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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창선 May 20. 2020

모든 사건은 '심플하면서도...' 에서 시작된다.

그 놈의 심플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디로 가는가.

디자인 프로젝트를 하면서 단 한번도 '복잡하게 해주세요' 라는 소린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심플한 디자인을 원하죠. 문제는 이 심플이란 것이 참으로 이름값을 못합니다. 심플이란 단어안에는 오조오억개의 복잡한 함의들이 숨어있거든요. 스마트란 이름이 붙은 것 치고 스마트한거 없고, 혁신적인..이란 수식어 붙은 제품에서 당최 혁신을 느낄 수 없듯이... 심플이라 붙은 오더치고 심플한 건 없습니다. 도무지 이 놈의 심플한 디자인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 지 대충 알아보도록 해요.




사람마다 심플의 정의는 모두 다릅니다. 일단 심플하게 해달라고 말하는 심리를 한 번 알아보죠. 대부분 디자인을 맡기는 이유가 뭐겠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걸 하거나'. '기존 것을 정리하고 싶거나' 둘 중에 하나겠죠. 하나하나 뜯어볼게요.


'뭔가 새로운 걸 하거나'. '기존 것을 정리하고 싶거나'

01. 새로운 걸 하고싶다.


뭔가 새로운 걸 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을 겁니다. 부스참가를 하거나, 굿즈를 만들거나, 리뉴얼을 하거나, 경쟁PT에 참여하거나,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었거나, 신제품을 런칭하거나, 투자를 받을 준비를 하거나. 자, 이런 이슈가 있을 때 사람 맘이 어때요? 그렇지 이쁘고 잘나보이고 싶단 말이에요. 여러분이 소개팅 나가고 대박 클라이언트와 미팅갈 때 묭실가서 드라이라도 한 번 하고 싶은 그런 마음입니다. 그런 자리에 체인목걸이와 Fuck the world 라고 해골그려진 티셔츠에 조던34로우 같은 걸 신고 나가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단정하고 깔끔하게 입고 나가겠죠. 그 마음과 참으로 같습니다. 여기에서 심플이란 다음의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1) 내가 하고 싶은 (자랑)말을 모두 담았는데

2)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고

3) 나눔고딕을 쓰지 않고

4) 컬러가 세련되야 하고

5) 정렬과 각이 딱딱 맞아있는

6) 그리고 가는 선을 이용하고

7) 흑백의 조화가 아름다운

8) 언스플래쉬에서 다운받은 사진을 활용하고

9) 근데 폰트는 커야하고

10) 그래프와 표가 다 들어가야 하는.


여러분 이런 거 심플한 거에요.



이런 걸 원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못생긴 자료와 내용이 다 들어가면서' 깔끔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때 화려한 레이아웃이나 그래픽은 가급적 지양하는 게 좋습니다. 직선과 정확한 그리드로 쪼개놓은 칼같은 정렬선이 더 중요해요.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심플과 클라이언트가 생각하는 심플은 매우 다릅니다. 공공기관 입찰제안서 봐보세요. 어디 숨이나 쉴 공간이 있나요? 빼곡한 표와 글자로 가득차있거든요. 내용은 엄청나게 빼곡한데 줄만 딱딱 맞아있는. 디자이너가 보이겐 막 인절미고구마겠지만... 그게 익숙한 사람들에겐 그런 스타일도 '심플'하다고 얘기하는 거에요.


이런걸 심플하다고 하는 거.



그러니 클라이언트 분들도, 무작정 '심플' 하게 해달라고 하지말고 내가 생각하는 심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셔야 해요. 흔히 클라이언트가 생각하는 심플은 몇 가지 아래와 같은 게 있어요.


1) 모든 페이지의 대/중/소제목/본문위치와 폰트크기가 다 통일되어 있다.

2) 사진 위치가 딱 고정되어있다.

3) 줄이 딱딱 맞아있다.

4) 폰트가 크고 눈에 잘 들어온다.(24pt이상)

5)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 강조색으로 쓰였다.

6) 나보다 잘하는 회사의 회사소개서를 닮았다.


뭐 이런 느낌이죠. 서로가 생각하는 심플이 엄청나게 다르니...우린 먼저 이것부터 맞춰가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 위 6가지 항목 중 골라서 그것들을 알랴주세요.



02. 정리란 걸 하고싶다.


정리를 하고 싶어하는 심플은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매출이 잘 안나오고 있거나, 사업이 커져가고 있거나, 누군가가 디자인만 다듬으면 괜찮겠다고 바람을 넣었거나, 그냥 정리를 좋아하시는 성격이거나, 디자이너가 퇴사했거나, 하는 게 너무 많은 게 중구난방이라서 뭘 하는 지 잘 모르겠고 보고도 안되는' 그런 상황들이죠. 


이런 느낌


이런 경우는 대부분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명확히 해결해주는 게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미팅 전에 이게 지금 신박한 걸 만들고 싶은 건지, 뭔갈 정리하고 싶은 건지를 파악해야 해요. 후자라면일단 기존의 문제점에 대해서 고민을 좀 충분히 들어드려야 합니다. 


