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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원 Mar 06. 2022

익선동 인생 에일 맛집에서 제주도와 거제도의 대화.

이것은 맛집 에세이인가.

1. 제주도에서 올라온 친구를, 거제도에서 올라간 나와 타이밍이 맞아 서울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갔던 익선동은 뭔가 많이 달라졌다. 평일 고즈넉하게 나른한 낮맥을 하기 좋았다면 평일임에도 왜 이렇게 사람이 터져나갔던 거지, 눈치게임 실패. 하지만 맛집은 내 레이더를 피해 갈 수 없다.


2. 어딜 가나 웨이팅이라, 북적이는 곳에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던 친구와 나는 슬 세 바퀴쯤 돌았다. 배가 고파서 지쳐갔지만 아무 데나 들어가긴 싫었고 내 경험상 왠지 이렇게 다니다가 만나는 집이 진짜 맛집인 경우가 많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로원의 빅데이터.


3. 어느 골목에서 거의 동시에 양 쪽에 있던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고, 내가 조금 늦게 반대편 가게를 보여주자 "오 뭔가 있을 것 같다"며 이곳으로 픽해서 들어갔다. 보사노바였나 재즈였나 한 껏 이탈리아 느낌 물씬 나는 브금이 흘러나오는 'ㄷ'자 한옥집, 중간엔 작은 정원이 중심을 잡고 있는. 운치 좋은 집인데 분명, 


왜 손님이 하나도 없지? 조금 불안해졌다.

4. 그럼에도 우린 너무 오랜만에 만나 대화할 시간이 중요했고, 뭐 이 정도 분위기면 맛이야. 넘어갈 수 있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피자와 파스타를 고르고 맥주를 골랐는데... 아아. 여긴 인생 에일 맛집이었다.


이곳 시그니쳐 에일의 라임 맛, 그리고 무슨 과일 향 나는 에일을 시켰다. 가장 먼저 맥주부터 나왔는데 와 향부터 그냥 맥주 향이 아니라 과일향이 풍기더니 한 모금 마시구 탄성을 내질렀다. "과일 향 난다는 맥주에서 진짜 과일 맛 나는 건 처음이야!" 아니, 진짜 과일 맛에 살짝 단 맛도 느껴지는데 이것은 필시 과일을 섞은 게 분명할 거라고 토론하며 감격했다. 그도 그럴게 나는 심각한 술찔이라 맥주, 소주 각각을 잘 못 마신다. 일단 '맛'이 안 느껴져서. 맛이가 없어서 못 마신다. 물론 몸에서 잘 안 받는 것도 있지만..? 얼마 전 과일향 진한 인생 와인을 찾았는데, 아 이번엔 인생 맥주집을 찾았다. 난 서울에서 맥주 마시면 꼭 다시 여기로 올 거야. 나중에 이야기하다가 커피 안 시키고 처음 시켰던 시그니쳐 에일 라임맛에 이어 자몽맛도 궁금해서 일부러 자몽으로 시켜 다시 마셨다. 그리고 다른 친구한테 나 맥주를 두 잔이나 다 마셨다니까 거기 어딘지 당장 알려달라고 한.

5. 그래, 맥주가 이만큼 맛있으니 피자쯤이야 평타여도 괜찮아 라는 관대한 마음은 그다음 우리 눈이 튀어나오게 만들었지. 바질 페스토 피자. 바질 베이스는 뭐든 맛이 없을 수 없다. 근데 여기 화덕으로 굽나 봐.. 치즈도, 도우도 몰랑한 게 내 취향이었는 데다 올려진 루꼴라까지 완벽했다.

사실 조금 아쉬웠던 건 크림 파스타인데, 피자가 당연히 토마토 베이스일 테니 크림을 시키자 했던 거라 밸런스는 안 맞겠구만 싶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나온 파스타 색이 좀 빨게.. 분명 우리가 시켰던 건 까르보나라였는데? 잘못 나왔나 싶었는데 먹어보니 살짝 매콤한 까르보나라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 원래 매운 까르보나라라고.. 감격쓰.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통 베이컨을 쓰는 집이라는 거. 이 집 합격. 뭘 좀 아는 집이야.


근데 이렇게 배운 집인데 왜 사람이 아무도 없어? 우린 그 익선동에서 전세내고 몇 시간을 있었다. 그것도 연휴 전에. 그도 그럴 것이 메뉴가 어쩐지 술안주 느낌이라 왜 낮에 사람이 없었는지 이해를 했는데, 아니 뭐야. 그건 페이크였어.. 사람들 여기 진짜 맛집이에요!! 싶다가도 아냐 그냥 나만 알고 싶다.

6. 한 참 먹다가 대화를 하는데, 진짜 몇 년 치 이야기를 하니까 너무 웃기고 재밌었고. 우린 대학생 때 대외활동을 아주 찐하게 빡세게 함께했었다. 우리 팀 단체로 스벅 다이어리 같은 걸로 맞추겠다고 프리퀀시로 주는 한정판 블랙 다이어리를 제주도에서 공수하질 않았나. 대형 규모의 공연도 돌리고. 공항에서 밤새고 참, 그랬는데. 지금은 어엿한 업을 가진 작가인 게 신기하다. 이 친구는 제주에서 나는 거제에서 둘 다 전시를 준비 중이라 그 얘기를 했다가, NFT도 잠깐 나왔고 그 외 어떤 고찰들, 다른 시각에서의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운 좋게 발견한 맛집에서 조용하게 영감 있는 대화를 한 건 분명 행운이야. 그러고 보니 내가 갖고 있는 단 하나의 카메라가 이 친구의 첫 카메라다. 팬케이크 단렌즈를 주로 사용하는 캐논650D. 이걸로 내 제품 사진 대부분을 찍었는데 그게 친구가 학교 장학금으로 산 첫 카메라였던 건 처음 알았다. 감회가 새로운 걸. 그러고 보니 페이스북은 7년 전 이 날 행사에서 함께 했던 사진을 알려준다. 오래된 친구는 늘 그렇게 한결같은가 보다.


7.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은 없었는데, 누가 사진 작가 아니랄까봐 사진을 또 이렇게 감성적으로 찍어줬어. 그리고 이 날의 느낌들을 기록하다 보니 이건 무슨 맛집 추천인지, 단상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여기 에일당 덕분에 친구랑 너무 잘 만났으니, 이 글을 보는 분들은 꼭 익선동에서 약속을 만든다면 에일당을 꼭 가보시길 추천드리며 이만 마무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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