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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Feb 11. 2022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갈리아의 수탉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세계의 사상으로서의 철학은 현실이 그 형성과정을 종료하여 확고한 모습을 갖추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시간 속에 나타난다. 철학이 회색의 현실을 회색으로 그려낼 때 생명의 형태는 이미 낡아져 버렸으니, 회색에 회색을 덧칠한다 해도 생명의 형태는 젊음을 되찾지 못하고 다만 그 진상이 인식되는데 그칠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헤겔, 『법철학』서문).


이성(理性)과 관념의 철학자 헤겔이 「법철학」 서문에 남긴 유명한 문장이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신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아테나'로 나온다. 미네르바는 전쟁과 평화의 여신, 기술, 의술, 음악, 시를 관장하는 지혜의 여신이다. 미네르바를 상징하는 징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부엉이요, 다른 하나는 올리브 나무다. 미네르바의 징표인 올리브 나무는 '평화', 부엉이는 '지혜'를 상징한다.


헤겔은 법철학을 논하면서 왜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거론했을까? 여러 다양한 해석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앞서 인용한 문장들로부터 그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영어로 철학을 뜻하는 'Philosophy 필로소피'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에서 유래하였다. 고대 그리스어 '필로'는 '사랑', '소피아'는 '지혜'를 뜻한다. 어원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철학이다. 그 핵심은 '지혜'다. 철학은 지혜를 통해서 세계와 사물의 현상과 가치를 관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등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관조의 차원에서 철학은 그 자체로 현실을 바꾸는 도구가 아니다. 이미 마무리된 현상의 결과를 놓고 진상을 파악하고 해석을 하고 현재에 반영하게 해 준다. 그것을 제대로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지혜다. 


삶의 짧은 경험에 따르면, 지혜가 참으로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시기는 밝고 평온한 때가 아니다. 나 자신을 비롯하여 내 주변 또는 온 세상이 그야말로 혼돈 혹은 어둠 속에 온통 휩싸여 갈피를 못잡고 있을 때다. 이때 비로소 철학의 진정한 가치가 발휘된다. 온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져야 비로소 빛의 진가를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날이 추워져야 비로소 따뜻한 것이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칼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1844)'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철학이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그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듯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철학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무기를 발견한다. 모든 내적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독일 부활의 날은 갈리아의 수탉(Gallia Rooster)의 울음소리에 의해 고지될 것이다."  


위의 문장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다음 해, 마르크스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1845)'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중요한 건 세계를 변혁하는 일이다." 


'갈리아의 수탉'은 프랑스 민족을 상징한다. 프랑스 민족의 기원이 갈리아족 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거론한 '갈리아의 수탉'은, 시민의 자유를 가능하도록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주도한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 무산계급)을 의미한다. 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로 비유되는 철학의 지혜가 현상에 대한 관념적인 분석· 해석· 이해· 통찰의 차원이라면, '갈리아의 수탉'이 의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마땅히 견지해야만 하는 적극적인 실천의 차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마르크스는 철학을 통한 통찰과 각성 내지는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서 실천의 차원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의도한 것이다.


나름 정리하자면, 세상이 어둠에 휩싸였을 때 단순히 진상을 파악하고 세상을 해석하여 이해하는 차원에서 철학의 지혜 그 자체로 존재 가치가 결정되지 않는다. 세상을 더 나은 온전한 방향으로 실천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동기부여를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철학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 다시 말해, 수탉이 세벽을 깨움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어둠이 걷히고 아침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리듯이, 철학의 임무는 과거와 현재의 현상을 아울러 파악하고 이해함으로써, 현재의 그릇된 현실을 온전하게 바로잡아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음을 소리 내어 세상에 알리는 선도자의 역할, 즉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로 대표되는 헤겔의 통찰이다. "세상을 해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해석을 토대로 세상을 온전하게 변혁하는 것이다." 이는 갈리아의 수탉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의 통찰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지혜를 상징하는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그리고 희망과 개혁 그리고 새날의 도래를 알리는 '갈리아의 수탉' 어느 쪽이 더 이성적이고 현실적일까?  마땅히 고민해 볼 일이다. 이건 옳고 그름이나 우열의 선택이 아니기에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나는, 그 어느 쪽도 접어둘 수 없는 소중한 철학적 가치와 현실적 가치를 동시에 부여하고 싶다. 


