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폰 덕택에 요즘 sns와 인터넷을 통하여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유행이 된 듯하다. 컴퓨터를 전혀 못 다루는 사람도 스마트폰만큼은 전문가 뺨칠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독이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으로 가끔 병적이라 할 만큼 지나친 사람들을 본다.
여하튼 이러한 유행 덕분에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의 글, 즉 글쓰기에 대한 주제로 밥그릇을 삼는 사람들이 부쩍 눈에 띈다. 그것은 분명히 그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좋은 재능이고 사회적 능력이다. 예전엔 유명 문인 작가들과 문학 관련 교수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웬만한 글쟁이들이라면 발을 걸치고 있는 듯하다.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가장 강조하는 좋은 글의 공통 요건으로 짧은 글, 즉 '단문(短文)'을 든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좌우 앞뒤 거두절미된 언론보도형의 짧은 문장으로 그들이 가장 익숙해하는 글이다.
그런데 좋은 글의 요건이 되는 단문(單文)과 짧은 글인 단문(短文)은 다르다. 단문(短文)은 말 그대로 짧은 글이고, 단문(單文)은 주어 부분과 서술 부분이 각각 하나씩 존재하는 글이다. 단문(單文)은 글의 길이와 상관없이 주어부와 서술부가 각각 하나씩만 존재하므로, 뜻을 보다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단문이 좋은 글의 공통된 요소는 될지언정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글은 문학적인 글도 비문학적인 글도 있다. 각각의 특성상 그 기준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글은 짧은 단문(短文)이 좋다는 의견은, 글 하나하나에 뜻이 담겨 있는 표의문자인 한자와 소리로 뜻을 나타내는 표음문자인 한글의 차이를 간과한 결과다. 즉 한자와 달리, 한글은 보다 분명한 뜻을 드러내고 맥락상 풀어써야 할 때는 풀어야 하고 꾸며야 할 때는 꾸며야 한다. 간결한 것과 짧은 것은 길이로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지면과 시간이 제한된 보도 형식의 문장은 분명한 뜻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단문(短文)으로 짧고 간략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단문(單文)도 흔히 짧은 글로만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해다. 예를 들면, '그녀는 키가 클 뿐만 아니라 얼굴도 예쁘다'는 짧은 글이지만 복문(複文)이다. 이를 단문(短文)으로 쪼개면, '그녀는 키가 크다. 그녀는 얼굴이 예쁘다.'로 주부와 술부가 각각 하나인 단문(單文) 2개가 된다. 다시 전체 내용을 단문(單文) 한 문장으로 바꾸면, '키가 큰 그녀는 예쁜 얼굴을 가졌다.'가 된다. 물론 같은 뜻으로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어떻게 사용할지는 글 쓰는 이의 몫이다.
그 외에도 이와 다르게 요약하고 함축한 글의 대표적인 것이 시(詩)다. 좋은 글의 요체는 문장 수사의 방법이나 형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있다. 간혹 학자나 교수들이 문인들보다 더 좋은 글을 쓰기도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르치기 위해서 학문적으로 깊고 다양한 독서를 하고 또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논하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글, 즉 논문을 읽고 쓰는 데에 오랜 시간 숙달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능숙함과 숙달은 거기에 공을 들인 시간과 노력이 말해준다.
어째튼 그가 진정한 글쓰기 선생인지를 검증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검증의 기준은, 그가 가르치는 이론과 방법들 혹은 남의 글을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세세히 평가하는 글들에 있지 않다. 또 이현령 비현령이 가능한 짝퉁 하이쿠 류의 짧디 짧은 글들에도 있지 않다. 실전의 글, 즉 일정한 형식과 논거를 갖추고, 남의 생각이 아닌, 그만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그의 글에 있다. 다시 말해, 그 자신의 사유를 풀어낸 산문 글을 보면 대략적인 검증이 가능하다. 단지 짧게 요약한 문장 몇 개로써, 자기만의 사유 혹은 성찰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은 그가 내민 명함에 가려 간과된다. 하물며 그의 글이 바람 든 무를 씹는 느낌이 든다면, 두말할 것도 없다.
