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허튼소리

사이비의 특징

by 파르헤시아

"성현(聖賢)의 말은 비유나 풍자로 빗대어 말한 곳도 있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누구나 알기 쉽게 말한 곳도 있다. 비유나 풍자로 말한 곳은 그 진짜 의미를 당연히 드러내고 밝혀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고의로 알아듣기 쉽게 말한 부분에 집착하여 억지로 깊은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 만약 성현(聖賢)이 가졌던 본래의 의도가 아닌데 아무런 근거 없이 억지로 허황된 사설(私說)을 만들어 낸다면 비록 말을 잘하여 하늘이 감동하여 천상의 꽃비가 어지러이 떨어질지라도, 이는 단지 스스로 억측한 개인적인 소견일 뿐이다. 이 어찌 성현이 말한 본래의 뜻과 상관이 있겠는가?"-이현일('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 갈암집')


인용한 문장은 조선의 학자 갈암 이현일 선생이, 원나라의 학자 진보(陳普)가 쓴 '무이도가주해'를 비평한 글의 일부이다. '무이도가'(武夷櫂歌)는 남송의 유학자 주희가 무이산과 무이산의 아홉 구비 계곡(九曲)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여 읊은, 이른바 서경시(敍景詩)다. 송대 이후 원나라의 학자 진보(陳普)가 이 시에 자기 견해로 형이상학적·철학적· 도학적 의미를 가미하여 해석하고 주해를 붙여 책을 발간하였는데, 그 책이 바로 "무이도가주해"이다.


즉 진보(陳普)는 주희의 서경시를 작자의 본래 의도와는 전혀 별개의 도학적· 철학적인 관념시로 둔갑시킨 것이다. 관념시는 작가의 주관적인 관념을 담은 시(詩), 즉 개인의 철학 사상 등을 함축하여 추상적인 관념으로 표현한 시다. 서경시와 별개로 주희는 자신이 지향하는 철학과 도학 사상을 20수의 시에 담아 관념시를 썼는데, 그 관념시가 바로 '재거감흥20수(齋居感興二十首)'다. 갈암 선생의 글에 따르면, 진보의 제자인 유개는 '무이도가'를 '재거감흥시20수'와 억지로 연결시켜 전자를 '겉(表 비유)', 후자를 '속(裏 진의)'이라 억측하기까지 하였다.


'역사는 반복된다' 이후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 중에 주희의 '무이도가'를 두고 '진보'와 비슷한 행태를 보인 이들이 속속 등장했다. 공자, 맹자 이후로 중국 유학에서 학문적으로 주희가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이 워낙 지대하기 때문이다. 성경이나 불경, 코란 등과 같은 종교 경전, 옛 고전이나 현인들의 사상 등을 그 본래의 의미와 의도를 넘어서 수요자 맞춤형 혹은 독자 맞춤형으로 일방적으로 곡해하고, 그 원전(原典)의 권위에 편승하여 개인적인 명성과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종교 이단', '사이비', '인문· 종교 장사치'를 비롯하여, '진보(陳普)'와 같은 부류들과 그들을 맹신적으로 추종하는 맹목적인 부류들이 꽤 많이 존재한다. 우리의 관심과 흥미를 끌어당기고 내적 갈증을 해소시킬 정도로 분명 훌륭하고, 심지어 격하게 공감 또는 위로가 되는 좋은 말을 한다. 그러나 역사적 혹은 과학적 혹은 사실적 근거가 부족하거나, 행여 있더라도 검증 가능성이 희박하거나, 방법론적으로 적용 불가능하거나, 특정 경우와 특정 상황 혹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이론, 해법, 해석, 주장, 의견은, 비록 반면교사는 될지언정 마약류와 같은 쓰레기다. 마약류와 같다 함은 사람을 쉽게 중독시키고, 확증편향의 모순과 심리적 오류 상태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이비들이 제시하는 필승 불패의 만능 해법을 맹신하고 따른 결과, 어김없이 마주하게 되는 당신의 좌절과 실패는 필경 당신의 '의지부족'이나 '믿음의 결여'때문이라고, 그 책임이 당신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 결과 인간 심리의 특성상, 실패와 좌절과 자괴감을 겪으면 겪을수록 더욱더 사이비들에 맹목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심리적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것은 마치 밑빠진 독에 물을 계속 들이붓는 행위와 같다.


