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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창선 Dec 19. 2019

(1)도망칠거면 말하고 도망치세요.

대표가 말했다. 괜히 당신 찾느라 화장실 들락거리게 하지 말라고.

<픽션입니당 :)>




벨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잠시 동안 앉아있었다.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벨의 손이 조심스레 움직였다. 구글 창을 몇 개 닫고 메신저에서 로그아웃을 했다. 슬랙을 종료한 후 워드와 피피티를 저장하지 않고 껐다. 책상위에 올려두었던 시그노 펜과 다이어리를 슬그머니 가방에 넣었고, 먹다남은 구미구미는 놔두기로 하였다. 슬리퍼를 신발로 갈아신었다. 아직 12시40분. 지금쯤 팀원들은 커피를 사들고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을 것이다. 벨이 가방을 들고 나가려는 순간 '가슴에 비수' 가 들어왔다. 가슴에 비수는 대표의 닉네임이다. 그는 인디언식 호칭을 좋아한다. 가슴에 비수가 오랄비 칫솔에 2080치약을 콩알만큼 짜곤 이를 닦으러 나간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의 발이 멈칫하더니 이내 벨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망치는 건 좋은데, 도망친다고 그 앞에 포스트잇으로 쓰거나 슬랙에 남기고 나가세요. 괜히 찾으러 돌아다니면 시간이 아까우니까."


벨은 존나 쫄았다. 다시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었다. 문득 신발 밑창을 확인해봤다. 혹시 내가 똥을 밟은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벨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마른 세수를 하며 다시 슬랙에 접속했다.




이곳은 핫바를 만드는 회사다. 벨이 이곳에 입사한 건 '자신을 찾기 위한' 발리 여행을 다녀온 후였다. 벨은 확실히 여행을 통해 나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일단 벨이 발견한 자신은 데킬라 선라이즈를 좋아하고 스노클링을 통해 과감한 도전도 서슴치 않는 용기를 발견했다. 용기가 없고서야 어떻게 얼굴을 물에 담그고 생선들을 관찰할 수 있겠는가. 벨은 이제 자신은 힐링이 되었고 다시 일을 시작할 동기를 충전했다.


핫바를 만드는 이 회사는 스타트업 사람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했다. 매출액이 상당했고 복지 또한 풍족했다. 이번에 시리즈B를 유치하면서 해외시장 수출판로까지 뚫은데다 조직문화를 얘기할 땐 뉴미디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할 만큼 사내문화가 독특하고 이색적이었다. 벨은 입사한 지 3일만에 깨달았다. 아 이게 독특하고 이색적이긴 한데 너무 이색적이구나. 내가 알 던 이색의 뜻풀이가 잘못되었나를 몇 번 네이버사전을 통해 확인해야 했다.


어제 벨은 입사 이틀 째를 맞아 거국적으로 파워포인트를 켜고 심오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름하야 '핫바 판매증진을 위한 셀럽 마케팅전략' 일단 제목에서 비장미가 흐르게 써놓고 다비치의 사진을 찾아 집어넣은 후 이벤트의 프로세스를 하나하나 적어내려갔다.


가슴에 비수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2명 정도 되는 이 회사는 고개만 들어도 건너 사람 카톡방에 이모티콘이 오구인지 익명이인지 금새 알아차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벨에게 다가온 가슴에 비수는 말했다.


"뭐해요?"


벨이 대답했다.

"아 지금 어떻게 하면 핫바 판매를 높일 수 있을 지 고민하다가, 마케팅 전략 기획안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대답엔 사실 보이지 않았지만 턱 좀 긁어달라는 벨의 드높은 자긍심과 인정욕구가 적절히 묻어있었을 것이다. 가슴에 비수는 허리를 숙여 그걸 곰곰히 보더니 얘기했다.


"그러니까 전자렌지에서 갓 돌린 뜨거워서 이빨 빠질 것 같은 핫바를 강민경이 알차게 한 입베고 후아후아 거리고 있으면 이해리가 그걸 보고 웃고 휴지(강민경 반려견님)는 꼬리를 흔들며 한 입 달라고 빙빙 도는 영상이네요?"


벨은 자신의 기획안을 완벽히 이해한 가슴에 비수의 통찰력에 무릎 타닥 더블스크로크를 주고 바로 그것이라며 베이비페이스의 강민경과 이해리, 휴지의 등장으로 3B요소를 다 갖췄기 때문에 시선강탈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가슴에 비수는 말했다.


"일단 그럼 서두에 우리 브랜드와 다비치의 연관성에 대해 제시해주시고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의 예상 베스트댓글과 일반댓글 10개를 뽑아서 가져와주세요. 그리고 어제 지시했던 창고정리는 아직 안하셨던데. 창고는 어떻게 된거죠?"


벨은 마침 이것이다 싶어 입을 열었다.


"아 제 생각에는 일단 창고정리보다 빠르게 전략기획안을 도출해서 피드백을 받고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보는 것이 더 린하다고 생각했어요."


가슴에 비수는 그 말을 번역해주었다.


"그러니까 몸 힘든 건 하기싫고 멋진 이빨까기를 통해 빨리 자길 어필하고 싶었다 그런 뜻이네요?"


벨은 귓 속에 날아온 대규모 폭격으로 인해 중뇌에 큰 아스트랄 데미지를 입었다. 그의 표정은 이미 안면근육의 통제력을 잃어버린 후였다. 가슴에 비수는 입사한 지 24시간도 안된 벨에게 창고정리를 시켰다. 슬쩍 들어가 본 창고는 핫바와 기자재들이 가득 혼재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정리하다가 검지 손가락과 연결된 인대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고결한 기획안을 쓰지 못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 리스크를 굳이 지면서까지 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이러한 생각이 혀뿌리에 뱅뱅 돌 무렵 가슴에 비수는 말을 이었다.