동일한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헤겔과 마르크스의 이해하고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르듯이, 철학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식견과 가치관에 따라 천차만별로 각각 다를 수 있다. 이는 인간에게는 무엇을 보고 읽고 이해하든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사고방식, 즉 '사고의 틀’ 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의 상태, 호불호 등과 같은 정서 혹은 감정의 기분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다양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든 어김없이 '사고의 틀', 혹은 '생각의 틀'을 거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무지하면 무지한 대로, 똑똑하면 똑똑한 대로, 박식하면 박식한 대로 누구나 자신만의 독특한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다. 단지 자동적 사고로 작동하기 때문에 스스로 잘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사고의 틀', '인식의 틀', '스키마', '프레임, '패러다임' 등은 모두 그 맥락에서 비슷하거나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의 틀'이 한 사람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 그것도 집단적으로 똑같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미국의 기자로 작가이자 저명한 정치 사회 평론가인 월터 리프먼은,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다"(월터 리프먼, 'The Stakes of Diplomacy', 1915)라고 통찰한 바 있다. 제품을 모양이 똑같게 대량 생산하려면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생산도구가 있다. '금형'이다. 금형은 '금속으로 만든 거푸집(형틀)'이다. 똑같은 형태의 결과물을 반복적으로 대량 생산하기 위해서 금형이 없으면 안 된다. 이 금형 안에 어떤 재질의 재료를 넣든지 간에 똑같은 모양으로 나온다. 단지 재질만 다를 뿐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사회 환경 속에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마치 '거푸집(금형)'과 같은,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한다.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것이 관습일 수도 있고 사회적 규범일 수 있으며 문화 혹은 교육 또는 사회 환경일 수도 있다. 미국의 정신분석가 이며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구체적으로 뚜렷하게 인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를 '무형의 권위(또는 '익명의 권위')'라고 명명했다. 


다양한 개성과 가치관을 가진 자유로운 개인들이 함께 어우러 사는 현대의 민주사회에서 집단적으로 '모두가 획일적으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일'이 가능한 것은 바로 '무형의 권위'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무언가가 사람들의 생각이나 판단을 획일화시키는 심리적 도구 또는 교묘한 세뇌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무형의 권위' 혹은 '익명의 권위'는 문화, 언론, 미디어, 인터넷 포털, 인터넷 커뮤니티, SNS, 광고, 유행, 교육, 종교, 귄위, 관습, 집단의 이해관계 등등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른바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사회적 집단 세뇌'를 가능케 해주는 것들이다. 


가랑비에 옷 젓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집단 세뇌는 미처 의식조차 못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매개 도구는 각종 매스미디어와 문화, 사회 환경과 여론, 그리고 교육이다. 심지어 일상으로 쉽게 접하는 광고도 그 한몫을 크게 담당한다. 개인의 이익이나 욕구 혹은 그것이 집단의 이해관계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집단 세뇌는 더욱 쉬워진다. 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지속적인 반복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간의 세뇌는, 정상적인 사람을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인지적 왜곡', '인지부조화', '확증 편향', '지나친 일반화'  등으로 이끈다. 결국 정상적인 사람의 이성적 판단능력마저 감퇴시키고 비이성적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간혹 주변에서 현실적인 언어보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를 일상에서 즐겨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종교 중독이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일상 언어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관찰한다면, 보통사람들과 다른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매우 이성적이고 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특히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이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전혀 그렇지 않다. 이유야 어떠하든지 간에, 일상의 대화 중에서 현실과 상식에 동떨어진 이야기를 곧잘 화제로 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것인가? 사전을 보면, 추상적 (抽象的)이란 말은, "①어떤 사물이 직접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는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추고 있지 않은. 또는 그런 것. ②구체성이 없이 사실이나 현실에서 멀어져 막연하고 일반적인. 또는 그런 것."이라 정의한다. 관념적이란 말의 의미도 비슷하다. 개념은 가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실체가 없거나 혹은 그 실체를 파악하거나 검증할 수 없는 것', 이게 바로 추상적인 것이고 관념적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사랑합니다"는 추상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말은 한 때 백화점 주차 안내원들이나 심지어 세 자리 숫자의 전화 안내원에게서도 흔히 들었던 말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사실적 근거나 구체적인 어떤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한 그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사람이 자신의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즉 그 사람이 즐겨 사용하는 언어, 즉 말과 글은 바로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나타내는 일종의 가늠쇠라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그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며, 그 사람의 생각을 지탱하는 뿌리가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당연한 소리 같지만, 역설적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언어를 즐겨 사용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심리적 중독이나 세뇌에 쉽게 잘 걸릴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종교 중독이나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일은 집단 세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분석철학의 선구자인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는 세계의 어떤 현실을 논리적으로 표현하고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뜻과 의미가 분명한 논리적 문장으로, '현실의 가능한 상황'을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언어라 할 수 있다. 참과 거짓, 일치와 불일치를 확인하거나 증명할 방법이 없는 모호하고 애매한 언어는 곧 추상적 혹은 관념적 언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함이 마땅하다"라고 단언하였다. 즉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언어로써 현실 또는 현상을 논리적인 문장으로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침묵하여야만 한다고 통찰한 것이다. 


요즘 무소불위의 초법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정의와 공정을 외치며 태극기를 마치 갑옷처럼 온몸에 두르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이들을 본다. 현실인식이 극단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들도 사이비 종교집단에 빠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다만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실현마저 의심스러운 정치적 언어들을 입에 달고 있다는 것만이 다르다. 자유, 민주, 애국, 애족, 정의, 공정, 공평 등등. 내세우는 단어와 자신들의 현실 행동이 전혀 일치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형적으로 인지부조화와 인지적 왜곡의 상태에 빠진 듯한 사람들이다. 최근에는 사이비 이단종교와 기성 종교의 종교 중독으로 의심되는 이들까지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이들은 태극기, 성조기, 심지어 때때로 일장기까지 들고 활개를 친다.


