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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Dec 08. 2017

화이부동(和而不同)에 대하여

"만일 누가 물에 맹물을 타고서 그걸 국이라 주장한다면, 그 맛을 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만일 상상만으로도 장엄하고 웅장한 오케스트라 합주에서 모든 악기가 한 음정 한 소리만을 뿜어 댄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위의 글은 춘추좌씨전에서 안영(晏子)이 그의 주군 제경 공에게 동(同)과 화(和)의 차이를 설명한 고사의 주요 논지를 이루는 내용이다. 이 고사에서 안영은 각기 다른 것들이 전체로 하나를 이루어 조화를 이루는 것과 그냥 획일적인 전체로서 단순히 융합하여 하나처럼 보이는 것의 차이를 확연하게 구별하도록 도움을 준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조화하고 화합하는 것'과 '그저 비위를 맞추고 동조하는 것'은 다른 차원임을 알게 한다. 


안영(안자)의 고사는 논어 자로 편에서 공자가 말한 '화이부동'(和而不同), 특히 '동(同)'의 개념 해석에 대한 전거가 되는 고사다. 이 고사를 근거로 동(同)을 '옳고 그름의 분별없이 맹목적으로 남을 따른다'는 뜻의 '뇌동'(雷同)으로 해석한다. 공부 삼아 두루 찾아보니, 이는 전통적인 해석인 듯하다. 


혹자는 이와 다르게 동(同)을 글자 그대로 '같음'의 뜻을 따르되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뜻을 달리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해석이 분분한 이유는 이 장에서 연관 지어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전후 상황이나 배경이 전제된 것이 전혀 없는 까닭이다. 


공자 자로 편에서 공자가 말한 원문은 이렇다. "군자는(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小人)은 동이불화(同而不和) 니라." 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표현에서 일부 차이는 있지만 대동소이하다. 그 해석은 이렇다. “군자는 서로 조화(화합)하되 뇌동(雷同) 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뇌동할 뿐 서로 조화(화합) 하지 못한다.” 


다른 해석으로는 고 신영복 선생의 해석이 찾아지는데, 선생은 지배와 공존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즉,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관용과 공존의 논리로,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으로 재해석한다. 그래서 선생은,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여러 해석들을 봐도 여전히 석연치 않다. 동과 화에 대한 의미는 이해하겠는데, 부동과 불화의 의미가 둔한 머리에 금방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 군자가 뚜렷한 주관이 있다면 소인은 뚜렷한 주관이 없는가? '없다'라고 분명하게 단정 지을 수 없기에 의문이 더해진다. 왜 군자의 동(同)과 소인의 화(和)를 대비하였는가? 


다행히 논어 주소를 찾아보니, "이 章은 군자와 소인의 지향과 행위가 같지 않은 일을 분변 하신 것이다. 군자는 마음이 화평하다. 그러나 그 소견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부동(附同 뇌화부동) 하지 않는다. 소인은 기호(嗜好)하는 바가 같다. 그러나 각기 이익을 다투기 때문에 화합하지 못한다."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해석이 오히려 원문의 전통적인 해석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이해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부동과 불화의 내면적 동기를 제시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공자가 말하는 군자와 소인의 차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울러 내면적인 동기 부분은 내가 유일하게 익숙한 관련 분야의 좁쌀만 한 선지식으로도 수긍이 가는 까닭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약용 선생의 해석이 있다. 논어고금주에서 선생은 전통적인 해석보다는 위에 소개한 주석의 설명, 즉 부동과 불화의 원인에 대한 부분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전제를 두고 화(和)를 '허술한 구석이 없이 치밀하게 가깝고 친한'의 의미인 주밀(周密)로, 동(同)을 친한 척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함께 한다는 뜻인 비병(比騈)으로 재해석한다. 이에 대해 박석무 선생은 주밀(周密)은 마음으로 가까움을 말하고 비병(比騈)은 힘을 과시해 보이려 외형으로 가까운 척한다는 것으로 풀이한다. 


