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君子)와 소인(小人)

by 파르헤시아

우리나라는, 모두들 알다시피, 국가적 절체절명의 내란을 극복하고 밤잠을 설쳐가며 노심초사 일하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정의 정상화, 내란세력의 발본색원과 척결, 국격과 국력의 회복 그리고 사회개혁을 차근차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 있다. 이같은 국가적 행보는 작년부터 최근까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제정세에 대비해 보노라면 정말 아찔해진다. 정말 천운(天運)이 아닐 수 없다.


이와중에 국적은 물론 정신상태까지 의심되는 야당 정치인들은 말할 가치조차 없고, 범국가적 범국민적 염원을 도외시하고 딴맘을 품은 듯한 여당의 일부 정치인들과 그들에게 빌붙은 수박형 철새들이 종종 눈에 띈다. 마치 아지랭이 같은 미래 권력의 확보와 쟁취에 눈이 멀어 같은 진영을 니편내편으로 갈라치기에 급급한 인사들이 유튜브와 이른바 푸세식 언론기업들의 주요 메인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나는 비록 졸(拙)한 필부(匹夫)에 불과하지만, 다시 한번 진지하게 되새기게 되는 말이 있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익(利)에 밝다". 공자의 통찰이다. 이말의 의미는, "사리판단을 할 때 군자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른 행위나 의로움 즉, 의(義)를 기준으로 하고, 소인은 이익과 불이익을 판단의 잣대로 삼는다"라는 뜻이다. 공자가 일찍이 설파했던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경계는 이제 고리타분한 옛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잃은 우리 시대를 비추는 가장 날카로운 거울이 되고 때로는 반면교사가 되어 나에게 곧장 돌아온다.


공자(孔子) 사상의 핵심 가치는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인(仁)과 이를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예(禮)를 중심으로 한 이상적인 덕치(德治) 윤리에 있다. 이 덕치 윤리의 실행 중심에는 의(義)가 있고 그 주체는 도덕적 인격체인 '군자(君子)'다. 군자(君子)는 학식과 인덕(仁德)을 갖추고 스스로에게 엄격하며 의리(義理)를 추구하는 이상적 인격자이다. 그 반대편에는 소인(小人)이 있다. 소인(小人)은 '도덕성 없이 사리사욕만 챙기고 남 탓을 하는 좁은 소견의 사람'을 뜻한다.


옛글에서 군자(君子)와 소인 (小人)을 가르는 핵심 특징은 나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군자 (君子)는 의(義), 즉 정의와 도리를 우선하고, 소인(小人)은 이익(利), 즉 개인적 이익을 우선시 한다. 자기수양의 측면에서 군자 (君子)는 '구저기(求諸己)', 즉 문제나 잘못에 대해 남 탓을 하지 않고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반면에 소인(小人)은 '구저인(求諸人)', 즉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대인관계의 측면에서 군자 (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화합하되 뇌화부동하지 않는다. 반면에 소인(小人)은 '동이불화(同而不和)' 즉 패거리를 짓되 진심으로 화합하지 못한다. 마음가짐에 있어서 군자 (君子)는 '탄탕탕(坦蕩蕩)', 즉 마음이 평온하고 편벽되거나 치우치지 않으며 넓다. 반면에 소인(小人)은 '장척척(長戚戚)', 즉 이해득실에 급급하여 노심초사 근심하며 늘 조바심을 가진다.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결정적인 잣대는 결국 '무엇을 바라보느냐'의 가치관에 있다. 군자는 의로움(義)을 쫓고 소인은 이익(利)을 쫓는다. 이 말은 단순히 돈을 좋아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과 연결된 존재로서의 책임을 자각하느냐, 아니면 오직 자신의 욕망과 편의만을 우주의 중심에 두느냐는 가치관의 차이다.


진정한 군자의 처세는 화이부동(和而不同)에 있다. 남과 화합하되 뇌화부동하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다름을 포용하는 그 넉넉함이 지금 우리에겐 절실하다. 파편화된 개인주의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적으로 규정하고, 공동체의 가치보다는 당장의 내 기분과 이익을 우선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소인은 자기 눈앞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삼기에 결국엔 고립되지만, 군자는 덕(德)을 더불어 나누고 베풀기에 반드시 이웃을 얻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도덕성이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내가 내뱉은 말이 타인의 마음에 닿을 때 어떤 무게를 가질지 고민하고 배려하고자 하는 그 작은 성찰에서 시작된다.


