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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원 Apr 15. 2022

빛나는 누군가는 곧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언젠가 누군가와 '부러움' 대해 대화를 나눴었다.  대체로 '멋지다'라고 느끼는 편이지 부러워한 적은 별로 없다고. 그건 모든 빛나는 것들의 이유를 알기 때문일 거다.


그는 내게 '멋지다'라는 느낌이 곧 '부럽다'라는 감정이라고 설명했지만, 그 말을 듣고 찾아본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부럽다는 '남이 가진 것을 갖기를 바란다'는 마음이다. 갖기를 바란다는 그 점이 부러운 것과 멋지다 느끼는 것의 가장 큰 차이다. 둘은 분명 다르다.


또한 순수하게 갖고 싶어 하는 것과 '남이 가진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그 이면에는 나는 그것을 원해도 갖지 못할 거야 라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 모든 빛나는 것들은 그마만큼의 깊은 어둠이 있으니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이원적이라 한쪽으로만 치우칠 수가 없다. 무조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빛만 있을 수도 어둡기만 할 수도 없는 이치다. 해가 뜨고 달이 지듯 자연만 보아도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을 배울 수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크나큰 위안이 된다. 아 이거 곧 지나가는구나. 지나갈 수 있구나.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빛이 난다는 건 그 발함만큼의 터널의 지났다는 뜻일 거다. 죽을 만큼 아팠을 거고, 고민하고 그럼에도 용기를 내었을 거다. 그러니 그런 누군가를 보면 자연히 멋지다고 생각하는 거다. 순수한 감탄. 그걸 부러워하는 건 그의 반대 측면도 갖고 싶다는 말인데 과연 그럴 각오가 되어있는가, 질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짐조차 이미 무겁지 않은가.


그러니 남의 빛남은 어쩌면 나 역시 빛난다는 증거일 수 있겠다. 내 슬픔과 아픔만큼 말이다. 바닥까지 내려간 그 깊이만큼 올라가는 법이다. 나라는 존재를 정의하는 내 마음이 그걸 인지한다면, 하늘과 바닥은 뒤집어질 거다. 그리곤 사실 그 깊이만큼 하늘에서 날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수평선을 보면 바다와 하늘이 헷갈리듯 말이다.


[사진: 거제한달살기中 통영-달아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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