이를 근거로 다산선생은 해석하기를, “군자는 주도면밀하지만 힘으로 결합하지 않으나, 소인은 여러 사람이 힘으로 결탁하지만 주도면밀한 사귐을 이루지 못한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고 해석하고 결론으로 “군자는 덕(德)을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 항상 마음으로 친밀하게 지내기에 세력으로 결탁하는 일이 없으나, 소인은 세력과 이익으로 사귀니 언제나 힘으로 어울려 당파를 만들지 마음과 의리로 친분을 굳게 하지 못한다”(君子有同德之人 未嘗不以心親密 而不以勢力相結 小人有勢利之交 未嘗不竝力樹黨 而不以心義相固)라고 재해석하였다.(박석무, 2008)


신영복 선생이 사회학적 관점에서 다소 비약하여 재해석한 것이라면, 다산선생은 대상의 심성(心性)에 근거를 두고 정치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이는 해석하는 사람의 관점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다산의 관점이 그 논거에서 더 수긍이 된다.


그래도 여전히 석연치 않은 것은 화보다는 동에 잇다. 해석이 분분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전제된 지식 또는 해석된 지식은 전부 다 지워버리고 근본 또는 원칙으로 돌아가 본래적인 의미를 따져보는 것도 한 방법이라 하겠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봤다.


동(同)이란 한자어의 사전적 의미는, "1. 한 가지 2. 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3. 함께(=同) 4. 그  5. 전한 바와 같은 6. 같다 7. 같이하다 8. 합치다(合) 9. 균일(均一)하게 하다 10. 화합하다(和合) 11. 모이다 12. 회동하다."이다.  


마침, '동(同)'의 고문자(古文字)에 대한 해석이 찾아진다. 청대(淸代)의 학자인 단옥재(段玉裁1735 ~1815)의 해석을 요약하면, “입(口)은 사람이 말하고 먹는 신체의 부분이다. 말하고 먹는 것은 사람에게 중요한 두 가지 일이다. 혀 아래도 역시 구(口)라고 하는데 이것으로 말을 하고 맛을 구별한다. 따라서 동(同)의 뜻은 이러한 입(口)이 모두 한 장막 아래 있다." (『說文解字注』)라고 풀이하였다. 이것은 한자어 '同' 字의 의미가 다 함께 생활을 누리는 생존 공동체(共同體)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예기」 예운에서 공자가 말하는 이상사회(理想社會)인 '대동(大同)'사회의 의미도 이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동(同)'의 사전적 의미나 문자적 의미에는 상동(相同), 동등(同等), 상합(相合), 합일(合一)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연히 ‘화(和)’는 조화, 배합, 평화, 화합 등의 의미다. ‘동(同)’은, 안전을 느끼는 한 장소, 한 자리에 여럿이 모여 앉아 함께 도란도란 밥을 먹고 있는 상황을 연상해 보면 그 이해가 좀 더 쉽게 다가온다. 이렇듯  ‘和’와 ‘同’은 동일하거나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대척이 되는 상반된 의미는 잘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국어 (国语)」정어(鄭語)에서 서주(西周 )의 사백(史伯 BC 806~BC 771)이 ‘和’와 ‘同’의 차이를 설명한 부분이 찾아진다. " ‘和’는 만물을 낳는 실질이고, 同하면 계속 이어지지 못한다.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평형을 이루게 하여 성장시키고, 생물들은 화(和)로 돌아간다. 만약 同으로 同을 보조하면, 그 동이 다하면 곧 사라진다. 그러므로 선왕은 土와 金, 木, 水, 火를 섞어 만물을 이루었다."


즉 풀어보면, ‘화(和)’의 본질적 의미는 만물의 실질적인 이치 곧 자연의 섭리로 다양성의 통일이요, 다원적인 여러 요소들의 화해와 화합과 공존이다. 이는 만물의 생장과 번성의 토대를 이룬다. 여기에 사물에 같은 요소나 성질을 획일화(同)하여 덧붙이는 것으로는 더 이상 성장 발전하기 어렵고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할 수도 없다. 이점에서 '화'(和)는 공자가 말하는 대동(大同) 개념 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안영(晏嬰)이 강조하는 논점도 마찬가지다. ‘和’는 서로 다른 사물, 서로 다른 면에서의 공존, 상호보완, 상호 조절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사백(史伯) 또한, 화(和)가 곧 사람 사이뿐만 아니라, 사물 사이의 관계를 해결하는 기본원칙으로 사물의 이치요 자연의 섭리라고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논의를 정리하면, ‘和’는 다양한 사물들,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조화로운 화합이요, 어울림이다. 단순한 동류가 아닌 다양한 것들이 일체가 되는 통일이다. 통일된 전체 속에서 제 각기 자기의 위치와 본분과 작용을 다양하게 지닌다. 또 그러한 것들이 차별이 없이 일정하고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 잘 어울리며 서로를 도와 완성시켜준다. 서로 어우러지면서도 서로 해침이 없고 서로 어그러짐 또한 없다. 


