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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착서점 Oct 31. 2023

팔자 사나운 마케터의 이직 이야기 2


그렇게 퇴사를 했다.

따사로운 5월이었다.


퇴사를 하고 한 달 동안 마음 놓고 놀았다. 


예정되어 있던 동남아 여행도 다녀오고, 부산도 다녀왔다.

이곳저곳 오가는 중에 무라카미 하루키 1Q84 전권(3권)을 모두 읽었다.


다 놀았다. 이제 다시 일 하자.


내가 최우선적으로 알아본 회사는 또다시 '광고 대행사'였다.

직전 회사에서 업무량이 미친 듯이 많긴 했지만, 그 사이 나름 배운 것도 많고 흥미도 느꼈다. 물론 당장 일하기에 입사 문턱이 낮았던 요인도 한 몫했다. '마케터'라는 직군을 간절히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거 말고 딱히 지금부터 내가 준비해서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직전 회사 타 팀의 인턴들 정도면 할만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다시 마케터 코스를 밟기 위해 대행사에 스무 곳 이상 지원했고, 그중 10개 정도 회사에서 면접을 진행해 대부분 붙었다. 확실히 대행사 경험이 있다 보니 대행사에서 원하는 인재상을 잘 알 수 있어서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물론 직전 대행사 인턴 경험은 숨겼다).


일단 많이 붙여 놓으니 선택의 풀이 넓었다. 이번엔 내가 골라갈 수 있었다. 회사를 고르기에 앞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로, 업무 강도가 적당해야 한다. 좋은 건 바라지 않는다. 제발 적당히만 되어도 좋을 거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또 맨날 새벽에 집에 들어갈 순 없지 않은가.


둘째로, 회사의 포트폴리오를 봤다. 내가 맡고 싶은 브랜드가 있는지, 적어도 절대 하기 싫은 브랜드가 있진 않은지 살펴보았다.


셋째로, '블라인드' 앱 평점을 살펴봤다. 기본적으로 업무 강도가 높아 대부분의 대행사가 블라인드 평점이 좋진 않았지만, 보다 보면 걔 중에 더 극악의 업무 강도를 자랑하는 곳을 거를 수 있었다. 한 대행사는 포트폴리오도 너무 좋고, 집과도 가깝고, 성장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해 가고 싶었지만, 블라인드에 검색해 보니 죄다 욕밖에 없었다. 야근은 당연하고 주말 출근도 자주 하는 곳이었다. 요즘도 가끔 그 회사 앞을 지나가는 일이 생겨서 보다 보면 밤이고 주말이고 항상 불이 켜져 있었다. 일단 한글날에도 불이 켜져 있었던걸 보면, 안 가길 정말 잘했단 생각이 든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서 한 대행사에 입사했다(나는 최대한 많은 곳을 면접을 보러 다녔고 일정 사이에 합격한 곳은 예비군 핑계를 대며 입사를 최대한 미뤘다). 규모도 꽤 되고, 포트폴리오도 나쁘지 않으며, 복지도 대행사치고 꽤 괜찮았다. 다니면서 많이 배우고, 일주일에 두 번 수영을 할 정도의 워라밸은 챙길 수 있을 거 같았다.


초반엔 꽤 만족하면서 다녔다. 인턴에겐 야근 안 시킨다는 당연한 철칙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놀라웠다. 


'그렇지, 이게 맞지. 아주 잘 옮겼어.'


나는 입사하자마자 한 브랜드를 통째로 맡게 됐다. 사수가 퇴사하면서 나에게 모든 걸 인수인계 해주고 떠나는 일정이었다. 회사에서 3년 정도 맡은 브랜드고 한 달에 콘텐츠 발행 개수도 8개 정도로 무난했다. 나도 나름 만족하면서 관련 업종에 대해 공부하고, 열심히 물어가며 인수인계를 받았다. 


