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묘한 뉘앙스들을 읽어내면 더욱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직장에 입사하고 나면 다양한 언어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평소에 친구들과 쓰던 말을 그대로 쓰긴 어렵죠.
'팀장님 못하겠는데요?'
물론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머스크한 쿨내를 풍길 수는 있겠지만, 오래 다닐 생각이라면 그리 좋은 대화방식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회사에서 쓰는 딱딱한 업무용어들이 꼭 '옳다' 라곤 할 수 없습니다. 기왕이면 쉽고 편한 언어들을 쓰는 게 좋겠죠. 하지만 언어의 특성엔 '사회성' 이란게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배운 내용인 것 같아요. 어느 순간 나 혼자
'지금부터 A4용지를 미츠키쨩이라고 불러야겠어!'
라고 결심했다고 해서 그게 언어로써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구성원이 모두 인정하는 일련의 규칙들이 있기 마련이죠. 문법과는 별개로 말예요.
흔히 언어는 소속감을 높여주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업계용어나 회사만의 독특한 언어문화가 발생하기 마련이죠. 회사에 들어간 이상 이러한 문화를 홀로 거스르는 건 매우 거친 미래를 보장합니다. 독보적인 연어가 되고픈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일단은 알고 연어가 되도록 합시다.
저는 디자이너니까 클라이언트와 전화나 메일, 톡으로 주고받는 다양한 언어들이 있기 마련이죠. 오랜만에 메일을 정리하다보니 묘하게 중복되는 단어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런 것들을 정리해볼 참인데 뇌피셜과 웃자고 하는 얘기들이 많으므로, 도움의 여부를 확신할 수 없습니다.
1. 감사합니다!
톡으로 감사할 때 주로 쓰입니다. '^^' 를 붙여 친근함을 드러낼 때도 있습니다. 느낌표는 오바하지 않고 한 개만 붙여줍니다.
2. 감사합니다.
메일로 감사할 때 주로 쓰입니다. 뭔가 진짜 감사한 것 은 아닙니다. 업무 중의 감사합니다..란 것은 일종의 '안녕히계세요.' 와 같습니다.
3. 감사합니다~
좀 편한 클라이언트에게 주로 쓰이는 데 그냥 물결만 쓰면 성의없어보일 수 있으므로 이모티콘과 함께 써줍니다.
4. 감사합니다 :)
뒤에 :) 을 붙이는 것은 습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제가 그렇습니다.
5. 감사합니다...
주로 내가 쓰기보단 이런 식의 답장을 받을 때가 있는데 메일을 보며 아련해질 수 있지만 점점점에 큰 의미는 없습니다. 상대방이 주로 40~50대 이상인 경우가 많을 겁니다. 어르신들에게 점점점은 '~' 물결표시와 비슷합니다.
6. 죄송하지만
일하다보면 죄송할 일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감사합니다와 마찬가지로 진짜 죄송해서라기 보단 '제발, 플리즈'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직설적으로 죄송하다고 말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뭔가 지는 기분이거든요. 그래서 보통은 죄송 빼고 양해정도로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7. 최대한
내가 퇴근하기 전에.
8. 충분히 검토하신 후
오늘안에.
9. 보내주신 내용은 잘 확인했습니다.
이런 문장을 장면으로 묘사해보자면, 일단 상대는 당신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당신이 보내준 A4자료를 보며 말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음... 네 훑어는 봤는데...' 라는 느낌이랄까요. 이제 본격적인 뭔가가 다음에 펼쳐질 것입니다. 보통 디자인시안을 넘긴 직후 주로 받는 멘트입니다. '잘확인' 이후엔 수도 없는 피드백들이 쏟아지기 마련이죠.
10. 괜찮으시다면
= 안 괜찮아도
11. 수고하세요!
보통 마무리 인사엔 느낌표를 붙이기 마련인데, 느낌표는 '경쾌함'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물론 경쾌하지 말아야 할 상황이라면 점을 찍어서 묵직한 감정을 전달합시다.
12. 말씀주신 사항을 반영하여
당신이 말한대로...라는 뜻인데 왠지 저렇게 씁니다. 주로 반영한 쪽이 뭔가 일을 더 한 느낌이라서 딱딱할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거죠.
말씀주신 사항 반영하여 수정안 드리겠습니다^^ (X)
말씀주신 사항 반영하여 수정안 드립니다. (O)
13. 부탁드립니다.(자매품 : 요청드립니다.)
말은 부탁이라고 하지만, 사실 안하면 안될 상황이 많습니다. (반협박)
14. 가능하시면
당신의 신체 중 80% 이상의 후유장애가 발생하지 않는 한
15. 해당
this, that, it 등 모든 지시대명사를 대체하는 만능단어입니다. 해당 이슈, 해당 안건, 해당 파일, 해당 내용, 해당 사진, 해당 인원 등등등... 그냥 이그저것을 모두 포함한다고 생각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16. 관련
이것도 거의 만능단어입니다. 프로젝트 관련, 인원 관련, 시간 관련, 미팅 관련하여, 비용 관련 등등... 굳이 한글로 바꾸면 '~에 대해' 라는 뜻일겁니다. 아래 17번과 묶어서 자주 쓰입니다.
17. 확인 차
달라고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라는 뜻입니다. 16번과 함께 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돈주세요.
= 비용 관련하여 확인 차 연락드립니다.
빨리 돈주세요!!
= 비용 관련하여 일정 확인 차 연락드립니다.
18. 문의드립니다.
