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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창선 Dec 10. 2019

디자이너 앤설리의 변명

이것은 디자이너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이것은 픽션입니다: )>


디자이너 앤설리는 어렸을 적 그리 잘사는 편이 아니었다. 앤설리는 누구나 그렇듯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혼자 나자빠진 IMF 폭풍을 겼었다. 아버지는 잘 다니던 철강회사에서 잘렸고, 어머니는 젊을 때 배운 꽃꽃이로 화원 보조일을 시작했다. 뭐만 하면 국밥집으로 전락하는 우리나라 드라마는 존나 거짓말이었고 국밥집 하나 운영하려면 못해도 2,3억은 족히 있어야 한단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국밥집 수준이면 번듯한 자기 가게있는 훌륭한 중산층에 속했다.


앤설리는 여느 디자이너가 그렇듯 미술학원을 부모님 뼈 팔아서 다녔다. 물론 중간중간 알바비를 좀 보태기도 했는데 그건 15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내 돈 벌어서 학원다녔다' 울궈먹을 좋은 구실이었다. 집안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는 프레임은 인생스토리를 꽤나 극적으로 만들어주었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와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훌륭한 클리셰였다.


미술학원 다닌다고 학교 오후 수업을 빠지기도 했는데 예체능계로 빠지는 친구들과 그냥 인문계에서 시험보는 친구로 나뉘었다. 뭐가 되었든 학교나 사회나 학원에서도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디자이너를 준비하면서 학원을 다니는 앤설리는 학원에서도 딱히 이쁨받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그게 앤설리의 잘못은 아니었다. 학원엔 미친 백여시같은 것들이 선생님 똥꼬나 빨면서 희희덕거렸는데 딱히 그런 식으로 입술에 똥묻히며 살고 싶진 않았달까. 앤설리는 나름 실력파였다. 누군가는 앤설리를 찐따, 개재수, 독한것 등으로 불렀다. 그게 뭔 상관인가.


홍대를 갈 지 국민대를 갈 지는 학원에서부터 화두였다. 이미 국민대 입시 학원과 홍대 입시학원은 나뉘어져 있었고 사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대방으로부터 욕 쳐먹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시대의 예송 논쟁만큼 치열한 디자인 스타일의 대립은 그들에겐 매우 중요한 이슈였다. 디자인의 정통성과 교수의 자질, 커리큘럼 등을 언급하며 서롤 병신이라고 까고 있었지만 정작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됐고 내일까지 가능하냐 안 가능하냐' 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간신히 대학에 진학해서 수업을 받아보니 포토샵 수업은 존나 열고 저장하는 것만 대충 가르쳐주더니 갑자기 유튜브 금손이 타임랩스로 만드는 5분 순삭 포토샵 장인영상 같은 걸 만들어오라는 과제가 나오곤 했다.


인문학이나 가끔 미학, 심리학, 마케팅 등을 교양으로 듣곤 했다. 마케팅 수업의 조별과제는 죄다 지 잘난 놈 아니면 모두가 상복을 입고 다녀야 할 정도로 가족들의 사망이 잦아서 아주 불길했다.


디자인 조별과제는 더욱 가관이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앤설리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꼴같지도 않은 크리에이티브 나부랭이는 마치 허공을 응시하며 뭔갈 고민하는 고뇌의 디자이너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다들 디자이너가 머리 좀 싸매다가 뭔가 접신한 듯 눈을 번쩍 뜨며 초패스트 4드론 같은 시안을 만드는 줄 알고 있었다. 현실은 말도 안통하고 들어쳐먹지도 않는 벽보다도 못한 존재에 가까웠다. 그냥 샴푸에 붙어있는 성분표시 스티커가 훨씬 더 내 말을 잘 들어줄 것 같았다.


각자 졸작을 만들고 사회로 진출했을 때 앤설리는 깨달았다. 디자이너는 수없이 많고 일자리는 점점 줄고 있었으며 노동의 가치는 누가 밟아놓은 가을 은행 똥내 정도라는 걸.