고전의 소인(小人)에 관한 통찰은 현대 과학적 용어로도 충분히 치환될 수 있다. 현대 심리학의 관점에서 소인의 부정적 특성은 나르시시즘, 마키아벨리즘, 사이코패시, 사디즘의 복합체인 '다크 테트라드(Dark Tetrad, 악한 성격을 이루는 4가지 구조)'와 유사하다. 그 중에서 특히 마키아벨리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조종하고 기만하는 태도로 '이익에 밝은' 소인배의 전형이다. 경제학 및 사회학의 관점에서 '기회주의'는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며 '자신의 이득'만 취하기에 급급한 소인배적 행태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위에서 현대판 소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현대판 소인은 지성인으로, 지위 혹은 명성으로, 남다른 재능으로, 뛰어난 외모 또는 세련된 매너로 매우 다양한 행태로 자신을 포장하기에 식별이 정말 어렵다. 하지만 평소에는 중도의 위치에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다음과 같은 대표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① 책임 소재의 방향 (남 탓 vs 내 탓)식별법: 프로젝트가 실패하거나 갈등이 생겼을 때 대화의 주어를 관찰한다. "운이 나빠서", "상황이 이래서", "그 사람이 협조 안 해서", " 저 인간때문에" 등 외부 환경과 타인을 비난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이는 책임 소재를 남탓으로 돌리는 고전의 '구저인(求諸人)'과 정확히 일치한다.


② 이익과 태도의 가변성 (강약약강)식별법: 경제적 또는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예: 서비스직, 후배, 하급자, 일용직, 아르바이트 등)을 대하는 태도를 본다. 자기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과도하게 친절하지만, 실익이 없다고 판단되면 무례해지거나 냉담해진다. 이들에게 인간 관계는 '진심'이 아닌 '도구'에 불과하다. 이익이 크면 클수록 평소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의 변신 또한 그에 비례한알다시피, 국가적 절체절명의 내란을 극복하고 밤잠을 설쳐가며 노심초사 일하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정의 정상화, 내란세력의 발본색원과 척결, 국격과 국력의 회복 그리고 사회개혁을 차근차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 있다. 이같은 국가적 행보는 작년부터 최근까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제정세에 대비해 보노라면 정말 아찔해진다. 정말 천운(天運)이 아닐 수 없다.


이와중에 국적은 물론 정신상태까지 의심되는 야당 정치인들은 말할 가치조차 없고, 범국가적 범국민적 염원을 도외시하고 딴맘을 품은 듯한 여당의 일부 정치인들과 그들에게 빌붙은 수박형 철새들이 종종 눈에 띈다. 마치 아지랭이 같은 미래 권력의 확보와 쟁취에 눈이 멀어 같은 진영을 니편내편으로 갈라치기에 급급한 인사들이 유튜브와 이른바 푸세식 언론기업들의 주요 메인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나는 비록 졸(拙)한 필부(匹夫)에 불과하지만, 다시 한번 진지하게 되새기게 되는 말이 있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익(利)에 밝다". 공자의 통찰이다. 이말의 의미는, "사리판단을 할 때 군자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른 행위나 의로움 즉, 의(義)를 기준으로 하고, 소인은 이익과 불이익을 판단의 잣대로 삼는다"라는 뜻이다. 공자가 일찍이 설파했던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경계는 이제 고리타분한 옛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잃은 우리 시대를 비추는 가장 날카로운 거울이 되고 때로는 반면교사가 되어 나에게 곧장 돌아온다.


공자(孔子) 사상의 핵심 가치는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인(仁)과 이를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예(禮)를 중심으로 한 이상적인 덕치(德治) 윤리에 있다. 이 덕치 윤리의 실행 중심에는 의(義)가 있고 그 주체는 도덕적 인격체인 '군자(君子)'다. 군자(君子)는 학식과 인덕(仁德)을 갖추고 스스로에게 엄격하며 의리(義理)를 추구하는 이상적 인격자이다. 그 반대편에는 소인(小人)이 있다. 소인(小人)은 '도덕성 없이 사리사욕만 챙기고 남 탓을 하는 좁은 소견의 사람'을 뜻한다.