그러나 안영(晏子)이 말하는 '동(同)'과 공자의 철학에서 말하는 ‘동(同)’은 다르게 여겨진다. 그 관점이 다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안자의 ‘和’와 ‘同’은 사물 간의 조화와 화합, 상부상조에 중심을 두고 ‘和’와 ‘同’의 뜻을 구별한다. 반면에 공자는 ‘和’와 ‘同’을 직접적으로 대립시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으로 제시한다. 공자의 글에서는 이것 아니면 저것인 선택적 차원으로 인성적인 측면이 더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안영이 군신 간의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화와 동을 구별하여, 무차별적이고 획일적인 같음의 일치를 뜻하는 동(同)을 설명했다면, 후자는 다른 것과 같은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를 이루는 의미의 동(同)이다. 따라서 전자가 관계적인 측면에서의 화(和)와 동(同)이라면, 후자는 그러한 행위의 주체로써 인성적이고 본성적인 측면에서 화(和)와 동(同)이라 봐도 큰 무리는 없겠다. 


정리하자면, 화(和)와 동(同)은 다른 의미를 각각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포괄하고 수용하는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공자가 말하는, 和而不同’의 ‘不同’은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는, 즉 차별화를 인정하는 논리적 가치요, 반면에 ‘不和’는 조화와 공존, 그리고 바람직한 성장을 위한 통합의 원리를 거부하는 논리적 가치로 이해된다. 이는 '같지 않음', 즉 부동이 전제되고 인정되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화(和)가 성립된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한다. 


이로써 부동(不同)과 불화(不和)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가 융화되거나 어울릴 수 없는 극명한 대립적 관계에 있음이 더욱 선명해진다. 나와 다른 어떤 것들이 있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하는 한, 화(和)는 공허한 신기루일 따름이다. 공자가 말하는 이상 사회, '대동(大同) 세상'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대도(大道)가 행해짐이라는 원칙에 세워져 있다는 것은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부동과 불화의 차이는 그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차이, 곧 품성과 원칙의 차이임을 미루어 헤아려 본다.  이러한 화동(和同)의 개념적 인식에 기초하여, 공자가 말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문장을 타인들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일단 다시 보기로 한다.


‘군자는 화하고 동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하고 화하지는 않는다’. 


나름 의역하여 풀면, "군자는 그 추구함이 의(義)에 있기에 화합을 추구하고 조화를 이루며 획일성을 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和而不同), 소인은 그 추구함이 이익에 있는 까닭에 획일성을 추구하기만 할 뿐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기를 추구하지 않는다(同而不和)."라고 정리해 본다. 


살아 본 경험으로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특히 천성적인 성품은 그렇다. 전갈이나 뱀이 독을 쏘는 것은 천성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도 그렇다. '뚜껑은 열어봐야 알고, 시루는 엎어봐야 안다'는 속담도 있다. 그뿐인가. 일단 그릇되게 자리 잡은 고정관념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결코 웃어넘길 말이 아니다. 나 역시도 이점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흔히들 하는,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은 말은 개인적인 인간관계적 측면에서나 사회적 인간관계의 측면에서도 그냥 넘겨 들을 말은 아니다. 이는 곧 만사가 인사 즉 그 주체가 되는 사람 하기에 좌우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릴지언정 뽑히거나 쓰러지지 않는다. 나침반은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가리키는 그 방향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화(和)와 동(同)의 요체는 그 행위 주체의 중심과 원칙에 달려있다 하겠다.


아무튼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렇다. 첫째로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가치관과 왜곡된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는 한, 특정 목적의 이익을 추구하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논하고 동이불화(同而不和)를 탓하며 다양성의 인정과 조화와 화합 그리고 일치와 통합을 말하는 것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자기반성에 있고. 둘째는, 화(和)와 동(同)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공부하고 정리함으로써, 남의 해석이 아닌 내 머리로 개념을 이해하여 화려한 껍데기들 가운데서 최소한의 옳고 그름을 분변 하고자 함에 있다. 셋째는, 화이부동의 본래적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스스로의 표리부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름의 뒤늦은 의지에 있다. 춘추좌씨전의 안영의 고사를 읽다가 제나라 경공의 '화와 동이 다른가?'에서 문득 느낀 바 있어 어설픈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남긴다. "너 자신을 알라" 고대 그리스의 격언이다. (201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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