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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분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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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창선 Aug 19. 2020

역삼동 스타트업 느낌 물씬나는 일기를 써보았다.

알아듣는 사람만 알아듣는 성수판교역삼방언

배우자 남동생분의 배우자분(처남댁이라는 말이 난 좀 싫드라. 어감부터가 좀 하대느낌이 있잖아)의 생일과 장인어른 생신이 겹치는 바람에 춘천에 가게 되었어. 아버님께서 춘천에서 노마드생활을 즐기고 계시거든. 춘천까진 ITX를 타고 가. 아무래도 합정에서 용산은 매우 가까운 터라 비교적 쉽게 갈 수 있지. 가족들의 의견을 취합해보니 일단 점심에 먼저 뱃 속에 고기를 런칭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어. 배우자 남동생님은 원래도 요식업계에서 커리어를 갖고 있어서 고기를 굽는 스킬이 아주 훌륭해. 고객의 니즈를 완벽히 충족시키는 적당한 육즙이 목살의 가치를 증대시키더라구.


한껏 디벨롭된 목살이 식도를 타고 넘어오는 순간 난 내면에서 뭔가 인커리지 되는 것을 느끼며 고기에 대한 새로운 인사이트가 생기는 것 같았어. 모든 고기가 불판위에서 일관된 굽기를 자랑하는데, 남동생님은 고기의 레이아웃까지도 고려하는 센스를 선보였지. 밸류에이션을 더욱 높여주는 디자인도 한몫햇어. 비계부분의 얼라인이 잘 맞아있었고 브라운톤의 컬러감이 참숯과 잘 어울렸달까. 춘천시골집인지라 시고르자브종 강아지가 고기냄새를 맡고 꽤나 동기부여된 상태였어. 두세점 줬더니 아예 내 옆에 포지셔닝하곤 끊임없이 받아먹겠다는 스탠스를 취하더라고. 하지만 너무 많이 주면 설사를 쭈륵쭈륵 하기 때문에 여기서 드랍하기로 했어.


목살과 삼겹이 시너지를 내며 나의 배를 충만하게 만들자, 이윽고 잠이 쏟아졌어. 적당히 비가 내릴 것 같았고, 산과 밭은 이미 무성해진 잡초에서 풀내음이 가득했지. 잡초란 참으로 놀라운데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쑥쑥 자라는 극단적인 생산성을 자랑해. 장마가 길어진 탓에 이들의 성장속도는 굉장한 J커브를 그리고 있었지. 다들 유니콘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버렸으면 좋겠지만... 이들을 컨트롤하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야.


사위가 장인어른 댁에 와서 자빠져자는 건 좋은 초이스가 아니야. 잠도 오고 해서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 온보딩 여정을 해보았지. 이 동네는 강아지에게 훌륭한 UX를 제공해. 수많은 소구점들이 여정 중간중간에 잘 배치되어 있어서 강아지의 코는 쉴 틈이 없지. 가끔 강아지가 404에러가 뜰 때가 있는데, 그건 보통 고양이나 고라니를 봤을 때야. 이 때의 녀석은 거의 이성=null 상태지. 거의 지상 최대의 포식자처럼 덤벼든다구. 목줄을 꽉 잡지 않으면 여러모로 이슈가 생길거야. 시골길의 산책이란 리스키한 요소들이 많이 존재해. 아랫집 백구는 우리 강아지를 물어뜯어 소멸시키고 싶어 안달이고, 수많은 암컷 강아지들은 녀석을 유혹한다고. 정확히는 우리 강아지가 끼를 부리는 거겠지만. 동네개들 사이엔 명확한 하이어라키가 존재해. 이걸 가끔 무시하면 큰 이슈가 발생하지.

산책을 다녀오고 나니 번아웃이 왔어. 이젠 적당한 위치에서 좀 졸아야겠어. 반쯤 눈이 풀린 내 모습은 '산책 후 개념상실한 사위' 라는 제목의 유튜브 썸네일각이었지.


저녁식사는 파스타가 인볼브된 조개찜이었는데 전체적으로 남동생님이 디렉팅을 맡았어. 각 스테이지별로 R&R을 나누었어. 누군 바질을 따고, 누군 치즈를 갈고, 조개를 호일에 감쌌지.모두가 why(' 왜 조개를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어.


