 '그렇다'라고 인정한다. 본색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비록 후천적인 습성은 변할 수 있을지라도, 사람의 천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변했다면, 그 본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일 뿐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격을 살펴보려면, 그의 재능보다는 반드시 그의 실제 삶을 먼저 살펴봐야만 하는 것이다.
2005년 미국의 군수업체 <레이시온(Raytheon)>의 CEO 빌 스완슨은, 자신의 경험을 정리하여 출간한 책, 『Swanson's Unwritten Rules of Management(2005)』 에서, 흥미로운 법칙 하나를 제시했다. '웨이터의 법칙'이다. "당신에게는 친절하지만, 웨이터에게 무례한 사람은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말하자면, 사람에 따라 언행과 태도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사람이다. 빌 스완슨은 "다른 건 몰라도 이 법칙만큼은 예외 없이 정확하다" 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현실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법칙은 어김이 없다. 언행과 태도는 일상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일관적인 하나의 패턴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사람은, 비록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자기보다 못하거나 자신의 처지보다 낮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하는 차별적이고도 무례한 태도와 언행을, 당신에게도 언제라도 똑같이 취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신약 성경의 '가라지 비유'에서 예수는 이렇게 가르친다. 밀밭에서 밀과 뒤섞여 함께 자라고 있는 독보리를 구별하고, 그 존재의 해악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독보리를 애써 뽑아내지 않는 이유는, 독보리를 뽑다가 행여 멀쩡한 밀까지 합께 뽑아 버릴까 염려한 까닭이다. 또 요한계시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 22:12)
여하튼 비록 개인적 편견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될지라도, '재능과 인격은 별개'라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한자어로 '자가당착' (自家撞着) 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그 뜻은, '같은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서로 맞지 아니하고 모순됨'이라는 의미다. 신약 성서에는 이런 글귀도 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내어라. 그러면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도 빼낼 수 있을 것이다"(누가 6:42). 감추고 싶은 허물도 많고 실수도 많으며,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곧잘 하는 한갓 졸보에 불과한 내가, 더구나 결코 위선이나 자기기만으로부터 진정 자유롭지 못한 한갓 속물에 가까운 내가, 누워서 스스로에게 침 뱉는 격의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더 이상 사람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이고, 아울러 더 이상 스스로 자기모순 혹은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삼가고 경계로 삼기 위해서이다. (2020.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