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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창선 Dec 09. 2019

니들이 못하는 게 아니다. 내가 잘하는 거지.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그는 최고의 일잘러였다.

<이것은 픽션입니다. 놀라거나 노여워 마세요.>


제임스는 생각했다. 우리 회사는 존나 노답이다. 어느 타로카드집에 가서 '우리 회사에 미래가 있을까요...' 라고 물었을 때도 타로술사는 카드를 집어던지고 이런 개노답은 유사 이래 찾아보기 어려우며, 후대에 큰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라며 놀라워했다. 제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출근한다. 혁신을 시작한 이후 회사는 혁신적으로 떡락 중이었고 매출은 커녕 점심 김치찌개에 사리넣을 돈이나 있을 지 의문이었다.


제임스는 세상에서 제일 의욕없는 표정으로 아메리카노와 바나나 하나를 사들고 자리에 앉았다. 바나나를 세 입에 털어넣고 컴퓨터를 켰다. 빌어먹을 업데이트는 분명 수동으로 설정해놨음에도 90%에서 움직이질 않고 끄지도 말라고 명령질이었다. 제임스는 무심히 업데이트 완료를 기다리며 비어있는 옆 자리를 바라보았다. 먼지가 조금 앉은 책상과 조금 닳은 의자시트가 애처롭다.


마케터였던 플러버는 결국 저번 주 수요일 사직서를 내고 말았다. 사실 지금껏 안 낸게 더 신묘할 지경이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사람이 또 발할라로 입성했다는 생각에 그를 축복해주기로 했다. 마침 컴퓨터도 부팅을 완료한 찰나였다. 출근하자마자 대표는 놀라운 얘길 했다. 일전에 올렸던 채용공고가 효과가 있었는 지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제임스는 또 한 명이 고집멸도를 경험하겠구나 생각했지만, 이어지는 얘기가 대단했다.


"제임스, 너 해달배게 알지. 그거 기획하고 마케팅한 게 누군줄 알아? 해달배게, 사슴꼬리 샤워기, 슈크림 라면까지. 모두 레전드씨의 작품이라고. 우리 회사에 바로 그 레전드씨가 오는거야."


"오...맙소사!! 왜요?"


제임스는 아차싶었다. 왜요라니. 그가 올 수도 있는거지. 하지만 그는 스타트업씬에서 어지간한 사람은 대부분 함아친으로 뜨는 존재였다. 페친5,000명에 더 이상 친구 가를 받지 못할 정도의 셀럽이었다. 그가 온다고? 여기에? 하필? 미디어쪽에서도 꽤나 유명하고 마케터들 사이에선 사대천왕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특히 레전드씨는 동쪽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집이 강동구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곳에 온다는 건 대표에게 근저당을 잡혔거나 대표의 동생을 사랑하는 등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레전드가 공유하는 글들은 대부분 잘 터졌고 기본 좋아요 500개를 먹고 들어가는데, 밑에 달린 댓글들도 찬양일색인지라 감히 부정하는 댓글이라도 달았다간 유혈사태를 걱정해야 했다. 그는 몇 개의 거대한 상품들을 터뜨렸고 마케팅회사를 시리즈B까지 끌어올린 일등공신이었다. 말도 어찌나 잘하는 지 다들 그 앞에선 잘못 지껄였다간 매우 다양하게 난도질 당하곤 했다. 레전드는 우리 회사의 마케팅 팀장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팀원이 없는데 뭔 팀장인가 싶었지만 답은 명쾌했다.


'니가 팀원해야지'


그래, 이제부터 제임스가 팀원이 되는 것이다. 제임스의 표정은 상상에 맡기도록 하자.




제임스는 레전드의 업무능력에 놀랐다. 그는 듣도보도 못한 용어들로 대표와 이사 그렉을 사로잡았다. 레전드는 말했다.


'나랑 일하면 좀 힘들거에요. 각오하세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카리스마 무엇. 제임스는 이 새끼가 지금 시비를 거는 건지 협박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레전드의 얼굴엔 뿌듯함이 가득했다. 레전드는 나의 업무실력은 너무 우월해서 일반 평민신분놈들은 자기 뒤에서 나락이나 털고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우월감을 너무 드러내면 개재수가 되므로 그걸 적당히 멋진 단어로 숨길 줄도 알았다.


레전드는 강의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유창했는데 한 마디로 줄이면 '소비자 니즈 파악하기' 정도의 문장을 1시간 분량으로 늘릴 수 있었다. 레전드는 모든 말 끝에 "결국 자신도 모른다."  말을 덧붙였는데 이는 겸손함과 마케팅의 거대함에 대한 경외감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는 마케팅 앞에 자신은 한낱 나약한 존재이며, 진정한 신들은 소비자라고 역설했다.


제임스는 좀 의아하긴 했다. 소비자를 신처럼 말하지만 정작 레전드는 소비자와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았다. 물론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소비자는 너무 많고 모든 곳에 존재하며 또 그들은 매우 신적인 존재인지라 감히 레전드가 다가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제임스는 그게 존나 귀찮음에서 비롯된 그냥 탁상공론 이빨까기가 아닐까 싶었지만 레전드는 일잘러였기 때문에 묵묵히 따르기로 했다.


레전드는 정말 일을 잘했다. 보고서에 멋진 말을 자주 썼는데 그와의 회의 이후 회의록엔 '디베이트 리포트' 라고 써야만 했다. 회의내용 또는 그냥 회의록이라고 썼다간 아주 손모가지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점심은 왜 '런치'라고 쓰지 않는 지 궁금했지만 일을 잘하려면 보통 담배타임도 스모크미팅 정도로 써야함을 깨달았다.