보통 첫 미팅 때는 표면적인 얘기만 하는 터라 '디자인이 너무 중구난방이라서 이걸 통일하고 싶다.' 정도로만 말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이건 훼이큽니다. 디자인을 통일하고 싶은 게 아니라, 사실 어디에서 뭘 많이 하고 있긴 한데...모든 채널이 별 성과가 안나오고 있는 게 더 커요. 유튜브도 열었고 페이지도 운영하고 인스타도 하고있는데 다들 팔로우120명에서 당최 늘질 않는거죠. 그래서 이것저것 고민하다가..."디자인이 구려서 그런가보다." 라는 결론이 나온 것일수도 있어요.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이런 얘기가 나오면 먼저 각 채널 구경이나 해볼 겸 하나하나 살펴보세요. 그럼 진실이 보인다요? 딱 봤는데 아 이건..디자인 문제가 아니구나 싶은 지점이 생길 거란 말이죠. 이럴 땐 어떻게 해요? 대표님 손을 딱 잡고.


"대표님..이건 디자인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뭐랄까..음..그... 재미가 없어요."
대표님무룩...


아 물론 이렇게 얘기하며 안되겠지..(하지만 전 하는 편입니다.) 다만 디자인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 아니다란 생각이 들면 애당초 그 일을 받질 마세요. 안맞는 키로 이리저리 열려고 해봐야 키만 망가진다니까. 서로 피곤해지는거야. 근데 여러분이 최근에 차를 샀거나 전세대출을 받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제 방법을 모색해봐야 해요.


이런 경우의 심플은 과거의 것과 대비해서 상대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만들어줘야 해요. 실제적으로 성과까지 만들어내면 최고겠지만, 디자인 하나 바꾼다고 갑자기 유의미한 수치가 나오긴 힘들어요. 일단은 상대방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주사를 놔준다는 생각을 해봅시다.


과거의 디자인들을 늘어놓아보세요. 그리고 이번엔 마이너스로 갑니다. 쳐낼 거 다 쳐내고 남길 것만 남길거에요. 이런 경우의 심플은 디자이너가 원하는 그런 심플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여백이 많아지고, 요소들이 숨을 쉬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이 프로젝트는 클라이언트와의 대화가 굉장히 많아야 해요. 진짜 원하는 게 뭔지 계속 물어봐야 하고, 욕심을 자꾸 내려놓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커뮤니케이션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디자이너라면 이런 정리작업이 꽤나 재미있을 거에요. 하지만 말주변이나 미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디자이너라면 좀 힘들 수도 있겠네요.


정리를 위한 심플은 디자인 자체보다 콘텐츠를 다듬는 게 먼저입니다. 

이렇게 챡챡


1) 글의 사족과 수식어구, 동어반복을 모두 날려주고 

2) 텍스트의 하이어라키를 잡아줘요.

3) 가이드와 시스템을 분명하게 만들어서 클라이언트에게 말해줘요.

4) 명쾌하고 쉬운 언어를 써줘요.

5) 컬러는 2-3개로 고정하고 가급적 블랙/화이트를 사랑해주세요.

6) 선을 가늘게 쓰고, 통일된 레이아웃을 써요.

7) 리스팅을 자주 써보세요. 1,2,3,4...넘버링해서.

8) 그래프와 표를 단순화시켜보세요. 

9) 대화가 많아질수록 수정은 줄어듭니다.

10) 결과물 자체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진짜 중요해요.


여기서 10번이 중요한데... 사실 이런 클라이언트는 일 잘하고 말 통하는 사람을 원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주어야 해요. 프로젝트 시작 전엔 스케쥴 딱 정리해서 전달하고, 메일도 제목마다 알기 쉽게 요약문으로 정리해주고, 미팅아젠다와 미팅결과를 넘버링해서 보고해주는 것 까지가 모두 디자인업무에 포함됩니다. 파일전달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이런 프로젝트는 과정이 곧 신뢰고 과정의 심플함이 결과물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답니다. 

말 안해도 대충 아는 그런 게 중요함.

클라이언트는 자신이 현재 불안해서 디자인을 의뢰한 건지, 필요해서 의뢰한 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의뢰양식을 채우면서 뭔가 답답하고 눈물이 날 것 같다면 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작정 오더를 주기보단 상담한다는 느낌으로 최초미팅을 한 번 잡아보세요. 돈쓰고 시간써서 작업할 일인데...이 과정에서조차 스트레스 받으면 안되거든요. 내 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해요. 





그리하여 결국 '심플하면서도...' 라는 말은 결국 


'뭔갈 새롭게 만들려고 하는데...'

'내 마음을 좀 정리하고 싶은데...'

'예쁜 거 만들어서 자랑하고 싶은데...'


와 비슷합니다.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그런 디자인적 심플이 아닐 수도 있단 얘기죠. 오히려 마음의 평온과 성장의 메타포랄까요. 우리 회사가 이만큼 컸다! 잘한다! 내 맘이 정리된다! 는 걸 눈으로 보고싶은 거랄까요. 그래서 자꾸 심플하면서도...뒤에는 각종 미사여구가 붙습니다. 말하는 본인도 본심을 잘 모르고... 사실 알아도 좀 숨기고 싶고... 그냥 대충 알아줬으면 하는 거죠. 실제로 최근 예쁘고 잘한다는 대부분의 디자인 레퍼런스가 여백많고 깔끔한 직선/투톤컬러/적은 텍스트/흑백/선과 면만 활용한 디자인들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보고 들은 걸 통틀어서 심플이라고 하는 것 뿐입니다.


디자이너 분들은 클라연트 분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세요. 그리고 클라연트 분들은 이번에 나온 제 책 사서 보세요. 책광고글이었거든요. 싸우지 않고 맘 다치지 않고 돈 아깝지 않게 디자이너와 멋지게 일할 수 있을 거에요. 히힛.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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