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삶분의 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창선 Dec 06. 2019

착한 직원을 자릅니다.

그 사람은 매우 착해서 행복했습니다.

<이건 픽션입니다. 다들 긴장놓으셔도 됩니다. 혹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셨거나 공감이 되신다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인터뷰가 끝난 후 녹음기와 노트를 정리하고 가방에 넣은 제이와 물을 한 잔 마시고 온 임대표는 함께 연초를 꺼내물었다. 장장 2시간이 넘는 인터뷰였지만 임대표는 아직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마지막에 임대표는 꽤나 씁쓸했다. 혀로 연신 입술을 닦으며 몇 번이나 천장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이는 그의 모습은 딱히 설레이지 않는다. 착한 사람을 잘라야 한다는 임대표의 말은 여러 기억의 레이어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해 겨울, 이제 갓 시드머니 투자를 마친 그의 회사는 몇 사람을 채용했다. 대단한 회사는 아니었다. 콘텐츠를 만들고 광고붙여 구좌별로 판매하는 아주 노멀한 미디어회사였고 그는 고작 3년차 사업가였다. 코워킹스페이스에서 두유와 커피로 연명하던 그는 투자를 받고 난 후 운좋게도 합정동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이것저것 이케아 소품으로 꾸밀 정도는 되었다. 온풍기가 빵빵하게 나오진 않아서 롱패딩에 핫팩 두 개를 등짝에 붙이고 출근하면 딱 괜찮을 정도랄까. 그래도 초창기부터 함께해온 동료와 열악한 환경에도 따라와 준 디자이너가 있어서 꽤나 행복했던 그였다.


그러던 겨울, 두 사람이 신입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콘텐츠에디터인 벨이었고 다른 한 명은 프로젝트 매니저 '울부짖는 달'이었다.(그는 인디언식 이름을 좋아했다)


콘텐츠매니저였던 벨은 이전에 회사에서 브랜딩업무를 잠시 담당하다 유튜브콘텐츠를 기획했었다고 했다. 벨은 일에 능숙하진 않았지만 성격은 밝고 착했다.


벨은 매우 착했기에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는 게 싫었다. 특히 잘 모르는 사람에게 밉보이는 것은 팬티를 드러내는 것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협력업체에게 보낼 견적서를 클라이언트에게 보냈을 때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벨은 겸손했기 때문에 자신보다 더 현명한 임대표가 어떻게 알아서 하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대표는 예상대로 어떻게 알아서 해줬고, 벨은 안도했다. 그는 착했기 때문에 임대표에게 고맙단 말을 했다. 임대표는 손을 이마에 짚으며 돌아가서 일을 보라고 했고, 벨은 열심히 일을 했다.


벨은 착해서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모자란 툴 실력때문에 못난 제안서가 나오면 안될 것 같았다. 내 손으로 똥을 주무르고 그 손으로 대표님께 보고서를 드리는 건 매우 무례한 짓이다. 그래서 손을 깨끗이 하기로 했다. 벨의 피피티 실력은 좆같은 보노보노의 발가락 사이 때를 시각화시킨 수준이었다. 이것을 안다면 모두가 실망할 것이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겠지. 그래서 벨은 제안서를 만들지 않았다. 자신의 일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건 무책임한 사람이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못한 것이니 내가 책임지면 된다.


프레젠테이션 당일이 되었고 벨은 파일을 챙기지 않았다. 그것은 실수였다. 프레젠테이션은 엉망이 되었다. 벨은 비참한 심정으로 이 사태에 대해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임대표의 영혼은 자유의 몸이 되어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고, 그는 눈은 울었지만 입은 웃고있는 신묘한 경험을 했다. 태어나서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훌륭한 사용자경험을 제공한 벨은 나름의 책임을 지기위해 임대표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정식으로 죄송하다고 했다. 벨은 진심어린 어조로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힌 채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니 벨은 이 사태에 대해 잘 책임진 것이다. 벨은 뿌듯했다. 이제 나는 내 행동에 책임지는 어른이 되었구나.


