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년, 혹은 2300년에도 살아갈 그대들에게
프롤로그 : 2026년, 지구에서 보내는 편지 https://brunch.co.kr/@roykang2/130
그대들은 어떻게 지구온난화를 극복해 냈는가?
혹은 극복하지 못한 채 그저 망가진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가?
아니면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 정착했는가?
세 번째 물음은 아무리 미래 세대인 그대들에게도 너무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부디 용서해 주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인 SF물에서는 그런 소재가 자주 쓰이기 때문에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앤디 위어의 <프로젝트 헤일메리>와 에드워드 에슈턴의 <미키 7> 같은 소설에서도 그렇고, 영화로는 우리 시대의 가장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AVATAR)>(지구가 망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와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에서 모두 지구를 떠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찌 상상하지 않을 수 있는가? (질문, 그대들은 여전히 영화를 보는가?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점점 영화에 흥미를 잃어가는 듯하다)
부디 지구가 살기 힘들어서 떠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우나 고우나 이 땅에서 자고 나란 사람으로서 나는 이 지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도, 지구가 없어진다는 상상을 하면 마음이 시려온다. 혹여나 불가피하게 지구를 떠났을지도 모를 그대들을 위해 짤막하게 내가 경험한 사계절에 대해 묘사해 보겠다(부디 이 글이 그대들에게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지구에서 특히 내가 나고 자란 한반도의 땅은 4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렷했다. 얼마나 뚜렷했냐면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옷장에 겨울에 영하 20도에서 버틸 수 있는 패딩(거위털, 오리털로 속을 채운 재킷 )과 영상 37도가 웃도는 여름에 입을 티 쪼가리들이 모두 갖고 있어야 했다. 1년에 우리 세대들의 몸은 연교차 50도가 넘어가는 세상에서 버티고 살고 있으며 이 격차는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화성은 하루에도 100도가 왔다 갔다 한다고 하지만 지구에서 나고 자란 인간으로서 맨 몸으로 연교차 50도를 버티는 일은 꽤나 터프한 일이다.
역시 봄 하면 분홍 물결의 벚꽃이 머릿 속을 수놓는다. 벚꽃을 주제로 한 노래도 매년 나오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벚꽃 노래는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이다. 나온 지 10년이 더 넘었지만 여전히 봄만 되면 거리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지금 바로 검색을 하든, AI를 시켜서든 이 노래를 한 번 들어봐라.
몰랐던 그대와 단 둘이 손잡고
알 수 없는 이 떨림과 둘이 걸어요.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봄은 '설렘'이다. 겨울의 춥고 쓸쓸한 황량함을 지나 피어오르는 새싹처럼 다시 새로운 시작을 꿈꾸게 하는 계절. 높은 곳에서 벚나무가 무리 지어 있는 곳을 바라보면 지구의 한 귀퉁이가 신에게 축복받은 땅인 양 아름다운 분홍 바다가 휘몰아친다. 흐드러지게 핀 분홍색 벚나무 아래에서는 아무리 냉혈한 같은 사람이라도 잠시 나무를 쳐다보게 된다. 물론 모든 이의 마음속에 사랑과 평화가 깃드는 것은 아니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공유할 이 없이 혼자서만 봐야 된다는 서러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쓸쓸함이 커지는 아이러니다. 벚꽃이 피는 시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상황과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벚꽃은 그만큼 설렘을 가져오는 아름다운 청춘의 시기이다.
