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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08. 2017

인문학적 소양에 대하여

오늘 오전에 어떤 계기로 '인문학적인 소양'이란 말을 무심코 사용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무엇이 '인문학적인 소양'인가?라는 의문이 갑자기 들었다. 내가 들먹여놓고도 갑자기 혼돈스러워진 것이다. 스스로 그 의미를 잘 모르면서 습관적으로 사용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물론 내가 이 말을 사용한 의도는 나름 분명하다. 많이 배우고 지식이 많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했지만, 사람 같지 않은 인간성과 왜곡된 가치관을 지닌 사람, 혹은 근본적으로 인격 그 자체가 비뚤어져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 "인문학적인 소양이 결여된 사람'으로 특정하여 언급한 듯하다. 한 마디로 사회의 성공한 엘리트들로 많이 배웠지만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이다. 여기엔 종교인도 포함된다. 요즘 뉴스에서 그런 인간들을 너무 흔하게 보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전을 뒤져봤다. 인문학(人文學)의 사전적 의미는,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나와 있다. 소양(素養)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평소 닦아 놓은 학문이나 지식"으로 흔히 아는 교양(敎養)과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적인 소양이란, 사전적인 의미를 종합해 볼 때,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통해서 학습하고 배운 지식 즉 교양"으로 정리가 된다.


그렇다면, 인문학적인 소양이든 교양이든 지식의 유무, 많고 적음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여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새롭게 올라온다.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니다"다. 


사람 됨됨이(인품 혹은 인격, 인간성)는 학식, 지식 또는 지성, 교양 등 머리에 든 것만 가지고 판단하거나 단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소위 문학과 예술의 재능, 그리고 지성과 교양을 두루 갖춘 소위 배웠다고 하는 인간들 중에서 인간말종들이 어렵지 않게 찾아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오히려 배우지 못한 순박한 사람들이나 배웠다는 것을 전혀 자랑거리로 내세우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인격자들이 찾아진다.


그렇다면 내가 의미도 잘 모르면서 습관적으로 언급하였던 "인문학적인 소양" 은 대신에 "사람 됨됨이(인간성)"으로 정정해야 옳은 듯하다. 원래 말을 복기하면 이렇다. "머리에 든 것은 많지만, 올바른 인문학적 소양이 결여된 똑똑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민낯들을 요즘 뉴스를 통해서 비일비재하게 봅니다."  

이 말을 정정하면, "머리에 든 것은 많지만, 인간성이 돼먹지 않은 똑똑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민낯들을 요즘 뉴스를 통해서 비일비재하게 봅니다."가 되겠다. 하릴없이 따지고 보니 의미를 잘 모르는 말을 뭔가 아는 듯이 들먹였다는 생각에 좀 부끄러워진다. 상대가 이 말의 의미를 성격파탄자의 예를 들어 이해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이왕 나선 김에 인문학의 분명한 개념 정리의 차원으로 뒤져봤다. 


인문학(人文學 , Humanities)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에 대립하는 학문적 영역으로 인간과 인간의 사상, 그리고 인류 문화에 관한 모든 정신과학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인문학(Humanities)의 영어 어원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뜻의 라틴어 휴마니타스(humanitas)다. 이는 기원전 55년경 로마의 정치가, 웅변가, 철학자이기도 한 키케로의 저서 『웅변가에 관하여(Oratore)』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학습과 교육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파이데이아(paideia)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목적에 봉사하는 모든 학문들은 서로가 서로를 묶는 공통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고 마치 혈연에 의해 연결된 것인 양 상호 결속되어 있다."(키케로,『아르키아스 변론』 제2장, 안재원 역, 2014). 키케로의 말이다. 말하자면 인문학은 특정 장르에 한정된 학문이 아니라, 같은 목적에 봉사하는 학문 모두를 포함하는 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교육의 주요 범주는 음악, 기하학, 수학, 철학, 문법, 수사학, 논리학, 지리학 등이다. 이는 연관되는 여러 다양한 학문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궁극적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상호 유기적으로 결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키케로는 인문학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후마니타스(인간 본성, 인간 됨됨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후마니타스'의 관심은 학문들이 가지는 지식의 도구적 성격보다는 ‘인간 이해’에 있다. 따라서 키케로가 말하는 인문학이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도덕적으로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이끌어주도록 하는 학문이다. 즉 ‘올바른 인간을 기르는 교육’을 통하여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결국 키케로에게 있어 이상적인 인간이란 인문교양을 두루 갖춘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올바른 인간적인 덕성(德性)과 그에 어울리는 교양을 몸에 지닌 인간이라 하겠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는 신중심의 부정적 인간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고전적인 개념의 인문학 전통을 다시 이어받는다. 살루타티(C. Salutati)와 브루니(L. Bruni)는 당시의 중세 대학에서 유행한 새로운 교육프로그램을 가리켜 ‘스투 디아 후마니타스’(studia humanitas, ‘인문학 교육’)라고 칭하였다. ‘스투 디아 후마니타스’는 ‘인간성 함양을 위한 공부’라는 뜻이다. 그 교육과정의 내용은 고대의 고전 교육을 중심으로, 기존의 신중심의 교육과정과는 대립되었다. 여기서 함양해야 할 인간성이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자연적 본성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장차 획득해야 할 후천적 가능성'을 의미한다. 