확증 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이란, ‘진위 여부가 불확실한 가설 혹은 그릇된 믿음을 부적절하게 강화하는 사고 성향을 뜻하는 말이다.'(Nickerson.1998). 다시 말해, 가설의 진위를 가리거나 문제를 해결할 때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만을 취하고 상반되는 정보는 무시함으로써, '그릇된 신념을 판단의 인지적 과정에서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Stanovich, West, 2007).. 그래서 '심리적으로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며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확증편향은 그릇된 신념을 더욱 강화시키고 뿌리깊게 고착시키는 동력이 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사이비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능수능란하고 화려한 언변과 그 말 뒤에 가려진 '논리적 애매성(Equivocation)과 모호성(Amphibology)'에 있다. 이는 공히 듣는 사람의 '자기연민'(Self-Compassion) 및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을 부추켜, 듣는 사람 스스로 '꿈보다 해몽을 더 좋게 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심리적 오류의 상태가 되게끔 만든다. 참고로 '애매성'은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은 성질'을 뜻하는 말로,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이 그 원인으로 두 가지 이상의 복합적 의미 혹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단어나 어휘를 무분별하게 사용할 때 발생한다. '모호성'은 '여러 뜻이 뒤섞여 정확하게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기 어려운 말의 성질'을 의미하는 말로, 말하는 사람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 의도적으로 얼버부림으로써, 듣는 사람에게 이해와 해석에 착각이나 혼돈을 일으키게 하는 상습적인 언어 표현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사이비들의 말을 똑 부러지게, '맞다', '아니다' 라고 단정짓거나 평가하기가 매우 어렵다.


세상사는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원인으로부터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 역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결과는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원인의 양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천차만별 각양각색인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하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얼굴만큼 다양한 인간성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이 꾸려가는 삶의 다양성과 복잡성 때문이다. 당연히 그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게다가 원인은 물론 그 과정의 전개까지도 논리적으로 또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간혹 존재한다. 똑같은 장면을 같이 보고, 똑같은 상황을 같이 경험하면서도, 각자가 느끼는 감정, 생각, 경험의 내용, 심지어 기억마저 제각각 다를 수도 있다. 인간의 삶, 특히 인간에 관한 문제는 섣불리 정형화 혹은 규격화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성급한 일반화' 를 경계해야만 하는 이유다.


만일 제시하는 이론 혹은 주장이나 의견에서 원인과 결과는 뚜렷한데, 그 과정이 생략되어 있거나 흐릿하다면 반드시 그 전체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주장이나 의견이, 사실의 근거가 아닌 온통 전제와 가정 또는 감정에 기반하고 있다면 두 번 다시 쳐다볼 가치조차 없다. 말과 글과 사회적 권위와 명성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반드시 무언가에 대해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말을 하지 않는 것, 스스로 말 못하는 것, 말을 해서는 안되는 상황에서 말을 하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 이 또한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진보(陳普)'와 비슷한 부류들이 기승을 부린다. 어지러운 사회는 이들이 기생하고 성장하는 좋은 텃밭이다.


여담이다. 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그 사람 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을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설령 말한다고 해도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어찌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그럴진대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부분 일방적인 추측의 의견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권위있는 신경의학자이자 작가인 올리브 색스는 이렇게 통찰했다. "만약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전기(傳記)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 자신을 통해, 우리들 안에서 즉 지각· 감각· 사고·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무의식 중에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따라서 어떤 사람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이전에, 그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그 말의 권위와 영향력만큼 중요한 선결문제로 대두된다.


한편으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적극적 경청'이 요구된다. '적극적 경청'이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듣는 태도와 능력을 말한다. 그 어떤 선입견 이나 판단, 분석, 진단을 내려놓고 상대가 하는 이야기에 온 몸으로 귀 기울이는 듣는 일이다.' '적극적 경청'은 '공감적 이해'를 이끌어 내어 말하는 사람 스스로 문제의 근본 원인 발견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때로 '비판적 사고'를 이끌어 내어 그 사람의 '민낯' 혹은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 가능케 해주기도 한다.


각설하고 사람과 마찬가지로 읽기에서 훌륭한 책과 바르고 정직한 글의 선택, 아울러 비판적 사고는 배움을 통한 정신적·지적 성장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하물며 우스개 소리로 이른바 '지가복음', '내가복음', '내가바라밀다심경' 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인용한 갈암 이현일 선생의 글은 시사하는 바 그 의미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각별하다 하겠다. 솔직히 말해서 아주 아주 가끔은 사이비의 특성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졸(拙)한 내게는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남을 지적하는 데는 두 손가락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나머지 세 손가락은 언제나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처럼 무시된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 고 했던가. 혹 마음은 항상 한결같이 정직하지 못할지라도, 몸은 언제나 정직하다. 그래서 더 각별한 건지도 모르겠다.(2021.1.21 쓰고, 1.25 다시 고쳐쓰고 다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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