 클라이언트는 다짜고짜 포폴이나 보자며, 이거이거 잘 할 수 있겠냐고 대놓고 막말을 해댔다. 대표란 사람은 자기 딸래미 청첩장을 만들어달랬다. 친구들은 다들 이거 하나만 만들어 줄 수 없겠냐고 피피티를 들이 밀었다. 그냥 앤설리의 존재가치는 손가락 4,5개의 가치와 동일했다. 클릭하는 검지중지, 단축키 누를 새끼와 검지 정도만이 앤설리의 전부였다. 대부분 세금떼면 2,200이 갓 될 법한 초봉이 주어졌는데 그것도 운이 좋은 케이스지 별 쓰레기같은 회사에 잘못걸리면 1,800연봉에 근손실은 보너스, 지옥의 연봉동결 악순환에 올라타는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기를 쓰고 그나마 이름있는 곳을 가려고 너도나도 연골을 팔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지적자본론 어쩌고 하는 책이 부각되면서 마스다 무네아키가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세상을 말했다. 앤설리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말은 일반인들에게 꽤나 인상적이었나 보다. 사람들은 아주 이중적이다. 돈 줄 땐 해삼꼬다리 취급이지만, 정작 '디자이너'라는 이름만 좋아해서 개나 소나 다들 디자이너 타령이었다. 앤설리는 그런 게 참 좆같았다. 조만간 이름짓기 좋아하는 정치인 놈들이 '민생 디자이너' 따위의 이름을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대표는 물론 클라이언트는 종종 잔인했다. 그들은 별 말도 안되는 소릴 지껄이며 자기 머릴 뜯어 그 해부도를 그려오라고 했고, 앤설리는 지쳐갔다. 그들은 코딱지만한 돈을 주며 자기의 생각을 그려줄 손을 요구했다. 그것은 일종의 포르노같은 것이었다. 손으로 추는 나체쇼랄까. 나의 노동과 시간을 쏟아부어 만든 작품을 느끼한 웃음으로 받으며 몇 장의 지폐를 뺨에 던지는 느낌. 앤설리 입장에서 그들은 아주 무식했다. 디자인의 기본적인 것조차 이해하지 못했고 대학과 입시미술학원에선 가르쳐주지 않은 새로운 것들을 요구했다. 미팅은 그것들 중 하나였다.


앤설리는 클라이언트 미팅에서 그리드와 레이아웃, 컬러팔레트와 콘트래스트가 어쩌는 둥의 얘기를 했다. 클라이언트는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 됐고...빨리 시안이나 보여줬음 좋겠다' 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앤설리는 그들이 아주 멍청하다고 불평했다.


앤설리는 지속된 업무에 허리와 어깨가 굽고 손목이 아작났는데 병원에 가자 의사가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용어들로 앤설리에게 증상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인대의 위축이 상완근의 어쩌고를 씨부리는 걸 들으면서 '아 됐고....빨리 주사나 놔줬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다. 의사도 앤설리가 아주 멍청하다고 생각했을까.


병원투혼에도 불구하고 앤설리는 퇴근이 없었다. 오밤중에도 시안을 만들어야 했는데 물론 회사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회사월급으론 천호동에 작은 원룸에 바퀴벌레와 함께 이불덮고 자야할 판이라 가난한 부모님 골수를 조금 뽑아 보증금에 보탰다. 70만원이나 되는 월세를 내려면 외주를 뛰어야 했다. 앤설리의 목숨 값은 매월 삼성생명에 13만원씩 적립되고 있었는데 한 달이 지날 때마다 나의 목숨값이 점점 상승하고 있단 생각이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건강보험 5만원에 세금 몇 만원 교통비 12만원, 핸드폰은 곧 죽어도 무제한 데이터를 써야하니 9만원씩 내고 나면 앤설리에게 남는 돈은 서브웨이에서 치즈 추가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술 몇 번 마시려면 내일 하루는 삼각김밥으로 때우면 똔똔인 수준이었달까.


그 무렵 앤설리는 디자이너와 기획력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일전엔 디자인씽킹 어쩌고 하더니 이젠 기획까지 배우란다. 앤설리는 문득 생각해보았다. 리나란 개인에게 뭘 끊임없이 요구한다. 20대에도 30대에도 40대에도 계속 뭐에 미치라고 하더라. 행복한 건 곰돌이 푸와 빨간머리앤 뿐이다. 저작권이 연2조원이나 되니 행복할 수 밖에.