그런데 돌연 두 달 차가 되는 날,

나는 다시 대행사를 그만두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당시 심리학 서적을 읽고 있던 나는 그 책에 나오는 내용들을 실전에 적용하며 나보다 10살 더 많은 여자 팀장이 나에게 믿음과 신뢰를 보이게 만들었다. 자기 방어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회사 내에서도 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나는 팀장에게 당신은 유능한 팀장이고, 주변에서 당신에게 왈가왈부하는 것에 크게 여의치 말라는 응원과 함께 팀장을 내 편으로 만들었다. 그 팀장은 내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친밀감과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이번 회사 생활이 이렇게 무난하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안정감 있는 회사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나를 믿고 의지하던 팀장은 자신이 유능한 팀장임을 보이고, 자기 사람으로 키우기 위한 목적이었는지 나에게 무리한 피드백을 주곤 했다. 처음에는 네네 하며 잘 숙이고 들어갔지만, 말 잘듣고 따르는 모습이 신났는지 점점 그 강도가 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번은 나도 굽히지 않고 내 할말을 한 적이 있다. 해당 브랜드의 2만원 정도 가량의 제품이 남성에게 만 팔렸는데(총 4개 정도 팔렸나?), 팀장은 왜 남성에게 더 많이 팔렸는지 아느냐 물었다. 사실 뻔했다. 애초에 그 브랜드의 톤 앤 매너가 단조롭고, 그냥 상식적으로 봐도 여자들은 안 살 거 같았다. 그래도 그렇게 답할 순 없으니 나름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설명하며 에둘러 얘기하는 동시에, 성별과 관련된 민감한 문제는 최대한 배제하고 얘기하려 했다(애초에 남성 타겟에 집중하는게 정답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계속 다시 생각해 봐라, 틀렸다며 30분 이상을 이 문제로 물고 늘어졌다. 나도 그냥 적당히 숙이고 들어갔으면 됐을 텐데, 이런 일이 끊임없이 계속 생기고, 말 같지도 않은 피드백에 굽히고 싶지 않아서 나도 계속 팀장의 논리를 꼬집으며 맞받아 쳤다. 그러다 결국 팀장이 한 말은, '원래 이 상품은 남자들에게 더 많이 팔려요. 아직까지 남자들이 경제력이 더 높으니까요' 같은 되지도 않는 소리를 했다.

 

'이 무슨... 이게 결론이라고? 여자들은 구매력이 없다고? 이게 2023년에 나올 수 있는 피드백인가?'


나는 '아... 네...' 하고 그냥 자리에 돌아왔다. 능력은 그 정도가 안되나 신입사원에게 자신의 유능함을 보이고 싶었던 팀장의 열의는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자신의 속마음까지 털어놓고, 장난(무리하고 재미없는)을 치는 호의적인 내가 자신의 말에 불복종하고 대들었단 사실은 더더욱 삐뚤어지게 만들었다. 


팀장의 역린을 건드리고 난 이후, 나의 회사 생활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나를 계속해서 쪼아댔다. 외부 촬영에 나가서도 구석에 토라져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손님들과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열심히 털어댔다. 촬영팀에서도 어리둥절할 정도로 무모한 논리를 만들어내어 어떻게든 털 것을 만들어냈다. 누가 봐도 정당한 피드백으로 볼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내가 팀장의 어떤 버튼을 눌러버린 것이다. 애초에 내편으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위험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데에 따라오는 부작용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특히 방어기제가 강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조심해야했다).나는 점점 지쳐갔다. 팀장은 과거에도 일 잘했던 인턴 한 명을 6개월 정도 갈구다 퇴사시켰다는 것을 훈장처럼 이야기했다. 다른 애 퇴사 시킨 이야기는 나를 겁주려고 한 걸까? 아니면 나를 한 번 버텨보라고 자극하는 것일까? 본인이 쌈닭인 것에 자부심을 느껴서?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일거수일투족 모든 문서를 뜯어보고, 촬영된 사진을 32배 줌 해서 어떻게든 티끌을 발견해 나를 갈구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디자인팀에게 말도 안 되는 수정 요청을 계속 맡겨야 하는 건 내 몫이었다.


'한 번은 어렵고 두 번은 쉽다.'


직전 회사에서 퇴사를 한 번 해보니, 이번엔 좀 더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6개월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그 짓거리가 진행된 지 열흘 정도 지났을 때, 열심히 숨을 토해내며 지적을 하는 팀장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불러냈다. 방금 전까지 울그락붉으락 했던 얼굴에 갑자기 차가워졌다. 팀장도 내 낌새를 느꼈던 걸까. 빈 회의실에 가서 팀장과 눈을 마주쳤다. 어깨는 바짝 올라와 있고, 눈은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뜸 들일 거 없었다. 나는 그만두겠다 이야기했다. 예상은 했지만, 현실로 다가오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내가 나가는 거야 크게 상관은 없다. 주변에서 본인에 대해 수군댈게 신경 쓰이고, 광고주에게 또다시 담당자(내가 올해에만 4번째 담당자였다)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또 어떻게 전해야 하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덮쳤으리라(그리고 어쩌면 누군가 또 나를 못버티고 떠나간다는 심리적 작용이 일어났을지도). 팀장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실망했다'며 나무랐다. 나는 그저 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반복할 뿐이었다. 제발 그 말 좀 그만하라는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퇴사 의사를 밝힌 지 3일이 지났음에도 팀원들은 물론 상부에 아무런 보고도 올라가지 않았다. 그 사이 나를 설득해 보려는 목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굳혔다. 내가 여기 계속 있으면 나도 팀장도 성격 버리고 정신 치료를 받게 될 게 뻔했다. 더 이상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퇴사 처리를 진행해달라 간곡히 요청했다. 마침 그 사이에 나한테 스타트업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도 퇴사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했다. 비빌 언덕이 생기니 마음이 한 결 놓고 퇴사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또다시 대행사에서 못 버티고 튕겨져 나가게 되었다.


한 때 종대사 AE를 꿈꿨지만, 이제는 알겠다.

대행사는 나와 맞지 않는다. 

찍어먹어 보니 알겠다.

다시는 대행사에 입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찍어먹어 보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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