임대표는 생각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가끔 길거리에 똥을 쌀 때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면상에 본의 아니게 죽빵을 날리는 일도 생긴다. 이런 일 저런 일이 생기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의 마지막에 다채로운 국어의 신비로운 언어들이 등장했지만 그건 그냥 떠오른 것이다.


벨은 착했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으로 누군가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벨은 섣불리 자신의 의견을 꺼내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주장은 가시와 같다. 존나 민경훈의 가시처럼 가시처럼 깊게 박힌 기억은 아파도 아픈 줄 모를 수 있다. 그래서 아무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벨은 콘텐츠를 제공해 줄 외부 필진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부 필진의 컴플레인이 쏟아졌다. 계약이나 대금지급, 포스팅 일정 등에 대해 일절 공유받은 게 없기 때문에 그들은 글을 쓸 수 없었다. 벨은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저 기다렸을 뿐이다. 그대들을 위한 일이니 심사숙고 한 것이지. 그러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달라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걸 못참고 떠난 필진들은 인내심이 없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함께 들어온 울부짖는 달은 벨을 불러 한 마디를 했던 모양이다. PM을 담당하고 있으니 여간 속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벨은 이런 사태에 대해 모두와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무능함으로 생긴 일이니 모두에게 이 사실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했다. 말하는 도중 벨이 눈물을 보였기 때문에 울부짖는 달은 개쌍놈새끼가 되었지만 다행히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는 이름을 참 잘 지었다. 아마 앞으로도 자신의 이름값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후 울부짖는 달은 대표와 면담을 했고 왠지 그는 담배를 몇 대 더 피러 옥상에 갔던 것 같다.


벨은 매우 착했다. 벨은 옆 디자이너가 실수로 오타를 낸 것을 보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디자이너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다. 이것을 잘못 말하면 자기도 오해를 받을 거고 월권행위가 아닌가. 디자이너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는 와콤타블렛을 부여잡고 울고 말것이다. 안그래도 일이 많은데 그냥 못 본 척 하기로 했다. 기일에 맞춰 시안을 넘기던 디자이너는 협력업체로부터 오타발견 메일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존나 새벽부터 달려가 시안을 수정했다. 디자이너가 아침형 인간이 된 것을 축하할 일이다. 벨은 디자이너에게 생의 긴장감과 스릴을 선사해주었다. 선한 일이다.


임대표는 안되겠다 싶었나보다. 벨에게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해보았다. 벨은 모든 것을 묵묵히 들었다. 그는 착했고 모든 것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죄책감과 무력감에 눈물이 쏟아졌다. 벨은 사무실에서 엉엉 울었다. 누군가는 벨을 위로했고, 누군가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벨의 눈물은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아주 서럽게 울었고 그것은 사무실 문앞에 근조를 붙여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벨은 돌아가신 고조할아버지 생각도 해보았다. 엉엉 울고 있는 벨의 앞에 고조할아버지가 웃으며 몇 개의 숫자를 보여주는 듯 했다.


벨은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모두를 힘들게 하느니 자신이 떠나는 게 모두에게 도움이지. 고조 할아버지가 보여준 것은 바로 그 날짜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벨은 짐을 쌌고, 다음 날 나오지 않았다. 하루라도 안보여야 그들이 행복할 것이다. 아마도 벨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수많은 카톡과 부재중통화가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호의에 보답하는 길은 내가 떠나는 것이다. 벨은 좀 더 반성하고 성숙한 자신을 위해 자기발견의 고행을 떠나겠노라 마음먹었다. 벨은 무거운 마음으로 괌으로 가는 비행기티켓을 끊었고 넓은 바다와 모래사장을 바라보며 새로운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보통 여행을 다녀오면 진짜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방법은 꽤나 유효할 것이다.



여기까지 말한 임대표는 이후 손사래를 치며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했고, 제이도 알겠다고 했다. 담배를 비벼끄고 돌아가는 길에 임대표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착한 직원은 빨리 자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움직였고 이 이야기는 인터뷰에 실리지 않았다. 대신 제이는 임대표의 인터뷰 원고 마지막에 실수처럼 마침표를 두 개 더 붙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일부터 10시 출근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