물론 일부에 국한되어 있지만, 이들은 정치와 신앙을 동일시하여 자신들과 정치적 또는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동족이 동족을 혐오하고,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고, 이웃이 이웃을 적대시하기를 밥 먹듯 한다. 기이하게 왜곡된 정경유착과 현실 정치에 언론을 필두로 기존 종교는 물론이고 심지어 사이비 종교까지 주도적으로 개입된 사회적 집단 세뇌, 이게 민주주의 체제인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 사회의 참담한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사를 잘 살펴보면, 세계 어느 나라와도 그 발전 사례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와 경제는 눈부시게 괄목 성장했지만, 오직 과거 일제식민지 잔재의 청산과 민주주의 정치의 발전은 단 한 번도 성숙하고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그중에서 특히 정치, 언론, 사법, 검찰, 대학이 마치 썩은 사과상자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썩은 사과상자 안에 들어 있는 사과는 비록 제 홀로 아무리 싱싱하고 멀쩡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주변 사과와 똑같이 썩고 만다. 멀쩡한 사과가 이내 썩는 원인은 주변의 썩은 사과들의 영향력보다는, 사과 상자 내부의 썩은 공기의 영향력이 훨씬 더 크다.  따라서 멀쩡한 사과를 썩지 않게 보관하기 위해선, 썩은 사과상자를 즉각 폐기 처분하고, 새로운 상자로 대체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현재 막장을 치닫고 있는 대한민국의 암울한 정치· 사회 상황은 그야말로 지혜의 상징, 미네르바의 부엉이의 힘찬 날개 짓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선과 악, 사실과 거짓, 사실과 진실, 정의와 불의, 옳고 그름, 도덕과 도덕이 아닌 것을 분별은커녕 섣불리 판단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참으로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라는 말이다. 아울러 잠자는 사람들을 깨우고 새벽을 깨우듯 뭇사람들의 생각을 깨워서 개혁의 새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범사회적 행동을 촉구하는 갈리아의 수탉 또한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혼란스러움을 인지하고 이해한 만큼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 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행동의 실천이 그만큼 필요한 시기라는 말이다. 비록 그릇된 과거와 현재를 반성케 하는 아무리 훌륭한 통찰이나 뼈를 깎는 각성일지라도, 그에 걸맞은 적절한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행동의 변화가 구체적인 실행으로 뒤따르지 않는다면, 단지 그것은 그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희망사항이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혜로운 미네르바의 부엉이도 좋다. 새벽을 깨우는 갈리아의 수탉은 더욱 좋다. 지혜는 철학하는 가운데서 나오고, 지혜의 실행은 의지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실에서 그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갈리아의 수탉' 처럼 마음이 열리고 생각이 깨어 있는 시민들을 이끌 수 있는, 인물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 사회엔 그 진위의 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표면적으로 미네르바의 부엉이, 갈리아의 수탉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이들은 꽤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시민들 중에서도 찾아보면 수두룩하게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선두에서 이끌 수 있는 강력한 결단성을 겸비한 지도력과 개혁에 대한 변함없는 실천 의지,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까지 고루 갖추고 있는 공의로운 인물은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현실이다.


한갓 졸(拙)한 필부에 불과한 내 기억에, 한 때 대의를 위해 생명을 초개처럼 버릴 듯이 열정을 불사르며 깨인 시민들에 앞장섰던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사회적 혹은 정치적 욕망을 성취하는 순간부터, 마치 카멜레온처럼 극단으로 변신하여 마음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는 모습을 흔하게 보았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진정성 있는 지도자의 존재 유무다. 


정략이나 실체가 모호한 좌우 이념이나 선택적 정의나 도덕 혹은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 양심적이고 공의로운 지도자가, 지금 우리 사회엔 그 무엇보다 필요하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체 게바라나 넬슨 만델라 같은 투사형의 검증된 지도자다. 


깨인 시민들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불타고 있는 촛불 개혁과 그 여망은, 그 어떤 명분, 그 어떤 정략, 그 어떤 사적인 이익이나 권력욕에 따라 사분오열로 휩쓸리거나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개혁의 실행이 개혁의 의지가 어떤 이유로든 가로막히거나 중단되거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정치적 언어로 인하여 한낱 희망사항으로 한갓 공허한 메아리로 그쳐서는 더욱 안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대한민국을 세계가 부러워하는 선진국에 걸맞게 변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선을 앞두고 막장을 치닫는 듯한, 우리 사회의 암담한 정치 현실에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갈리아의 수탉을 대비하면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외침을 떠올려 본다. "모든 꽃들을 다 꺽어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2017년 2월 28)


※위의 글은 5년 전 19대 대선을 앞두고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현실은 별반 변한 게 없다. 오히려 더욱 더 막장으로 치닫는 듯한 형국에, 한갓 필부에 불과한 졸하디 졸한 내 마음이 참담하다. 일부 문장을 부분적으로 고쳐서 브런치 글로 다시 올린다.(2022.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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