여름 하면 동남아시아의 에메랄드 빛 투명한 바다가 떠오른다. 나는 28살에 처음 코타키나발루의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고 넋을 잃고 말았다. 어렸을 적 사진으로만 보던 투명한 바다에 직접 발을 담가보니 그제야 실감이 낫다. 파라다이스가 실존했다. 이런 세계가 존재한 줄 알았더라면 진작 수영을 배워둘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수영만 할 줄 알았더라면 물결치는 에메랄드 빛 바다와 물아일체가 되어 이 바다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물과 친하지 않았던 나는 아쉬운 마음에 허리 높이의 물까지 들어가 손을 휘휘 저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동화된 한편 씁쓸한 아쉬움을 품은 채 새벽 비행기에 몸을 실어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데이터를 켜 수영 강습을 신청했다. 그동안 수영 강습을 받지 않았던 이유는 수도 없이 댈 수 있었다. 나이 28살에 성인 남자가 기초반에서 물장구를 배우는 게 쪽팔렸고, 회사에 다니느라 시간이 안 났고, 집 바로 앞에 수영장도 없었고, 수영장에서 웃통을 까기에 볼 품 없는 몸매고, 수영 좀 못해도 인생에 크게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코타키나 발루에서의 기억은 이런 비겁한 목소리에 단호히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묵살해 버렸다.
"닥쳐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영을 해야 되겠으니까."
막상 수영장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킥판 잡고 발차기를 하고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았다. 28살이 뭐가 얼마나 늙었다고 기초반에서 수업받을지 말지 고민하던 나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그러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시간을 수영장에서 보내고 있다. 처음에는 물 위에 몸만 뜨고, 호흡만 트이면 좋겠다 싶었는데 지금은 접영, 배영, 평영, 자유형을 얼추 할 줄 안다(아무래도 아직 폼이 엉성하다). 수영을 배우고 나서는 여름에 산골짜기 계곡을 가든, 럭셔리한 호텔 수영장을 가든, 워터파크를 가든 물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신비와 즐거움의 원천이다. 언젠가 나에게 수영을 배워보라 속삭여준 에메랄드 빛 대자연을 다시 찾고 싶다. 그때는 아마 나와 닮은 무릎 높이의 아이가 딸려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본성과 가장 잘 맞는 계절은 역시 가을이다. 타고나길 끼를 뽐내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타입의 사람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평안과 안녕을 떠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미소를 타고나지도 못했다(나의 미소는 내가 봐도 조금 어색하다). 그런 면에서 정열적인 에너지가 한풀 꺾여 정제된 에너지가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가을은 나와 가장 잘 맞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이 점점 짧아지고 있기에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가을은 품위가 있다. 자연은 슬슬 끝이 다가 옮을 느끼고 옷을 갈아입는다. 빨간 단풍들이 산을 뒤덮고, 옛 고궁들은 단풍과 어울리며 고풍스러운 멋을 자랑한다. 가을에는 고궁으로 가야 한다. 서울의 종로도 좋고, 일본의 교토도 좋다. 가을의 해 질 녘은 유난히도 붉다. 산도 붉고 하늘도 붉다. 그 가운데 서 있는 인간들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대한 자연의 순환을 느끼며 어떤 이는 주머니 속 카메라를 들어 하늘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하지만 이내 '카메라가 실물을 못 담는다'며 다시 서쪽 너머로 시선을 돌리곤 한다.
붉은 기운은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타고 있는 장작의 불꽃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는 심정과 비슷하다. 빨갛게 물든 세상은 그간 내가 잘 살아왔는지, 그대가 지금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인지 묻는다. 생각에 빠져 곰곰이 답을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지평선 아래로 넘어가있다. 순식간에 깜깜해진 어둠에 생각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고개를 한 번 털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긴다. 말없이 터벅터벅 내려오는 내 모습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 가을날 교토의 청수사에 오른다면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그대들을 생각한 나를 한 번 떠올려 주길.
하늘에서 휘날리는 하얀 눈은 세상을 한껏 단순하게 만든다. 피로한 네온사인과 형형색색의 간판들과 어딘가 기분 나쁜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에 가만히 앉아 세상을 하얗게 덮어준다. 새하얀 눈을 좋아하는 것은 아마 동물적 본능인 거 같다. 따로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어린아이들은 눈으로 달려가 코가 빨개질 때까지 뛰어논다. 털이 복슬복슬 난 강아지들도 눈 밭에 온몸을 비비며 신나 한다.