그럼에도 디자이너도 결국 내 것 하면서 살아야 하고 비즈니스를 이해해야 더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날 수 있단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애당초 공부를 해본 적 없던 머리였고, 뭔가 외우고 배우고 있지만 사실 이론만 잔뜩 구겨넣었을 뿐 그게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지는 알지 못했다. 대부분 황금비 어쩌고 하는 희대의 개소리를 아직도 믿고 있었고, UX디자인의 기본 가이드라인 쉽게 만드는 법, 그리고 몇 개의 용어와 심리학 이론 등을 주워듣는 것으로도 어디가서 꽤나 아는 척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대략 핀터레스트와 비핸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고 얼추 이것저것 섞어서 멋진 포폴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외주요청이 들어오면 얼마인지 대답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공부를 하자니 막막하고 안하자니 불안했다. 도전은 돈이 든다. 앤설리는 돈이 없다. 그러니 앤설리는 불평했다. 돈이 없는 자는 불평을 한다. 그건 돈을 들이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앤설리는 지난 회사를 통해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앤설리는 사실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어린 나이니 그럴 시간에 클럽을 한 번 더 가고, 맥북을 업그레이드 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휴가 때 어딜갈 지 비행기표와 호텔을 고르는 건 몇 개월을 해도 지겹지 않았다. 종종 독서모임이나 디자이너들 모임에 나가면 지식을 쌓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게 진짜 머리에 차는 건지 아님 스치는 건진 몰라도 일단 클라이언트를 까고 욕하면서 배설의 기쁨은 누릴 수 있으니 돈 값은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쁨은 SNS에서도 누릴 수 있었는데 디자인 관련한 포스팅을 공유하고 외국아티클을 몇 개 끌어와 '진짜 놀랍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라고 코멘트를 달곤 했다. 그것은 멋져요를 받을 수 있는 좋은 방식이었다.


하지만 결코 그 공유물을 정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장을 해놓으면 정신승리로 부전승 판정이 난다. 가끔 다른 사람들의 디자인을 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라는 부러움이 늘 가득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된 공부를 해본 적도 없다. 일본이나 북유럽 디자인이 오진다고 해서 도쿄와 나고야 여행을 갔었다. 츠타야에도 가보았다. 뭐가 좋은 지 잘 모르지만 일단 대단하다고 하니 대단해보였다.  괜히 화장실 사인물보며 '오 디자인에 배려가 넘친다'라고 헛소릴 해보았다. 그건 그냥 사인물일 뿐이었다. 사실 기억나는 건 '오 예쁘다. 사고싶다. 개비싸네' 정도와 어디 타코집이 존맛이었다란 기억 정도였다.


 앤설리는 매주 스터디에 가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촌 카페에서 진행하는 것인데 금요일 7시 반에 모여서 맥주와 감바스 등을 시켜놓고 각자 한 주간 공부했던 것들을 공유하고 박수를 치는 모임이다. 구글 아티클에나 나올 법한 "훌륭한 UX디자인을 위한 10가지 비법" 에서 감동을 받았다는 멍청한 소리들도 나오지만, 사실 주목적은 스터디에 참여했다는 안도감이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


앤설리는 최근 마케팅 팀장이라고 들어온 레전드라는 놈이 꽤나 거슬린다. 그는 자꾸 디자이너에게 기획력 어쩌고를 요구하고 디자이너도 비즈니스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한 번은 연봉 올려주면 그 만큼 공부하겠다고 쏘아붙였다. 레전드는 입을 다물고 사라졌다.


앤설리의 퇴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앤설리는 퇴근 후 박스공장에서 의뢰받은 싸구려 로고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좀 힘든 날이었으니 고추바사삭 치킨에 클라우드를 조질까 생각중이다. 레전드놈이 말했던 기획력이란 단어가 문득 스친다. 살짝 불안해진 앤설리는 교보문고에 들려본다. 디자이너 어쩌고 하는 책들과 기획력을 말하는 책들을 훌어보았다. 다 똑같은 소릴 지껄이고 있다. 앤설리가 생각하기에 답은 하나다. 다시 태어나야해. 아님 누군가 내 목덜미를 내리쳐서 막힌 혈도를 뚫어주거나. 아님 뱃속에서부터 태교를 받았어야 한다. 이미 태어나기 전에 앤설리의 모친이 "2020년 출산계획과 향후 육아기획안" 을 만들고 운영할 수 있었어야 한다.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았고, 그건 내 탓이 아니다. 난 지금으로도 행복하다.


종종 앤설리에게 쓴 소릴 아끼지 않는 그렉은 그런 식으로 변명하다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꼬집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럼 연봉을 더 높여주던가. 제대로 된 교육을 해주던가.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닥쳤으면 좋겠다. 오늘은 고추바사삭이다. 누구도 앤설리를 말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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