옛글에서 군자(君子)와 소인 (小人)을 가르는 핵심 특징은 나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군자 (君子)는 의(義), 즉 정의와 도리를 우선하고, 소인(小人)은 이익(利), 즉 개인적 이익을 우선시 한다. 자기수양의 측면에서 군자 (君子)는 '구저기(求諸己)', 즉 문제나 잘못에 대해 남 탓을 하지 않고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반면에 소인(小人)은 '구저인(求諸人)', 즉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대인관계의 측면에서 군자 (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화합하되 뇌화부동하지 않는다. 반면에 소인(小人)은 '동이불화(同而不和)' 즉 패거리를 짓되 진심으로 화합하지 못한다. 마음가짐에 있어서 군자 (君子)는 '탄탕탕(坦蕩蕩)', 즉 마음이 평온하고 편벽되거나 치우치지 않으며 넓다. 반면에 소인(小人)은 '장척척(長戚戚)', 즉 이해득실에 급급하여 노심초사 근심하며 늘 조바심을 가진다.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결정적인 잣대는 결국 '무엇을 바라보느냐'의 가치관에 있다. 군자는 의로움(義)을 쫓고 소인은 이익(利)을 쫓는다. 이 말은 단순히 돈을 좋아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과 연결된 존재로서의 책임을 자각하느냐, 아니면 오직 자신의 욕망과 편의만을 우주의 중심에 두느냐는 가치관의 차이다.


진정한 군자의 처세는 화이부동(和而不同)에 있다. 남과 화합하되 뇌화부동하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다름을 포용하는 그 넉넉함이 지금 우리에겐 절실하다. 파편화된 개인주의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적으로 규정하고, 공동체의 가치보다는 당장의 내 기분과 이익을 우선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소인은 자기 눈앞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삼기에 결국엔 고립되지만, 군자는 덕(德)을 더불어 나누고 베풀기에 반드시 이웃을 얻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도덕성이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내가 내뱉은 말이 타인의 마음에 닿을 때 어떤 무게를 가질지 고민하고 배려하고자 하는 그 작은 성찰에서 시작된다.


고전의 소인(小人)에 관한 통찰은 현대 과학적 용어로도 충분히 치환될 수 있다. 현대 심리학의 관점에서 소인의 부정적 특성은 나르시시즘, 마키아벨리즘, 사이코패시, 사디즘의 복합체인 '다크 테트라드(Dark Tetrad, 악한 성격을 이루는 4가지 구조)'와 유사하다. 그 중에서 특히 마키아벨리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조종하고 기만하는 태도로 '이익에 밝은' 소인배의 전형이다. 경제학 및 사회학의 관점에서 '기회주의'는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며 '자신의 이득'만 취하기에 급급한 소인배적 행태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위에서 현대판 소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현대판 소인은 지성인으로, 지위 혹은 명성으로, 남다른 재능으로, 뛰어난 외모 또는 세련된 매너로 매우 다양한 행태로 자신을 포장하기에 식별이 정말 어렵다. 하지만 평소에는 군자와 소인의 중간 위치에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다음과 같은 대표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① 책임 소재의 방향 (남 탓 vs 내 탓)식별법: 프로젝트가 실패하거나 갈등이 생겼을 때 대화의 주어를 관찰한다. "운이 나빠서", "상황이 이래서", "그 사람이 협조 안 해서", " 저 인간때문에" 등 외부 환경과 타인을 비난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이는 책임 소재를 남탓으로 돌리는 고전의 '구저인(求諸人)'과 정확히 일치한다.


② 이익과 태도의 가변성 (강약약강)식별법: 경제적 또는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예: 서비스직, 후배, 하급자, 일용직, 아르바이트 등)을 대하는 태도를 본다. 자기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과도하게 친절하지만, 실익이 없다고 판단되면 무례해지거나 냉담해진다. 이들에게 인간 관계는 '진심'이 아닌 '도구'에 불과하다. 이익이 크면 클수록 평소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의 변신 속도와 폭 또한 그에 비례한다.