원천적 생산자로서 물건을 만드는 사람, 그 물건들을 수집하여 이익을 남겨 공급하는 사람, 좋은 물건들을 선별하여 진열해 놓고 파는 사람, 물건을 생산할 수 있는 방법과 이론을 가르치는 사람, 등은 별개다. 즉 생산자, 공급자, 장사꾼, 선생은 각기 다르다. 잘 가르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또 좋은 글을 쓴다고 해서 잘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이론과 실제는 현실에서는 차이가 난다는 것은 인생의 쓴 경험이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 그리고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물론 무엇보다 독서는 중요하다. 당연히 전문영역의 독서와 상식 교양 영역의 독서는 구분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단견으로, 내가 문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치유 목적의 글쓰기'에 대한 것이다. 문학적인 글쓰기나, 신변잡기적인 산문, 또는 비문학적인 칼럼형 논증형 글쓰기에 대한 것도 아니다. 치유는 '병을 치료하여 낫게 하는 것' 이다. 특히 상처입은 마음 또는 아픈 마음과 관련지을 때, 원래의 온전한 상태로 건강하게 회복하는 것이다.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글이나 경험을 통해 심리적으로 일시적인 위로 또는 위안을 받거나 통찰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일시적인 위로나, 위안, 통찰 등등이 반드시 치유와 연계된다는 보장은 없다. 치유는 느낌만으로는 또는 생각만으로는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계기를 통하여 얻은 통찰, 각성 혹은 느낌이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회복하고자 하는 강렬한 개선의 의지를 불러 일으키고, 그 의지가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치유는 진행된다. 아무리 강력한 각성도 현재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한 치유의 효과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온전한 상태의 건강한 사람은, 태풍이 아닌 이상 바람이 세게 불어도 굳이 애써지 않아도 걷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바람에 힘없이 떠밀리거나 넘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약간의 바람에도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 온전치 못한 사람이다. 비록 바람이 불어도 심지어 바람을 마주하고도 개의치 않고 자연스럽게 제 갈 길로 걸어갈 수 있는 것, 이렇듯 치유는 온전한 상태로의 회복이다. 둘러보면 의외로 독서치료를 포함하여 상당히 많은 관련 강좌가 있다. 우연히 그들이 과정에서 제시하는 자료의 글들을 흘낏 훑어보는 기회가 생겼다. 일정 기간 강좌를 거친 사람에게 수강료 이외에 "~치유사, ~치료사"라는 그럴듯한 명목의 자격증까지 돈을 매겨 사고 판다. 지식과 교양의 머리로만 아는 것만으로는 남을 고칠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이 사람의 아픈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물며 자기를 치유한다는 것은 오죽하겠는가. 물론 자격증을 주는 입장에서는, 꽤 괜찮은 사업이다. 분필과 걸맞은 교재와 가르치는 입만 있으면 되니 그러하다.
소위 글쓰기 선생이 알려진 명함으로 글을 수단으로 해서, 자칭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치유선생으로 자처하며 밥그릇을 위한 돗자리를 깐 것은, 그들이 먹고사는 삶의 방식이라 뭐라 할 것은 못된다. 하지만 글을 수단으로 하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그러한 발상을, 아무런 의심없이 그냥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사람의 마음을 다루고 치유하는 진짜 전문가들은 반드시 자기이해라는 전문적인 자기분석 과정을 거친다. 자기 분석은 주관적으로 자기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전문 멘토의 지도와 심리 상담을 거친다. 이는 필수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다양한 전문가의 지도와 상담을 각각 따로 받기도 한다. 스스로 불완전한 인간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 못하는데, 자기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남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리는 만무하다. 하물며 마음의 상처는 오죽하겠는가. 특히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없는 사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인생사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그리고 과정 없는 결과 또한 없다. 치유라는 말의 뜻은 "치료를 받아 병이 낫는 것"을 의미한다. 치료의 전제는 아픔을 유발하는 병이 있고, 상처가 있다는 것이고, 또 그것을 아는 것으로 철저히 개인의 영역이다. 그다음으로 병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전문적인 영역이다. 병의 존재를 알고 원인을 파악해야 치료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원인 파악의 진단기준을 아예 모르거나 잘못되어 있다면, 병과 상처를 더 키울 위험이 다분히 존재한다.