아직 어린아이 티를 완전히 벗어내지 못한 20대 초반의 군인들은 보급로 확보를 위해 눈을 치워야 하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린 쓰레기'라며 욕하지만, 내심 전우들과 눈을 치우는 게 그다지 싫지만은 않다. 깨끗하게 뚫린 보급로를 보다 보면 내심 뿌듯한 마음도 든다. 살육이 전제되는 전쟁을 위해 모인 집단에서 꽁꽁 언 손으로 눈을 굴리고 옆 소대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들이 살육 기계가 아닌 마음속에 순수함이 남아 있는 아직 어린애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겨울에만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인 스키는 꽤나 원초적인 즐거움을 준다. 폴대와 긴 널빤지에만 의존해 경사진 눈 위를 자유롭게 미끄러지며 속도를 마음껏 즐긴다. 어떤 모터도 달려 있지 않고도 오로지 중력과 인간의 감각에 의존해 스피드를 즐길 수 있는 스포츠는 그리 많지 않다.
그대들은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하얀 눈밭 위에서 스키를 타본 적 있는가? 하얀 도화지 위에 처음 선을 긋듯 아무것도 눈에 걸리는 게 없는 하얀 눈 밭 위에 오로지 내가 지나 온 자리만이 곧 길이 되는 쾌감 역시 DNA에 새겨진 것이리라. 콜럼버스가 처음 산살바도르 섬에 처음 발을 딛고,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처음 발을 내디딘 순간에 비할 데는 못하겠지만 미지의 땅에 처음 발을 딛는 그 순간은 인류 누구에게나 설레는 일이리라.
유감스럽게도 아름다운 지구가 파괴되고 있다. 내가 경험한 순수한 자연을 그대들도 경험할 수 있을까?
봄에는 아름다운 분홍 물결이 점점 탁해지고 있다. 미세먼지 때문이다. 아름다운 벚꽃 아래 마스크를 쓰고 사진을 찍고 있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이 다소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름은 점점 못 견딜 만큼 더워지고, 가장 살기 쾌적한 가을은 짧아지고 있다. 겨울은 너무 춥거나 춥지 않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지구온난화에 대해 배우면서 지구가 뜨거워질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예견된 비극은 겨울을 더 혹독하게 만들기도 했다(그대들은 추위를 어떻게 극복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아직 밖에서는 따뜻한 옷을 껴입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지구가 따뜻해지다 보니 시베리아의 얼음이 녹게 되고, 그렇게 생겨난 찬 기운이 한반도로 날아온다고 한다. 올해에는 러시아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 아파트 높이까지 눈이 쌓였다고도 하는데, 뭔가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시베리아의 얼음이 다 녹고 나면 그때부턴 더 이상 겨울이 춥지 않게 될 것인가?
2015년에 있었던 파리기후협약에서는 산업화 이전의 지구 평균 기온 보다 1.5°C 이상 오르면 지구의 생태계가 붕괴되고, 폭염·가뭄·홍수의 빈도와 강도 급상승하며, 해수면이 상승하고, 식량·물·에너지 시스템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고 발표했다. 1.5°C가 마지노선이고, 2°C 이상 오르면 정말 지구의 파멸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윗세대와 우리 세대에서 이미 1.3°C 정도 올려놨는데, 그대들에게 0.2°C 안에 틀어막고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하기엔 너무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
주변 사정만 봐도 딱히 지금보다 나아질 거 같지는 않다. 나름 일상생활에서 플라스틱 이용을 최소화하고,
매연을 배출하는 차도 없지만(이건 아직 나의 능력 부족이기 때문이리라), 탄소 배출에 일조하는 축산물을 자주 먹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겨울에는 난방을 열심히 떼고 있다. 줄여야 되긴 하지만... 이미 지구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만약 그대들이 이 지구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면 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내가 아이를 낳기로 마음먹는다면 아마 그대들은 지구의 환경 파괴 존립 위기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미 망가진 지구 위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가? 그저 뛰어난 천재들과 발전된 미래 세대의 기술력에만 의존한 채 망가진 지구 위에 애를 낳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일 아닐까? 이기적인 나의 선택으로 인해 30년 뒤 혹은 300년 뒤의 그대들을 고통에 빠트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내가 이기적 유전자에 대항하며 번식을 고민한 첫 번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