③ '뒷담화'와 '편 가르기' (화이부동의 부재)식별법: 조직 내에서 공적인 논의보다 사적인 은밀한 소통을 즐기는지 확인한다. 앞에서는 예스맨으로 면종복배하거나 동조하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뒷담화하며 다른 말을 하여 편을 길라 조직의 결속을 해친다. 건강한 비판(화이부동)이 아닌, 무조건적 내 편 만들기(동이불화)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려 한다.


논어 '옹야편'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날 공자가 어린 제자 자하를 앞에 두고 이렇게 가르친다. “너는 소인유(小人儒)가 되지 말고 군자유(君子儒)가 되어라” 하였다. 이는 공자가 자신의 재능을 국가를 위해 봉사하려는 공직자(儒)의 목표를 가진 자하에게, 공직자 집단의 정체성이나 지향성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군자와 소인에 대비해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유(儒)는 당시 제도화된 예법을 담당하는 전문적인 직능집단, 즉 공직자를 일컫는 말인데, 후일 유교의 학문을 배우고 수양하는 지성인, 즉 선비를 뜻하는 말로 변천하였다.


공자가 말하는 군자는 ' 바람직한 인간', '바람직한 공직자', ‘바람직한 지도자’의 상이다. 국가에 봉사하거나 남을 지도하고 이끄는 사람이라면 그에 합당한 지위와 능력을 갖춰야 한다. 아울러 공평무사하고 솔선수범하는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 공평무사(公平無私)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며, 사사로운 이익이나 감정을 배제하고 처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특히 이러한 인간적인 바람직한 특성이 하나라도 결여된 지도자는 대중들이 비록,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일시적인 권력에 굴종할지라도 진심으로 따르지 않을 게 뻔하다.


오늘날 정치판이든 사회생활이든 대인관계에서든 우리가 목격하는 윤리적 도덕적 파산의 이면에는, 타인의 고통을 단지 데이터나 정보, 또는 풍문으로만 소비하며 자신의 작은 불편함조차 참지 못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소인배적 근성이 깊게 뿌리 박혀 있다. 불법을 대수롭지 않게 저지르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면서,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온각 추잡한 일들을 다 하면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눈앞의 쓰레기조차 치우지도 않으면서, 비양심에 부끄럼조차 느끼지 못하는 진실로 정의롭지 못한 자가 내로남불식으로 세상의 정의와 절차와 분배의 공정을 논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때문에 편을 가르고 익명성 뒤에 숨어 타인의 인격을 난도질하면서도 그것이 권리인 양 착각하는 모습은 이 시대가 낳은 비극적인 소인(小人)의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군자의 잘못은 일식과 월식 같다. 잘못을 할 때는 모든 사람이 보게 되고, 잘못을 고치면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된다”(논어, 자장편)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맹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저지른 잘못도 스스로 인정하고 반성하고 후회한다면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셩현들은 이구동성으로 말씀한다. 그러나 후회하고 반성할 줄도 모르고 부끄러운 생각조차 지니지 않는다면 짐승의 수준으로 추락해버린다는 게 성현들의 한결같은 통찰이다. 왜곡된 가치관 그리고 무너진 도덕과 윤리의 제단을 다시 세우는 힘은 정교한 법령이나 시스템이 아니라, 올바른 것을 추구하는 인간 본연의 인간다운 마음과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염치에서 나온다. 이 지점이 바로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익(利)에 밝다"라는 공자의 통찰이 곧장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알량한 양심에 꽂히는 이유다.


옛글에 "겉모습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도 속은 짐승 같은 마음을 가진 자도 있다"라고 하였다(권호문, '축묘설', 송암집). 결국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다시금 스스로에게 '사람의 길'을 묻는 용기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오직 나만의 안락을 위한 소인의 길인지, 아니면 부족하나마 타인과 세상을 향해 곁을 내어주는 군자의 길인지 스스로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해야 할 타당한 이유는 많다. 가장 간단한 이유들 들자면, 어차피 누군가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엘리엇 애런슨·캐럴 태브리스, 'Mistakes Were Made(But not by me)', 2007)


지극히 개인적인 여담으로, 최근 유튜브와 소위 푸세식 재래식 언론기업들의 메인에 가십형 소재거리의 주역으로 자주 등장하는, 진보진영을 비롯한 여권 내부의 이른바 권력지향형 철새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과거 SBS의 역사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년)"에 나오는 세종대왕님역 한석규의 대사 중에 나오는 말이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2026.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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