산이라서 해가 빨리지는 편이야. 해가 지고나면 이 동네의 거주자 소유 강아지들의 대환장파티가 열리는데 보통 그들은 밤새도록 커뮤니케이션하는 편이야. 뒷단의 사연까진 알기 어렵지만, 나름의 회포를 풀거나 오늘 자긴 뭐 먹었다고 자랑하는 거겠지. 가끔 멧돼지나 고라니가 나타나면 온 동네 개들이 합심해서 짖는데 상당히 네트워킹이 잘 구축되어 있어. 이 때 보이스톤은 노멀한 시츄에이션의 그것과는 차별성이 있는데 약간 더 어젠트한 느낌의 톤을 구사해. 그리고 멧돼지가 사라지면 다시 웅낑웅낑대는 소리로 바뀌는데 나름의 문화가 잘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아.


어느덧 조개찜 이 다 완성되었어. 이게 가리비를 축으로 버티컬하게 어레인지되어 있는데 적당히 입을 벌린 모습이 먹음직스러웠지. 모시조개, 가리비, 바지락 등을 린하게 맛본 후 가장 최적화된 조개를 먼저 선별해서 먹어보기로 했어. 난 조개에 있어선 아직 주니어급이라서 배우자님께서 더 좋아하셨지. 조개찜은 프로덕트 그 자체보다 프로세싱이 더 강조되는데, 조개를 삶고 그걸 다 먹은 후 파스타를 넣어 봉골레를 만들는 OSMU방식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효율성이 극대화되잖아. 누가 그걸 개발했는진 몰라도 음식 하나에 집중하기보단 전체적인 Thread를 고려한 솔루션이었던 것 같아. 이번엔 특히나 조개찜에 넣은 파마산 치즈가 매우 돋보였는데 수많은 맛에서도 특히 관여도가 높았어. 찐하고 꾸덕한 느낌이 헤비하지 않고 잘 설계된 느낌.


조개찜과 술은 꽤나 밸런스가 좋은데, 먹다보면 어느덧 정신을 드랍하게 된다구. 기존 통념에 따르면 사위가 장인어른 집에 와서 꽐라가 되는 건 꽤나 위험해. 하지만 우리 장인어른께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마인드를 장착하고 계신다구. 다 같이 취해서 얼싸덜싸하는 무드를 즐기시지. 장모님은 나보다 술을 더 좋아하셔. 특히 맥주에 강점을 보이시는데, 소맥으로 경쟁했을 때는 높은 확률로 '꽐라의 골짜기'에 갈 수 있어. 리스펙하고 있어. 배우자는 중국술인 빠이주를 좋아하는데 연애시절 나에게 제안을 줘서 어셉해봤거든. 빠이주는 독주긴 하지만 뒤끝이 깨끗하고 비교적 말끔한 꽐라가 될 수 있단 특징이 있어. 물론 계속 먹거나 섞어마시면 어느덧 비대면으로 대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적당히 취하고 나면 아버님네 노래방기계가 켜져. 시골인지라 아무리 크게 틀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아. 누군가가 컴플레인을 걸어도 익일 적당한 리워드로 상쇄되는 놀라운 곳이지. 사실 노래방기계에 신곡은 없어. 업데이트가 2003년에 멈췄기 때문에 10,000번 대의 곡은 찾아볼 수 없지. 하지만 어차피 아버님은 디스코메들리만 들으시기 때문에 사용성 측면에서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아. 나도 아버님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곡들을 리서치해봤어. 서베이결과 1위를 차지했던 건 신나고 흥넘치는 조용필의 모나리자나 꽃을 든 남자같은 거였어. 물론 콘텐츠퀄리티가 좋아야겠지만, 일단 카테고리 측면에선 크게 문제가 되지 않더라고.


하지만 노래방기계 있는 곳의 이슈가 하나있다면 거대한 나방들이야. 이게 미러볼도 돌아가고 불도 켜져있으니 나방들이 어마무시하게 몰려드는데 나방은 불에 대한 grit이 있어서 한참 놀고있는 우리의 머리에 다양한 이슈를 만든다구. 이들의 조직문화는 상당히 거칠어서, 일부 독점세력이 메인 미러볼을 장악하면 나머지 세력들은 다른 조명을 찾아 여기저기 머리를 박고 다녀. 이쯤되면 노래방 세션을 종료하고, 이제 하루를 시마이해야할 때가 된거야.


가끔 이렇게 장인어른 춘천댁에 오면 서울에서 찌든 느낌들이 트랜스포메이션되는 것 같아. 살도 쪄가고, 자연 속 원오브뎀이 된 것 같고. 여러모로 모티베이션도 된 달까. 가치있는 하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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