증세가 뚜렷이 보이는 상처나 병이 그러할진대,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병, 심리적 질환은 두말할 것도 없다. 마음의 병에서 회복한 치유의 경험이 없이 머리와 입만으로 잘 무장된 치유자는 칼을 쥔 선무당이요, 갓난아이의 손에 쥐어진 칼을 연상하면 되겠다. 인간 중심의 심리상담 치유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결정론적 사고, 성급한 일반화, 가치관의 강요, 슈퍼맨식 해답 제시 등에 있다. 인생에 답은 없다. 인생의 답은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다. 좋은 치유상담자는, 내담자를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혹은 지시하거나 명령하지 않고, 온전히 내담자의 편이 되어 내담자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하며, 이끌어주는 사람이다. 심리 치료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담자의 인간적인 자질이다. 심리치유는 방법과 이론만으로는 어렵다. 오직 이론과 방법에만 의존하는 것은, 마치 강의 모래톱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심리학에서 임상심리, 즉 진단과 적용의 방법을 연구하는 전문분야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심리 치유 목적의 글쓰기는 자기에게 마음의 상처가 있고,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기가 어떠한 상태에 처해 있는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한 글쓰기가 추구하는 방향은 그것들이 더 이상 자기를 아프게 하거나, 갈등속으로 더 이상 몰고 가지 않도록 자신을 성찰하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정신적 온전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자기 돌봄'과 '자기 배려'가 그 목표다.
특히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비밀이 보장되는 안전한 타인과의 신뢰 관계는,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중요한 치료적 요소가 된다. 한편으로,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라 볼 수만 있다면, 그 누구보다도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타인의 위치에 '자기'를 대체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적나라한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솔한 글쓰기는, '자기 치유' 또는 '자기 돌봄'의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치유의 역동적 에너지는,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는 고백의 과정을 통해 그 아픔을 다시 직면하는 단계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타인이 나를 판단하려 하거나 전혀 정죄하지 않는 상태의 적극적인 경청과 무조건적인 공감을 통해, 내면의 문제가 해소되고 내면의 치유가 시작되는 카타르시스가 일어난다. 또한 그를 통해 공감적 이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때문에 내면의 상처, 특히 내적 수치심과 관련된 고백은 아무에게나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인격적 차원이든 환경적 차원이든, 상호간에 온전한 신뢰와 안전이 바탕이 되어야만 하고, 또 철저히 보장되어야만 한다. 행여 불특정의 다수에게 공개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고백하는 행위는, 마치 언제 내 앞에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의 작동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외부의 낯선 사람들에게 맡기는 행위와 같다. 기존의 수치심 위에 또 다른 수치심을 더하고, 마음의 상처를 더욱 깊이 덧나게 만들 위험이 반드시 뒤따르기 때문이다.
치유를 전제로 한 글쓰기는 반드시 전문가의 조언과 진단과 전문적인 독서를 기반으로 한 분명한 자기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전문적인 독서라 함은, 심리학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기능주의와 구조주의, 그리고 심리 이해와 정신치료의 주류 고전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 분석심리학, 개인심리학, 자기 심리학, 대상 관계학에 관련된 독서를 뜻한다. 최소한의 개요와 핵심 주제 정도만이라도 이해해도 자기를 알아가는 길잡이로써 큰 도움이 된다.
심리적으로 자기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도 아프다고 인정하지 못하는데 치유의 역동은 일어날 리 만무하다. 자기이해가 없이 주워들은 풍월로 온갖 심리 철학 이론들을 갖다 붙인 치유목적의 글쓰기는, 자기합리화의 단서 혹은 일시적인 자기만족과 심리적 위안을 줄지언정 치유의 역동은 불가능하다. 마치 구멍 난 타이어에 임시방편적인 땜질을 하는 격이다. 새 걸로 교체하지 않는 한 언제 어디에서 뻥하고 다시 터질리는 아무도 모른다.
