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맛집 에세이인가.
1. 제주도에서 올라온 친구를, 거제도에서 올라간 나와 타이밍이 맞아 서울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갔던 익선동은 뭔가 많이 달라졌다. 평일 고즈넉하게 나른한 낮맥을 하기 좋았다면 평일임에도 왜 이렇게 사람이 터져나갔던 거지, 눈치게임 실패. 하지만 맛집은 내 레이더를 피해 갈 수 없다.
2. 어딜 가나 웨이팅이라, 북적이는 곳에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던 친구와 나는 슬 세 바퀴쯤 돌았다. 배가 고파서 지쳐갔지만 아무 데나 들어가긴 싫었고 내 경험상 왠지 이렇게 다니다가 만나는 집이 진짜 맛집인 경우가 많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로원의 빅데이터.
3. 어느 골목에서 거의 동시에 양 쪽에 있던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고, 내가 조금 늦게 반대편 가게를 보여주자 "오 뭔가 있을 것 같다"며 이곳으로 픽해서 들어갔다. 보사노바였나 재즈였나 한 껏 이탈리아 느낌 물씬 나는 브금이 흘러나오는 'ㄷ'자 한옥집, 중간엔 작은 정원이 중심을 잡고 있는. 운치 좋은 집인데 분명,
왜 손님이 하나도 없지? 조금 불안해졌다.
4. 그럼에도 우린 너무 오랜만에 만나 대화할 시간이 중요했고, 뭐 이 정도 분위기면 맛이야. 넘어갈 수 있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피자와 파스타를 고르고 맥주를 골랐는데... 아아. 여긴 인생 에일 맛집이었다.
이곳 시그니쳐 에일의 라임 맛, 그리고 무슨 과일 향 나는 에일을 시켰다. 가장 먼저 맥주부터 나왔는데 와 향부터 그냥 맥주 향이 아니라 과일향이 풍기더니 한 모금 마시구 탄성을 내질렀다. "과일 향 난다는 맥주에서 진짜 과일 맛 나는 건 처음이야!" 아니, 진짜 과일 맛에 살짝 단 맛도 느껴지는데 이것은 필시 과일을 섞은 게 분명할 거라고 토론하며 감격했다. 그도 그럴게 나는 심각한 술찔이라 맥주, 소주 각각을 잘 못 마신다. 일단 '맛'이 안 느껴져서. 맛이가 없어서 못 마신다. 물론 몸에서 잘 안 받는 것도 있지만..? 얼마 전 과일향 진한 인생 와인을 찾았는데, 아 이번엔 인생 맥주집을 찾았다. 난 서울에서 맥주 마시면 꼭 다시 여기로 올 거야. 나중에 이야기하다가 커피 안 시키고 처음 시켰던 시그니쳐 에일 라임맛에 이어 자몽맛도 궁금해서 일부러 자몽으로 시켜 다시 마셨다. 그리고 다른 친구한테 나 맥주를 두 잔이나 다 마셨다니까 거기 어딘지 당장 알려달라고 한.
5. 그래, 맥주가 이만큼 맛있으니 피자쯤이야 평타여도 괜찮아 라는 관대한 마음은 그다음 우리 눈이 튀어나오게 만들었지. 바질 페스토 피자. 바질 베이스는 뭐든 맛이 없을 수 없다. 근데 여기 화덕으로 굽나 봐.. 치즈도, 도우도 몰랑한 게 내 취향이었는 데다 올려진 루꼴라까지 완벽했다.
사실 조금 아쉬웠던 건 크림 파스타인데, 피자가 당연히 토마토 베이스일 테니 크림을 시키자 했던 거라 밸런스는 안 맞겠구만 싶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나온 파스타 색이 좀 빨게.. 분명 우리가 시켰던 건 까르보나라였는데? 잘못 나왔나 싶었는데 먹어보니 살짝 매콤한 까르보나라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 원래 매운 까르보나라라고.. 감격쓰.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통 베이컨을 쓰는 집이라는 거. 이 집 합격. 뭘 좀 아는 집이야.
근데 이렇게 배운 집인데 왜 사람이 아무도 없어? 우린 그 익선동에서 전세내고 몇 시간을 있었다. 그것도 연휴 전에. 그도 그럴 것이 메뉴가 어쩐지 술안주 느낌이라 왜 낮에 사람이 없었는지 이해를 했는데, 아니 뭐야. 그건 페이크였어.. 사람들 여기 진짜 맛집이에요!! 싶다가도 아냐 그냥 나만 알고 싶다.
6. 한 참 먹다가 대화를 하는데, 진짜 몇 년 치 이야기를 하니까 너무 웃기고 재밌었고. 우린 대학생 때 대외활동을 아주 찐하게 빡세게 함께했었다. 우리 팀 단체로 스벅 다이어리 같은 걸로 맞추겠다고 프리퀀시로 주는 한정판 블랙 다이어리를 제주도에서 공수하질 않았나. 대형 규모의 공연도 돌리고. 공항에서 밤새고 참, 그랬는데. 지금은 어엿한 업을 가진 작가인 게 신기하다. 이 친구는 제주에서 나는 거제에서 둘 다 전시를 준비 중이라 그 얘기를 했다가, NFT도 잠깐 나왔고 그 외 어떤 고찰들, 다른 시각에서의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운 좋게 발견한 맛집에서 조용하게 영감 있는 대화를 한 건 분명 행운이야. 그러고 보니 내가 갖고 있는 단 하나의 카메라가 이 친구의 첫 카메라다. 팬케이크 단렌즈를 주로 사용하는 캐논650D. 이걸로 내 제품 사진 대부분을 찍었는데 그게 친구가 학교 장학금으로 산 첫 카메라였던 건 처음 알았다. 감회가 새로운 걸. 그러고 보니 페이스북은 7년 전 이 날 행사에서 함께 했던 사진을 알려준다. 오래된 친구는 늘 그렇게 한결같은가 보다.
7.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은 없었는데, 누가 사진 작가 아니랄까봐 사진을 또 이렇게 감성적으로 찍어줬어. 그리고 이 날의 느낌들을 기록하다 보니 이건 무슨 맛집 추천인지, 단상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여기 에일당 덕분에 친구랑 너무 잘 만났으니, 이 글을 보는 분들은 꼭 익선동에서 약속을 만든다면 에일당을 꼭 가보시길 추천드리며 이만 마무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