한편 동양의 경우, 인문(人文)이라는 말은 주역(『周易』비괘(賁卦)  단사(彖辭)에 최초로 나타난다. 문자적인 의미에서 인문(人文)이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몸에 새겨진 무늬, 즉 '인간의 무늬'를 뜻한다고 연구자들은 해석한다. 왕필의 주역 해석을 번역한 글에 따르면, "강유(강하고 부드러움)가 교착하여 무늬가 이루어지게 됨이 하늘의 문채(무늬) 요. 문명으로써 제어함은 사람의 무늬(文明以止, 人文也)이다. 하늘의 빛나는 무늬를 잘 관찰해서 때의 변화를 살피며, 사람의 빛나는 문채(紋)를 잘 관찰해 천하를 교화하여 이루니라(왕필, 임채우 역)." 이에 덧붙여, "文明以止, 人文也"의 구절에 대해서 보충 설명하기를 "사람을 무력으로써 그치게 하지 않고 문명한 덕으로 제어함이 인간의 무늬다.(임채우 역)"라고 주석을 달았다.  


왕필에 이어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은 이해를 좀 더 쉽게 도와준다. "인문을 관찰하여 천하를 교화하고 풍속을 이룬다’는 것은 성인이 관찰하는 인문을 시·서·예·악으로 보는 것으로, 마땅히 이 가르침을 본받아 천하를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어야 함을 말한다(樓宇烈, 황종원 역, 2011)고 하였고, 이에 더하여 송나라의 정자(程子)는, “인문은 인리(人理, 인간의 도리)의 질서인데, 인문을 관찰함으로써 천하를 교화하여 천하가 그 예속(禮俗)을 이루는 것(송재소 역)”이라고 주(註)를 달았다. 


또 이와 같은 맥락으로 정도전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논하기를. "일월ㆍ성신(日月星辰)은 하늘의 문(天之文 하늘의 무늬)이고, 산천ㆍ초목(山川草木)은 땅의 문(地之文 땅의 무늬)이며, 시서ㆍ예악(詩書禮樂)은 사람의 문(人之文 사람의 무늬)이다. 그러나 하늘의 문(文)은 기(氣)로써 되고 땅의 문은 형(形)으로써 되지마는 사람의 문은 도(道)로써 이룩되는 까닭에, 문(文)을 ‘도를 싣는 그릇이다(載道之器).’라고 하니, 그는 인문(人文)을 말하는 것이다. 그 도(道)만 얻게 되면 시서ㆍ예악의 가르침이 천하에 밝아서 삼광(해, 달, 별)이 순조롭게 행하고 만물이 골고루 다스려지므로, 문(文)의 극치는 여기에 이르러야 이룩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정도전, 삼봉집 제3권 도은문집서, 김도련 역)


정리하면 동양사상에서의 인문학이란, 자연 상태 그대로 인간에게 아로새겨진 인간의 빛나는 무늬(人文), 즉 인간의 본성과 그 도리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학문이다. 그 목적은 일종의 문명화된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을 야만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바람직하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궁극적으로 인간다움과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하도록 이끄는 데에 있다. 일종의 문명적인 방법이란, 성인들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도(道)로 바람직한 덕(德)을 갖추게 하는 수단이다. 그것에 다다르기 위한 그 구체적인 가르침이 시서 예악(詩經·書經·禮記·樂記) 속에 있다. 여기에는 역사, 철학, 문화, 예술, 문학 등을 총망라하는 내용을 품고 있다.


전체적으로 인문학의 개념을 나름 요약해 보자면, 고전적인 의미의 인문학이란, 동양에서는 인간을 야만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도덕적인 학문이다. 서양에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특성, 즉 덕성(德成, virtue)을 갖추는데 봉사하는 학문,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봉사하는 학문 모두를 포함한다. 시대와 지리적 환경에 따라 다소 표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동서양 모두 '인간다움의 형성'이라는 공통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일깨우도록 도와주는 데에 그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인문학의 근본적 개념을 바탕으로 각론적인 다양한 학문 영역이 존재할 수 있는데, 즉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를 돕는 학문들이다. 주로 문학, 철학, 역사, 정치학, 법학 등이 이에 해당된다.


