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여행을 다른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저에게도 그렇죠. 여지껏 여행은 혼자 다니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스페인 여행은 둘이죠. 이전과는 많은 것이 다릅니다. 좋냐 나쁘냐를 말할 순 없습니다. (그 분이 볼 수도 있으니까요. 아마 볼 겁니다.) 이것은 그냥 아...혼자 갈 땐 그렇고 둘이 갈 땐 이렇구나...정도의 차이라고만 해두겠습니다.
누에보다리!
여튼 오늘은 론다에 도착했습니다. 구글에 치면 론다에 대한 정보가 주르르륵 나오고 우리도 그 정보와 거의 흡사한 여행을 하였습니다. 점심에 먹은 타파스바가 아주 엄청나게 맛있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딱히 여타 스페인 여행 포스팅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토요일에 도착한지라 한국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고 여기가 전주 한옥마을인지 스페인 론다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죠.
대신 오늘은 곰곰히 생각해 본 재미있는 사실을 좀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이건 저희 사이에 유효했던 것이기에 여러분들의 여자친구(가 있다는 전제하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리란 보장은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당연히 이런 글에서 등장할 법한 대화와 배려로 해결해라...그런 말은 하지 않을겁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대화가 안되면 여행을 떠나지 마시고, 배려가 없다면 사귀면 안됩니다. 그런 건 기본적인 것이니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하고 여행 스타일이 맞다는 전제로 말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적당한 선에서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포르 파보르.
1. 많이 맛있는 걸 먹습니다.
일단 배고픔은 모든 비극의 시작입니다. 이미 배가 고파진 후에 뭔갈 먹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평소에 배가 고프지 않도록 끊임없이 오물거리고 비상식량을 챙겨놔야 합니다. 상대가 화가 났다면 혹시 오늘 탄수화물이나 지방, 당류가 부족하진 않았는 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2. 돈이 많아야 선택항이 줄어든다.
돈이 많아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버스좌석 고를 때도, 마트에서 빵 하나 살 때도, 입장료를 내야 할 때도...항상 손 떨리고 끊임없이 상의하고 조율해야 합니다. 특히 이렇게 기회비용이 발생하는 지점에선 서로의 욕구가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거든요. 돈은 넉넉히 가져갑니다. 적어도 의식주 부분에서 불편이 없을 정도로 말이죠.
3. 서로를 측은하게 여기기
화가 날 땐 이런 걸 상상해봅시다. 그녀가 나 없이 혼자 떨어져서 어딘가에서 엉엉 울고 있는 짠한 모습 말입니다. 얼마나 측은합니까. 이역만리 먼 곳에서 기댈 사람은 서로밖에 없습니다.
어제 여자친구가 발목 시렵다고 만져달라는 데 저는 그게 장난인 줄 알고 발 가지고 장난을 쳤더니 갑자기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서럽게 우는 겁니다. 세상 빡쳐도 울지 않던 여자가 발목 하나에 엉엉 울 줄은 몰랐답니다. 타지에선 조그만 것도 서럽고 그렇습니다. 측은하게 서로를 바라봅시다.
4. 돈은 한 사람이 체크하기
두 사람 모두 돈에 신경쓰고 있으면 날카로워집니다. 한 명만 돈 관리합시다. 그리고 돈을 쓰는 사람은 관리자의 허락을 잘 받아야 합니다. 주로 여자친구에게 경제권한을 주는 편이 좋습니다. 세계평화 측면에서도 그렇죠.
5. 여행지의 특수성 이해하기
한국에서 말 잘통하고 즐거웠던 사이라도 여행지에선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선 모든 게 새롭고 조심스럽습니다. 여행지에선 긴장감과 피로도가 매우 높아진 상태라는 걸 서로 알아야 겠습니다. 또한 여행지에서의 모습이 일상의 모습과 일치하진 않습니다. 여행지에서 여권을 잃어버렸을 때의 대처하는 모습과 한국에서 전세금 사기 당했을 때의 모습이 항상 일치하진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한 곳의 모습을 보고 그걸 일반화시켜선 안됩니다.
6. 생리일정 체크하기
남자친구는 여자친구의 생리일정을 무조건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해외의 생리대는 윙이 없는 것도 있고 부착력이 약하기도 합니다. 탐폰이나 생리컵을 많이 쓰기도 해서 급할 때 당황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대충 언제쯤 시작될 거라는 것과, 평상시와는 양과 통증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나이트를 몇 개 쓰고 대형과 중형 몇 개씩이 보통 필요한 지. 외우고 다녀야 합니다. 생리일정을 고려해서 그 상간에는 빡센 여정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죠.
7. 함께 술 마시기
술친구를 겸하는 애인 사이만큼 재밌는 것은 없습니다. 하루동일 해묵었던 감정은 와인이나 맥주, 보드카의 좋은 안주가 되어줍니다.
8. 크리티컬한 부분찾기
제 짝궁은 제가 삐지거나 오래도록 꿍해있는 걸 싫어합니다. 감정의 긴장상태가 지속되는 걸 싫어하죠. 차라리 빨리 싫은 점을 토해내고 풀길 바랍니다. 저는 짝궁이 제 눈치를 보는 걸 싫어합니다. 그러니 저도 빨리 결정을 내려버리는 편이 좋죠. 서로 어떤 점이 크리티컬하게 작용하는 지 알고 있으면 좋답니다. 아예 피해갈 순 없지만 적어도 상대방이 왜 화나있는 지 정도는 짐작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9. 사랑노래 저장해가기
이적의 다툼이나, 폴킴노래, 악뮤노래를 가져다도록 합시다. 격한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사랑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개빡친 순간 화장실에 가서 물을 벌컥벌컥 크게 마신 후 변기에 앉아 음악을 한 곡 듣습니다. 이적의 "다툼" 같은 곡을 듣고나면 불현듯 현타가 오고 처음의 설레임을 되새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싸울 것 같을 땐 반응부터 하지말고 한 템포 쉬어가야 합니다. 화장실은 그러기에 좋은 장소입니다.
10. 사진 잘 찍어주기
사실상 저희 커플은 이미 포기한 부분이지만, 그래도 늘상 이쁜 사진을 찍어주길 바라더군요. 그리고 같이 찍자는 데 "아이 난 됐어" 라고 거절하면 엉덩이를 맞을 수 있습니다. 부끄러워도 잠자코 같이 찍도록 합시다. 예쁜 사진 찍어주는 데 싫어할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11. 다왔어 해주기
이건 보너스인데 뭔가 끊임없이 다 왔다고 해주셔야 합니다. "다 왔어 다 왔어. 저기야 이제 바로 앞이야." 제 짝궁은 이 말에 지금 800번째 속고 있습니다.
커플의 여행이란 결국 디테일이 중요합니다. 가방 속의 킷캣이나, 내가 먼저 챙긴 팬티라이너랄지, 물 살 때 짝궁 것도 하나 먼저 사오는 거, 아까 말했던 '아 오렌지쥬스 먹고싶다' 와 같은 말들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죠.
모두 빨리 사귀셔서 좋은 여행 떠나시길 바랍니다. 최대한 오래 멀리 힘든 곳으로들 떠나세요. 크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