모든 질문은 '문의'라고 하더군요. 질문드립니다? 노노. 문의드립니다. 주로 처음 소통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반대로 '문의하실 사항은 아래 연락처로 부탁드립니다' 등등의 말을 붙이기도 하는 데 실제로 문의를 하면 당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냥 하는 말 같습니다.
19. ~예정입니다.
이번 달 안에
20. ~계획입니다.
안될 수도 있습니다.
21. 공유부탁드립니다.
주세요. 란 뜻입니다. 니만 보지 말고 같이 보자라는 뜻인데... 크로스체크를 하면서 당신을 간섭하겠다...라는 함의가 다소 있는 듯 합니다. 주로 공유하는 건 일정, 계획표, 시안, 상세내용 등등이 있을 겁니다.
22. OOO사항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 그러나 내가 하고 싶진 않습니다.(당신이 좀 해주면 차암 좋을텐데...)
23. 언제든지 연락주셔도 됩니다.
18시 이전까지만
24. 편하게 연락주세요.
여기서 편하게란 문자까지만. 톡은 좀 '어엇?' 이럴 때가 있더라구요. 톡을 할 때는 '톡으로 주세요' 라고 말할 때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5. 약식으로
= 대충 해보았습니다.
26. 다름이 아니라(자매품 :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좀 정색을 하고 말하자면
27.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뭔가 빠진것같지만(사실 뭔지 잘 모르겠고..알아도 별로 채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28. 오늘 중에
(받을 때) 오늘 중에 부탁드립니다. = 오늘 오후18시 이전에
(줄 때) 오늘 중에 드리겠습니다. = 오늘 자정이전에
29. 곧
이번 주 안에
30. 최대한 빨리 드리겠습니다.
주말지나고 다음주 월요일까지
31. 내부적으로 협의 후
여기서의 협의란 = 대표님이 시간 될 때
32. 고생많으셨습니다!
돈을 드리겠습니다!
33. 사전 미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냥 메일이나 전화로 해선 말이 잘 안통하는 것 같습니다. (한숨)
34. 1월 인삿말
늦었지만 새해복 많이 받으시길 바라며
새해복은 1월달 내내 쓸 수 있는 훌륭한 인삿말입니다. 2월 구정연휴 전후까지도 쓸 수 있으니 지겹게 쓰도록 합시다.
35. 2월마무리 인삿말
감기 조심하시고 곧 뵙겠습니다.
이 때부터 폭풍 건강드립이 시작됩니다. 추워서 조심, 더워서 조심, 환절기라 조심 등등... 자나깨나 돈주시는 분의 건강을 염려하는 우리의 마음이 잘 드러나도록 합시다.
36. 3월~6월 인삿말
건강에 유의하시고 곧 뵙겠습니다.
37. 7월~8월 인삿말
더위 조심하시고 곧 뵙겠습니다.
38. 9월 인삿말
풍성한 한가위 되셨기를 바라며
한가위버전은 추석연휴 전후2주 상간으로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추석 전이면 '되시길 바라며~' , 추석 이후면 '되셨기를 바라며' 등등 시제를 잘 활용합니다. 적극적인 표현으로 '나는 당신의 한가위복까지 챙기는 다정한 사람' 이라는 인상을 남기도록 합시다.
39. 10월~11월 인삿말
일교차 큰 날씨에 건강 유의하시고
일교차버전은 3,4월, 10~11월 모두 쓸 수 있습니다. 보통 일기예보 기준으로 오전과 오후의 일교차가 10도 이상 벌어지는 날에 써주면 '오 놀 줄 아는데?' 라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40. 12월 인삿말
즐거운 연말연시 되시길 바라며
12월엔 연말연시버전을 씁니다. 1월은 새해복버전을 쓰니까 이건 12월에만 쓸 겁니다. 조금 더 디테일한 센스를 보이고 싶다면 크리스마스 버전, 한 해 잘 마무리하시길 바라며 버전 등을 혼용하여 쓸 수 있습니다.
41. 현재 oo을 기획중에 있습니다.
자료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조만간 당신에게 뭔갈 제안해달라거나 요청드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42. 아래와 같은 내용
3가지 이상
43. 몇 가지
3가지
44. 양해부탁드립니다.
=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45. 회신부탁드립니다.
= 제대로 봤는지 또는..읽기는 했는 지 내가 확인해야겠습니다.
46. 내부사정으로
= 누군가가 결재를 안해주고 있습니다.
47. 내부적인 이슈가 있어
= 계속 빠꾸당해서 (주로 실무자의 메일에서 자주 보이는 표현입니다. 주로 '내부' 라는 것은 회사 전체가 아니라 결정권자 한 명에 대한 메타포에 가깝습니다.)
48. 다소 늦어지고 있습니다.
= 똥줄이 타고 있습니다.
여기엔 'ㅠㅠ' 등이 붙어있고 '죄송합니다' 까지 합쳐져서 3단콤보를 만듭니다. '양해부탁' 까지 합쳐지면 거의 '우리도 알고 있으니 재촉하지 말라' 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예) 내부 사정으로 인해 다소 늦어지고 있습니다.ㅠㅠ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
49. 회의 결과
= 대표님이 말씀하시길
50. 추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제 그만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라는 뜻과 같습니다. '추후' 라는 것은 기약할 수 없는 멀고 먼 궁극의 미래를 의미합니다. '우린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소개팅 후 상대방이 맘에 안들 때 써먹어도 훌륭한 말입니다.
자매품 : 좋은 기회로 다시 만나길 기대하겠습니다^^(웃음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