결국 인문학이란, 인간이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하여, 개인의 인격을 도덕적이고 올바른 정신상태로 형성되도록 도와주는 데에 봉사하는 모든 학문이라 할 수 있겠다. 이울러 무엇보다도 인간다움의 특징인 도덕적인 덕성(德性)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됨의 완성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유아독존적으로 고립된 우월한 개인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더불어 함께 할 때 비로소 실현 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한 이유를 제공한다. 이로써 인문학은 인간의 삶과 인간이 포함한 사회 전체를 올바른 상태로 이끌어 주는 학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째튼 분명한 것은 개념 정리를 하다 보니 인문학이 쉬운 학문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도 많이 어렵다. 흔히들 생각하는 문학작품이나 고전 등을 독서함으로써 얻는 단순한 지식이나 교양의 차원이 아닌 듯하다. 하물며 음악이나 예술을 논한다거나, 감성적이고 상업적인 대중소설이나 처세술, 자기계발서, 대중 인문학 등등 서적 몇 권 읽고 그 내용을 기억하고 토론한다고 해서 될 일은 더욱 아니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역사를 알아야 하며, 그것을 해석하게 해주는 철학을 알아야 하며,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알아야 하며, 인간의 삶을 녹아낸 문학과 예술 또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의 존재 의미는 물론이고 인간의 삶 조차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무리 많은 인문학적인 독서를 하고, 해박한 지식과 교양을 쌓아도 그것이 한 인간의 삶, 자신의 인격을 가치 있도록 변화시키는 정신적 동력으로 작동될 수 없다면, 그것은 한갓 도구적 성격의 정보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보이는 것들이 온통 인문학이다. 글 깨나 쓴다는 상업 작가들의 명함 앞에 어김없이 인문학자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음을 종종 본다. 그런데 간혹 들르는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인터넷이든 간에 온통 인문학이 널려 있는데, 정작 이 사회의 모습은, 인문학의 세계가 지향하는 바와는 전혀 다르게 각박한 현실의 모습을 본다. 교양의 차원에서 추구하는 것과 그 삶의 실상이 다르다는 것은, 곧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면에 집중하는 외식적인 사고가 팽배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다. 물이 없으면 더욱 갈증이 심해지고, 어김없이 물을 찾기 마련이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갈구하고, 정의가 실종되었기 때문에 정의를 갈구하는 것과 같다. 소위, '인문학 장사', '인문팔이'라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닌듯 하다.


"한  시대의 병은 인간의 삶의 양식이 변화될 때 비로소 치유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가장 효과적인 변화, 즉 자기 자신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에는 거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비트겐슈타인의 말이다. 같은 맥락으로 "실제와 동떨어진 통찰은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라고 말한 에리히 프롬의 진단은 정확하다. 어찌되었건 간에 개념적으로 따지자면, 인문학은 그 범위도 그렇지만, 관념이나 인식(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그것을 아우르는 실천적 영역에 속해 있다. 


여하튼 개념 정리를 하다 보니, 은근히 부끄러워진다. 이는 곧 내가 가진 얄팍하고 알량한 지식, 교양으로는 내 인격의 작은 모서리조차 변화시키거나 좀 더 나은 영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나아가는 데에 아무런 영향력도 발동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시시비비를 가리게 하고 경계선의 역할까지 충실히 했다 할지라도 말이다. 모르는 것은 허물이 결코 될 수는 없지만,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허물이 아닐 수 없다. 


"구하는 바가 있어 글을 읽는 자는 아무리 읽어도 소득이 없다.... 입술이 썩고 치아가 문드러질 지경에 이르러도 읽기를 멈추기만 하면 캄캄하므로 마치 소경이 희고 검은 것을 말하면서도 그 희고 검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그 말하는 바가 귀로 들어와서 입으로 나오는 것에 불과하므로 마치 배가 터지도록 먹고 도로 토해내면 신체(肌膚)에 이익됨이 없을 뿐 아니라 지기(志氣)도 괴려(乖戾)하게 되는 것과 같다."(이익, 성호사설 제13권/인사문(人事門)/ 유구 독서(有求讀書)).


손가락질을 하다 보면, 나머지 세 손가락은 언제나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본다. 내가 딱 그 꼴이다. 개 한 마리가 짖으면 영문도 모른 채 온 동네의 개가 따라서 짖어대는 법이다. 결국 나도 그렇게 짖어댄 셈이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곧 아는 것이다." 공자의 말이다. 다시 부끄러워진다. 여하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인문학적 소양 운운하며 누군가를 손가락질할게 아니라, 내게 새겨졌지만 빛이 바래져가는 인간의 무늬부터 우선하여 잘 살펴야 할 것 같다. 갑자기 갈증이 치민다. 냉수나 한잔 해야겠다.(2017.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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