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1일
이 날은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4.16, 미국의 9.11 만큼이나 잊지 못할 날이다.
동일본 대지진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곳곳을 폐허로 만들어 놨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에 구호 물품을 보내며 함께 애도 했던 기억이 난다.
참사가 유달리 가슴 아픈 이유는 유명을 달리 한 무고한 사람들의 억울함 뿐만 아니라
슬픔을 안고 계속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유가족들의 고된 아픔에 공감하기 때문이리라.
스즈메는 동일본 대지진 유가족이다.
혼자서 딸을 키우며 간호사로 일하던 스즈메의 어머니는 대지진으로 인해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홀로 남은 조카의 보호자로 자처한 것은 이모였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23년,
스즈메는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다.
이모는 마흔 살이 되었고,
아름다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다.
스즈메는 이모가 싸 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향한다.
'다녀오겠습니다'
스즈메는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선다.
매일 같이 지나던 내리막에서 잘생긴 낯선 남자를 만나게 된다.
평소였으면 중력에 기댄 채 바람을 가르며 쌩 지나갔겠지만,
스즈메는 이 낯선 남자가 궁금하다.
브레이크를 잡고 사람의 걸음걸이와 비슷한 속도로 낮추어 천천히 이 남자를 향해 내려간다.
이때 낯선 남자가 스즈메에게 말을 건다.
"이 근처에 폐허 없니? 문을 찾고 있어"
이 남자, 목소리도 멋있다.
얼굴이 붉어진 스즈메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짧게 사실만을 전달한 뒤 유유히 자전거를 끌고 내려왔다.
횡단보도에 멈춰 방금 전 상황을 곱씹어 보던 스즈메는,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그 가파른 언덕을 향해 페달을 밟는다.
스즈메는 그 남자에게 어떤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
폐허에 도착해 낯선 남자를 찾던 스즈메는
다 무너진 온천 한가운데에 서 있는 문을 발견한다.
그 문을 열지 말아야 했는데...
기어코 문을 연 스즈메에게 일상의 항상성을 깨부술 믿기지 않을 일들이 펼쳐지게 된다.
스즈메는 문을 막고 있는 요석(妖石)을 풀어주는 사고를 치고 만다.
이로 인해 '미미즈'라는 거대한 힘이 문을 통해 빠져나와 스즈메가 살고 있는 지역에 지진을 일으키게 된다. 더 큰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문을 닫아야만 한다.
사고 친 스즈메 대신 '토지시(閉じ師, 문을 닫는 이 라는 뜻)'인 잘생긴 남자 소타가 온몸을 날려 문을 막는다.
자신이 친 사고의 뒷 수습을 하다 찰과상을 입은 소타를 위해 스즈메는 방에서 붕대를 감아 준다.
이때 요석(妖石)이었던 '다이진' 고양이가 찾아와 스즈메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한 편,
옆에 있던 소타에게 저주를 걸어 주변에 있던 세 발 달린 의자에 영혼을 가둔다.
엮여도 제대로 엮여버린 스즈메와 소타.
지금부터 소타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그리고 요석이 뽑혀 곳곳에 헐거워진 문을 닫기 위해
의자가 된 소타와 스즈메의 여정이 시작된다.
나는 여기서 '문단속'이 무얼 뜻하는지, 왜 '고양이'가 요석으로 표현되는지는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이는 앞으로 영화를 보게 될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재미 요소를 빼앗아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실제로 영화에 대한 배경을 아예 모른 채로 영화를 관람했다.
그래서 더 재밌게 볼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저 장면은 무엇을 의도했을까 고민하며 보는 행위가 즐거웠다.
공교롭게도 내가 영화를 본 날짜도 3월 11일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12년 전 오늘,
일본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고 '다녀오겠다'며 집 밖을 나선 이들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노래가 나올 때,
소타가 왼 마지막 주문을 곱씹어 보았다.
'삶이 헛된 것을 알지만. 죽음이 늘 가까이 있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라도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인간적인 희망을 신에게 기도한다.
스즈메는 영화 속에서 처음에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외치다가
나중에는 더 살고 싶다고 마음이 변하게 된다.
더 살고 싶고 계속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역시 희망이라고 신카이 마코토는 이야기한다.
삶의 힘든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억울하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 발 없이 뛰는 것이 익숙해진 의자(소타) 처럼
점차 우리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응해간다.
스즈메에게 엄마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지만,
그녀를 사랑해 주는 이모와 친구들, 소타가 생겼다.
스즈메와 소타는 현재 살아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더 살고 싶어졌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통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슬픔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적이고 담담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도 살아보자.
인생이 덧없게 느껴지더라도
죽음이 늘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오래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