"우리 제품군이 몇 개에요?"

"네?"


"우리 제품에 주요성분과 각 제품의 특징은 어떤 거에요?"

"..Aㅏ?"


"현재 제품군별 창고 재고수량이 얼마나 남아있고 위치는 어떻게 돼요?"

"또잉?"


벨은 베드로마냥 세 번의 질문에 모두 다 모른다고 답하였고, 이윽고 가슴에 비수는 건너편의 디자이너 앨리스에게 물었다. "앨. 청량고추맛 핫바 얼마나 남았지?". 레이어 마스크 편집을 하고 있던 앨리스는 600%로 시안을 확대시켜 놓고 목을 빼 픽셀 가장자리를 정돈하며 대답했다.


"창고 3단칸에 315개 있고, 1단칸에 24개 섞여있는데 오늘 오후 발송될 거 2박스랑, 17일 예약된 건 56개까지 미리 빼놔서 작업대 위에 올려놨어요. 재고율은 14% 양호한 수준이지만, 추가입고일자가 7일 남아서 이번 달 말에는 재고한계치에 다다를 거에요."


앨리스의 대답을 들으며 벨은 생각했다. 아, 여긴 제정신인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세상에서 제일 비겁하다는 남의 자식과 비교하기를 저렇게 대놓고 시전해버리다니... 게다가 일말의 배려도 없이 마스크작업을 하면서 쳐다도 보지 않고 대답할 줄이야. 사람이 좀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이것은 누가봐도 넌 오늘 뒤졌다라는 컨셉이다. 분명 모니터나 화분 뒷 편에 몰래카메라 같은 게 있고 출장나간 이사님이 돌아와서 지금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 를 외치면 가슴에 비수가 벨에게 취직 신고식 제대로 했다며 입사축하금이라도 똥꼬에 꽂아주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가슴에 비수는 벨을 보며 다시 말했다.


"브랜딩하고 싶어서 오셨잖아요. 다비치 섭외하려고 오신게 아니라."


벨의 상상은 아주 자근자근 뭉개졌다. 세상 억울함이 모두 나에게 밀려들고 엄마가 보고싶어지는 통에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조직문화가 좋다 어쩐다 하더니 이건 보통 인간의 상식선에선 이해할 수 없는 양자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벨의 눈물샘에 가득 수분이 차오르자 가슴에 비수가 말했다.


"제 앞에서 울지 마요. 지금 우리 울고 달래고 엉덩이 토닥거려주려고 모인거 아니니까. 오늘 2박스 GS쪽에 발송해야 하니까 송장 내고, 이번 년도 기획안이랑 작년도 결과보고서 파일 취합해서 정독한 다음, 예산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업무파트별로 그래프 정리해서 내일까지 저에게 보고해요."


"아니....그건 제가 해보지 않은..."


"해본 것만 하려고 했으면 새로운 회사는 왜 들어와요."


"하지만 전 예산이나 이런 건 해본 적이 없어서요..어떻게 해야할 지..."


"그럼 예산도 신경안쓰고 시간당 1,500만원짜리 연애인을 섭외해서 영상을 찍고 콘텐츠를 제작하려고 했어요? 프로젝트별 예산 분석해서 마케팅비용에 쓰인 비율과 금액이 얼마나 되는 지 파악하도록 해요. 가용범위 내에 존재하는 기획안이면 피드백회의 때 상정시켜 드릴께요."


그로부터 24시간이 다시 지났고 벨은 점심을 먹을 수 없었다. 벨은 출근하자마자 중대한 결심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회사는 나의 영혼을 담기에 너무 작고 근시안적이다. 포기도 용기다. 빠르게 그만두고 일어나는 것도 나를 위한 배려다. 모두를 위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벨은 잠시 할 일이 있다며 점심먹으러 나가는 팀원들을 뒤로 한 채 컴퓨터에서 자기 로그인 기록을 하나하나 삭제했다. 최근검색기록까지 다 삭제한 후 벨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잠시 동안 앉아있었다.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벨의 손이 조심스레 움직였다. 구글 창을 몇 개 닫고 메신저에서 로그아웃을 했다. 슬랙을 종료한 후 워드와 피피티를 저장하지 않고 껐다. 책상위에 올려두었던 시그노 펜과 다이어리를 슬그머니 가방에 넣었고, 먹다남은 구미구미는 놔두기로 하였다. 슬리퍼를 신발로 갈아신었다. 아직 12시40분. 지금쯤 팀원들은 커피를 사들고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을 것이다. 벨이 가방을 들고 나가려는 순간 '가슴에 비수' 가 들어왔다. 가슴에 비수는 대표의 닉네임이다. 그는 인디언식 호칭을 좋아한다. 가슴에 비수가 오랄비 칫솔에 2080치약을 콩알만큼 짜곤 이를 닦으러 나간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의 발이 멈칫하더니 이내 벨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망치는 건 좋은데, 도망친다고 그 앞에 포스트잇으로 쓰거나 슬랙에 남기고 나가세요. 괜히 찾으러 돌아다니면 시간 아까우니까."


벨은 존나 쫄았다. 다시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었다. 문득 신발 밑창을 확인해봤다. 혹시 내가 똥을 밟은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벨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마른 세수를 하며 다시 슬랙에 접속했다. 벨은 아까 흘리지 못한 눈물의 짠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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