레전드는 일손이 매우 빨랐다. 그는 일을 정말 빠르게 처리하고 업무분장을 칼같이 했다. 이를테면 레전드가 기획안을 후루룩 써내면 제임스는 견적을 뽑고, 정리하고, 물품요청을 하고, 대금지급조서를 쓰고, 수령 후 검수하고, 발송하는 여러과정을 담당하는 것이다.


레전드는 기획의 중요성을 매번 강조했다. 방향성과 목적성에 대해 소리높였다. 사이먼 시넥의 영상을 공유해주며 이것이 바로 방향성이라고 외쳤다. 레전드가 모든 걸 잡고 고민하는 역할이니 제임스는 몸이나 쓰면 되는 것이다.


레전드는 대표와 이사에게 취조하듯 마구 질문을 던졌다. 변호사도 없이 대표들은 영혼까지 털리고 난 후 결국 레전드의 입맛대로 기획의도가 잡혔다.

 그의 위대한 생각을 매우 전문적인 용어와 가치, 타겟, 목적 등의 단어와 버무리면 고대 이집트 석판같은 한 장의 기획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원페이퍼 기획안이야 말로 진정한 기획안이라고 했다. 제임스는 고대언어같은 기획안을 해석하기 바빴다. 제임스는 다시 한국어를 다시 배워야하나 고민에 빠졌다.


레전드는 디자이너에게도 기획력을 요구했다. 기획하는 디자이너야 말로 진정 이 시대에 필요한 핵심인재라는 것이다. 앤설리는 귀기울이지 않았지만 레전드는 멈추지 않았다. 앤설리의 월급은 고작해야 210만원 정도일 것이다. 삼시세끼 걱정할 정돈 아니지만, 전세자금을 만들기엔 몇백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고, 이 연봉과 회사로 대출받아봐야 얼마나 나올 지 모르겠다.

 앤설리는 연봉 올려주면 올려준 만큼 능력을 더 키워보겠다는(레전드가 듣기엔 뒷목잡을)대답을 당당하게 했고, 레전드는 팀웍과 협업의 기본자세가 안되어있다며 협업과 기획력에 대한 사내스터디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물론 앤설리가 기획을 공부해야 할 이유는 분명했다. 시대의 요구도 있지만, 어차피 앤설리는 회사에 오래 몸담고 있진 못할 존재였다. 언젠가 독립하면 지 돈 지가 벌어 살아야 할 텐데 회사 이름이라도 지으려면 애당초 뭔가 꾸릴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했다.


문제는 레전드가 말하는 그 기획력이란 걸 공부하려면 다시 태어나야 하거나 혈도를 뚫는 방법 이외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는 점이다. 기획을 말하는 수백만개의 아티클과 결국 니가 알아서 해라는 식의 책들은 너무 많았다. 레전드는  봐야 기획력이 갑자기 생기는 지 알려주지 않았다.


"경험과 실행만이 그 답" 이라고 말하던 레전드는 그 말이 뭔가 깊은 여운을 주는 듯 담담한 척하며 말했다. 하지만 경험과 실행을 가능케 할 돈을 주진 않았다. 결국 월세내고 밥값빼고 세금떼고 카드값내고 엄마아빠 용돈 좀 주고 맥주마시고 바지 하나사면 사라질 월급의 일부로 새로운 경험을 해보라는 건데 앤설리에겐 13만원 정도로 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새로운 호텔에서 오지는 오리털배게를 느껴보는 경험 정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레전드는 끊임없이 자신의 예전 레퍼런스를 말했다. 회의 때마다 항상 그는 '해달배게 때는, 해달배게 때는' 을 연발했는데, 다행히도 그 프로젝트가 작년이었기 망정이다. 해달배게가 2천년 전에 만들어졌더라면 지금쯤 파피루스를 가지고 와서 그 얘기를 다시 하고 있었어야 할 지도 모른다. 일을 잘하기 위해선 자신이 만들어놓은 성과에 대해 과하게 애정을 가지는 것도 중요한 듯 했다.


그는 페북에 일잘러의 몇 가지 비밀 등의 글을 공유하거나 이나 가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포스팅을 올리곤 했는데 묘하게 저격성 글인지라 아마 전직 스나이퍼 또는 어쌔신은 아니었을까 의심해보는 제임스였다. 그는 주로 불평을 올렸다. 이렇게 일하는 또는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서 자긴 매우 불편했고 어이가 없었다는 내용이 주였다. 밑에 달린 댓글은 대부분 '와 진짜 어이가 없네요' 등등의 동조글이었지만 비문학 지문 분석하던 기억을 되살려 주제문장을 꼽아보면 결국 '난 잘했고 넌 병신이다'로 귀결되는 단순한 지문이었다.


제임스는 레전드와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어느덧 제임스도 커뮤니티에도 가입하고 다양한 레퍼런스를 챙겨보며 멋진 용어들을 쓰게 되었다. 제임스는 이제 소비자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커스토머 또는 타겟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임스는 페이스북에 일 못하는 모지리들에 대해 까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지막엔 이런 건 결국 시스템의 문제라는 식으로 거창한 프레임을 걸어주곤 했다. 이것은 제임스를 매우 포용력있고 거시적관점에서 이슈를 바라보는 큰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어주었다.


제임스는 종종 지랄맞다고 생각했지만 레전드가 함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조금 피곤하고 지친 듯 했지만, 우리의 지표가 6개월 전에 비해 조금 나아졌기 때문에 레전드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에 동의했다. 그는 정말이지 일을 잘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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