만일 민낯을 감춘 은밀한 자기를 글로 꾸미고 포장하여 과시적으로 세상에 드러내어 외부으로부터의 끊임없는 관심과 위로를 기대하고, 또 누군가에게 부단히 인정받으려는 심리적 욕동이 크다면,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중독에 빠질 위험이 다분하다. 거듭 말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게 과하면 독이 된다. 특히 자기 아닌 외적인 대상에 가치를 두고, 내적인 결핍을 외적인 것으로부터 심리적 보상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심리적인 의존 중독에 빠지기 더욱 쉽다. 이러한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을 가리켜, '상호 의존증', 혹은 '관계중독'이라 한다.
관계 중독자들도, 심지어 인격장애자들도 아름다운 글, 멋진 글, 논리적인 글을 쓴다. 뛰어난 예술작품도 남긴다. 그들이 가진 재능으로 세상에 공헌도 한다. 인격장애자들 중에 잘 가르치는 명강사, 대단한 선생들도 많다. 물론 인격장애와 관계중독의 뚜렷한 차이는 있다. 전자는 자기중심적이며 관계중독은 타인 중심적이다. 인격장애자는 남 탓을 하고 관계 중독자는 자기 탓을 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자기는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확신하는 데에 있다. 역설적으로 인격적 장애나 심리적 질환 혹은 왜곡과 편견을 강화하는 데에 있어서 글쓰기처럼 효과적인 수단도 없다 하겠다.
관계중독은 상호의존 중독의 또 다른 표현이다. 사회적 집단중독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꾸준히 제기되고 연구되어 왔다. 사회가 중독을 부추기고 조장한다. 이에 편승하여 선무당처럼 자기 이익을 챙기고 밥그릇을 챙기는 사람들이 있다. 치료 가능한 장애는 반드시 전문가에게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또 심리적 결함은 남이 대신 채워줄 수 없다. 바람직하고 건강한 관계 회복을 통해 스스로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채워 나가는 것이다. 그 '극복의 수단'으로써 '자기 돌봄'의 방법으로써의 글쓰기는 좋은 도구가 된다. 자기 돌봄은 지속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점진적으로 자기와의 온전한 관계 회복에 그 지향점이 있다.
여하튼 적나라하게 벌거벗은 민낯의 자기를 알고 또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은 모든 심리 치유와 온전한 관계 회복의 바람직한 출발이 된다. 부끄러워도 자기다. 수치스러워도 자기다. 죄의식으로 가득 차도 여전히 자기다. 이러한 자기를 내가 아니면 과연 누가, 이 허물 투성이 결함 투성이인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보듬어줄 것인가? 내가 나를 정죄하고 이해조차 하려 안 하는데, 이런 나를 누가 이해해 줄 것인가? 직면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와 직면해야 한다. 치유의 글쓰기를 모색한다면, 반드시 껍데기를 다 벗은 자기와 직면해야만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해석해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거두절미된 짧고 멋진 문장 몇 마디로 자기를 드러냈다고 우기는 것은 자기기만에 불과할 따름이다. 자기를 꾸미는 것과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별개의 차원이다. 자기를 드러낼 수 있다면 글쓰기 선생들의 방법론은 전부 무시해도 좋다. 낙서도 좋다.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언어적 수단을 총동원해서 자기의 심정, 느낌, 정서 등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 이와 관련한 우리말의 느낌. 감정 형용사는 무궁무진하다.
자기이해 없이는 당신이 가진 학위, 혹은 자격증, 혹은 재능, 혹은 물질과 명함, 또는 당신이 아는 이론이나 지식이 일시적인 심리적 위안과 만족은 줄지는 모른다. 혹은 타인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잣대로는 상당히 괜찮은 잣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가진 마음의 공허를 채워줄 수도 없고, 또 상처로 인한 아픔에서, 마음에 박힌 작은 가시 하나 조차도, 그걸로는 결코 당신을 스스로 치유해 주지는 못한다. 이 글은 글쓰기를 통해 자기 마음을 치유하고자 하는 어떤 사람들을 생각하며 쓰는 글이다.
매미는 유충으로 짧게는 3년 길게는 17년 동안 어둔 땅속에서 지낸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껍질을 다 탈피하지 못하고 얼결에 세상 밖으로 나온 매미처럼 여겨질 때가 가끔 있다. (2016.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